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르가 불분명한(아무튼 희망찬) 배경 음악이 흐르고, 진행자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발효기 안을 살펴본다. 라디오에서 울리는 오프닝 시그널을 기점으로 치아바타를 구울지 말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멘트까지 완벽히 외워버린 중간 CM송이 나오면 바게트 반죽의 상태를 확인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백오십 그람씩 나눈다. 무게에만 치중하느라 각 없이 잘려 나간 반죽을 매끈히 다듬고 다시 삼십 분을 기다린다. 새벽 방송이니만큼 아주 가끔 진행자가 늦거나 돌발 상황이 … [Read more...] about 꼭두새벽부터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
엄마가 딸에게 해주는 당근라페: 비록 그게 볶음일지라도
1. 이게 뭐야?” “뭐긴. 너 맨날 먹는 그거, 당근.” “그래, 당근. 그러니까 당근라페 말하는 거야?” “뭐? 당근라떼? 러페?” 아직도 엄마는 나를 어린 애로 여기는 것이 틀림없다. 이따금 직접 만든 반찬을 내보이면 엄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애’가 반찬을 해오다니 엄마 눈엔 그게 얼마나 어설퍼 보였는지, 피식 웃기까지 하신다. 얼마 전에는 제주 당근이 가장 맛있을 때라 하여, 당근라페를 만들어 가게에 가져갔다. 활동량이 많은 만큼(아니 실은 그 이상으로) … [Read more...] about 엄마가 딸에게 해주는 당근라페: 비록 그게 볶음일지라도
우연은 아닐 거예요, 크리스마스에는 슈톨렌을
실패는 쉽게 물러서는 법이 없다. 기어이 다음을 기약하고야 만다. 기약한 다음은 기척 없어도 나긋하다. 달콤하기까지 하다. 작년 이맘때 일이다. 가게를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파네토네를 준비하고 있었다. 파네토네는 이탈리아 밀라노 지역의 빵으로, 연말을 큰 명절로 삼는 유럽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즐기는 다양한 빵 중 하나다. 정신없이 바쁠 때였지만 가게를 열고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라 특별한 빵을 굽고 싶었다. 가장 먼저 체리, 크랜베리, 살구, 무화과를 럼(rum)에 … [Read more...] about 우연은 아닐 거예요, 크리스마스에는 슈톨렌을
지나간 여름의 빵을 추억하며, 빵집의 한여름
지금 감자가 맛있을 땐데 빵에 좀 넣어봐. 매일 아침 들르는 단골손님께서 들릴 듯 말 듯 말씀하셨다. 순간 아차 싶었다. 여름과 감자. 아아! 여름이지 참. 나의 지난 브런치 글을 유심히 본 분이라면 알겠지만 여름은 그야말로 글 대목이다. 여름 글 맛집이라고 자부할 정도인데 하마터면 올해는 그냥 넘어갈 뻔했다. 사실 몇 해 전 여름부터는 무더위로 푹 퍼져서는 배달 음식만 먹어댔다. 먹을 게 지천이라 손 바쁜 여름이 어쩐 일로 잠잠해진 것 같아 서글프다는 그해 고백은 현실이 … [Read more...] about 지나간 여름의 빵을 추억하며, 빵집의 한여름
그 후로 카레만 생각했다
보글보글, 도도도돌, 두둘두둘.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 같은데 당최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당장 열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 열면 특유의 향이 날아갈지 몰라, 놀라서 달아날지 몰라.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시간을 벌어보다가 괜히 칼을 쥐어 보고, 싱크대 위 부스럼을 정리하기도 한다. 정확히 몇 분 후라고 말하기엔 어렵지만, 여하튼 그 냄새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드디어 그 순간이 왔다. 냄비 뚜껑을 열어 볼 시간이 말이다. 맛있어져라! 그 냄새의 … [Read more...] about 그 후로 카레만 생각했다
