인연의 끝이 보일 때가 있다. 특별히 싸우거나 마음이 상한 일처럼 겉으로 드러난 물리적 문제가 있는 게 아닌데도. 서서히 관계가 식어가는 게 살갗으로 느껴진다. 그 낯선 온도가 느껴져도 나는 그 흐름을 바꾸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시간도 감정도 흘러가는 대로 지켜본다. 예전의 나였다면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이 얼마인데?’라며 같이 쌓아온 그 시간이 아까워 악착같이 인연을 붙잡았다. 하지만 이제 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이게 마음이 딱딱한 어른이 되는 과정인 걸까? 언젠가, 사수였던 … [Read more...] about 우린 이제 그만 만나겠구나: 인연의 유통기한에 대하여
문화
우리와 다른 시간을 사는 강아지를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관심
강아지의 기다림은 우리의 외출보다 6배 길다. 강아지의 수명은 짧다. 그중 적지 않을 시간을 홀로 보낸다. 우리처럼 취미활동을 하거나 SNS를 하지 않는 강아지는 오직 주인만을 기다린다. 외출 후 집에 돌아와 현관 메트와 소파 등에 손을 대어 온도를 재보면, 대부분 현관 매트에 온기가 남아 있다. 오랜 시간 기다리다 보면 지치고 밉기도 할 텐데, 강아지는 한결같이 주인을 반긴다. 짧은 시간을 외출해도 마치 종일 보지 못한 것처럼 힘차게 꼬리질 한다. 우리에겐 짧은 시간이지만 … [Read more...] about 우리와 다른 시간을 사는 강아지를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관심
똑똑한 사람이 나쁜 결정을 내리는 이유
※ CNBC의 「Money psychology expert: Why the smartest people make bad decisions—compared to those with average IQ」를 번역한 글입니다. 가장 사라지지 않는 인지 오류 중 하나는 지능과 좋은 결정 사이에 나타나는 재귀적 관계다. 똑똑한 사람이 자주 똑똑하지 못한 결정을 내린다는 말이다. 심지어 ‘오마하의 현인’이라고까지 불리는 워런 버핏 역시도 오래전부터 지능(IQ)이 높다고 해서 투자에 … [Read more...] about 똑똑한 사람이 나쁜 결정을 내리는 이유
김신영의 ‘정오의 희망곡’ 10주년을 축하하며: 좋은 희극인은 언제나 투명하다
7월 1일 김신영이 10년간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한 사람에게 주는 MBC 브론즈마우스상을 수상했다. 그는 정오의 희망곡 DJ로 10년을 근속했다. 요새는 라디오를 그렇게 많이 듣지 못하지만, 정오의 희망곡은 배철수의 음악캠프와 함께 나의 최애 라디오 프로그램이라 할 만했다. 한때는 정말 매일매일 들었다. 그리고 성별을 떠나서, 이 프로를 진행하는 김신영은 내가(박명수와 함께) 가장 우러르는 희극인이다. 그녀는 2010년대 중반 즈음엔 몸도 아프고 이래저래 힘도 빠진 채 약간의 … [Read more...] about 김신영의 ‘정오의 희망곡’ 10주년을 축하하며: 좋은 희극인은 언제나 투명하다
돈 크라이: 돈이 나를 울게 한다
시골 강아지가 네 뼘쯤밖에 안 되는 짧은 목줄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뱅글뱅글 도는 경우를 본다. 찌그러진 그릇 옆에 방치된 똥 몇 개가 있다. 그 모습 앞에서 유년기의 어떤 심정이 떠올랐다. 나도 저렇게 한 자리에서 맴돌았었지. 누군가 본다면 당장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개들도 얼마나 많은데 불만이냐고, 투정하지 말라 할 수도 있을 정도의 애매한 불행. 쌀 없고 옷 헤진 절대적 가난은 아닌데, 조금 더 나아가려 하는 순간 목이 졸려 주저앉게 되는 가난. ‘Don’t worry, … [Read more...] about 돈 크라이: 돈이 나를 울게 한다
스머프 양념치킨 반 마리
※ 실제 상호는 ‘스모프 양념통닭’이지만, 엄마와 저의 기억대로 ‘스머프 양념통닭’으로 표기했습니다. 내가 예닐곱 살 때 엄마는 나를 옆집에 맡겨두고 일을 나갔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보통 잠든 나를 안고 우리 집으로 건너갔는데 한 달에 한 번은 꼭 다시 문밖을 나섰다. 나는 깊은 잠결에도 '양념치킨 먹는 날’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어둑해지기 직전의 새파란 저녁, 가로등을 돌면 보이는 커다란 간판, 그리고 간판에 그려진 스머프는 마치 엄마와 나를 반기듯 두 팔을 활짝 벌렸다. … [Read more...] about 스머프 양념치킨 반 마리
그 작가 지망생은 왜 필사를 했을까
글씨 쓰는 법을 바꾼 이유 잠깐 다른 말로 시작해 보자. '테일러 스위프트 필기법'이라는 게 있다. 내 글씨 쓰기는 이 필기법을 알고 난 이후로 달라졌다. 딱히 '테일러 스위프트 필기법'이라는 명칭으로 정해진 건 아니지만, 가장 유명한 사람이 테일러 스위프트니 그 이름을 붙여보았다. 펜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엄지 끝으로 밀면서 쓰는 필기법이다. 한번 써 보면 의외로 잘 써진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만 글씨가 좀 못나게 써진다. 실제 테일러 스위프트는 글씨 못 … [Read more...] about 그 작가 지망생은 왜 필사를 했을까
위대한 소설가의 자기소개서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인 1920년의 9월 18일,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지에 실린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에세이 「Who's Who—and Why」를 번역해 소개합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 문득 피 선생님의 에세이를 번역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제 생각이 차근히 잘 정리가 안 되는 시기라서 남의 생각을, 기왕이면 좋아하는 작가의 생각을 하나하나 졸졸 따라가며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요. 영어 사전을 내 마음대로 뒤지며 열심히 선생님의 에세이를 의역해보았는데, 틀린 부분이 몇 군데쯤 … [Read more...] about 위대한 소설가의 자기소개서
투명해지는 중입니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 난 서툰 것투성이다. 혼자 자전거 타는 것에도 서툴고, 많은 사람 앞에서 말을 하는 것도 서툴고, 날생선을 먹는 일에도 서툴다. 서툰 것투성이인 내가 가장 서툰 건 말로 내 마음을 투명하게 표현하는 일이다. 난 넉넉지 않은 집안에서 내향적인 성향을 품고 태어났다. 사 남매의 틈바구니에서 자라오면서 욕심은 독이고, 양보는 미덕이라고 배웠다.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는 눈치가 생명이다. 부모의 지치고 고된 삶을 보고 자란 자식들은 또래보다 일찍 철이 든다.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 [Read more...] about 투명해지는 중입니다
봉준호의 〈마더〉: 심리적 율법의 파괴
영화 〈마더〉는 혜자가 도준을 석방하기 위해 진짜 범인을 찾는 여정을 그린다. 혜자를 주체로 봤을 때, 이 서사 모델의 독특한 점은 대상과 수신자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서사 구조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찾으려는 오이디푸스가 결국 신탁으로 그 범인이 사실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와 유사하다. 혜자의 목적은 범인(대상)을 찾아 도준(수신자)을 석방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상과 수신자의 일치는 혜자(주체)의 목적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뜻하므로, 주체는 … [Read more...] about 봉준호의 〈마더〉: 심리적 율법의 파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