잠봉뵈르, 그 심플한 속사정
덮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속을 꽉 채워 빵을 꾸왁- 누를 때, 여기저기 떨어지는 자투리를 주워 빵 틈바구니에 넣을 때마다 그 빈약한 샌드위치가 떠오른다. 브런치북 <편견을 깨면 부풀어 오른다> 주머니는 가볍고 꿈만 많던 그 시절에 먹던 빈약한 샌드위치는 어느새 추억이 되어버렸다. 속이 텅텅 빈 샌드위치는 젊은 날 차마 채우지 못했던 패기였고, 나는 빵과 빵 사이를 채우려 아등바등했다. 마침내 그사이를 가득 매워 여기저기 자투리가 떨어질 지경이 되었을 때 비로소 … [Read more...] about 잠봉뵈르, 그 심플한 속사정
한여름의 맛, 토마토의 맛
습기로 끈적한 장판 바닥, 무거운 공기 속. 회전하는 선풍기를 따라가다 아-하면 아------하는 소리가 난다. 이 기괴한 놀이에 심취하기 시작할 즈음, 엄마는 둥근 접시를 내왔다. 설탕 좀 더 뿌려줘. 어휴, 하는 소리도 잠시. 이내 설탕이 수북이 담긴 숟가락이 다가와 토마토를 적신다. 너무 차갑고 미끄덩한 식감에 입에 넣자마자 단맛을 쪽쪽 빨아 뱉고, 다시 입으로 넣는 몇 번의 호들갑을 떨고 나면 비로소 대미를 장식해야 할 순간이 온다. 단 한 방울도 놓칠 수 없다. 이때만을 위해 … [Read more...] about 한여름의 맛, 토마토의 맛
나만 빼고 난리인 세상 속에서 ‘빵의 속도’로 달리는 것은
세상이 온통 난리다, 나만 빼고. 암호화폐, 주식, 부동산 등의 뉴스가 연일 차고도 넘친다. 한때는 나도 이 어지러운 세상을 따라잡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었다. 남들 배우는 거, 사는 거, 들고 다니는 거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해봐야만 직성이 풀렸다. 오죽하면 손해 보는 것마저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였으랴. 바쁜 마음에 비하면 발걸음은 정반대였다. 느릿해지거나 빨라지기도 했지만 리듬은 없었다. 스스로 혹은 타인에게 따져 묻거나 매사 재느라 정신없던 발은 땅에서 즐겁게 구르지 못했다. 술 … [Read more...] about 나만 빼고 난리인 세상 속에서 ‘빵의 속도’로 달리는 것은
구워라, 한 번도 남아돌지 않은 것처럼
새벽녘. 창밖엔 봄비가 내린다. 요 며칠 하늘에 잔뜩 낀 미세먼지를 씻어내는 이 비는, 돋아나는 새싹을 흠뻑 적셔줄 이 비는, 차디찬 겨울을 지나 따뜻한 봄을 알리는 이 비는, 동네 작은 빵집엔 그저 무거운 물줄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아무래도 오늘 장사는 그른 것 같다. 일기예보에 봄비가 내린다고는 했지만, 내심 비켜갔으면 하는 기대로 끝끝내 고집을 피운 게 화근이었다. 전날 반죽을 준비하고 당일 새벽에 빵을 만드는 패턴이라 사실 이런 날엔 반죽 양을 줄였어야 했다. 몸집만큼 잘 … [Read more...] about 구워라, 한 번도 남아돌지 않은 것처럼
그럴 때마다 빵을 먹었다
빵, 어느 위로의 구체적인 이름 막연함을 구체화하는 동안 상상은 더 커져 있었다. 마치 잘 부푼 빵 반죽처럼. 불안과 희망은 한데 뭉쳐 시큼한 향을 냈다. 이내 어려운 현실을 되뇌면서 힘 있게 차올랐다. 보글보글 꿈틀대던 상상은 마치 반죽 속에 있는 기이한 공기 방울처럼 보기 좋게 자리 잡았다. 모든 건 일단 오븐 안에 들어서야 할 일이다. 그전까진 아무도 이 빵의 맛을 알지 못한다. 그 맛이 궁금해질수록 빵을 먹었다. 빵 한 조각은 확신 한 조각이 틀림없었다. 기가 막히게 … [Read more...] about 그럴 때마다 빵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