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온통 난리다, 나만 빼고. 암호화폐, 주식, 부동산 등의 뉴스가 연일 차고도 넘친다. 한때는 나도 이 어지러운 세상을 따라잡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었다. 남들 배우는 거, 사는 거, 들고 다니는 거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해봐야만 직성이 풀렸다. 오죽하면 손해 보는 것마저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였으랴.
바쁜 마음에 비하면 발걸음은 정반대였다. 느릿해지거나 빨라지기도 했지만 리듬은 없었다. 스스로 혹은 타인에게 따져 묻거나 매사 재느라 정신없던 발은 땅에서 즐겁게 구르지 못했다. 술 한 잔 거나하게 걸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만이 이런 내 마음을 알아차렸다.
매사에 조바심이 났다. 마치 나는 ‘조금 더’이라는 말을 당근 삼아 달리던 경주마와도 같았다. 좋은 걸 먹는 이유는 나쁜 걸 먹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과정을, 과정은 결과를 남발하며 서로를 의심했다. 곰곰 원인을 따져보니 통근 시간까지 합하면 일상에서 8할을 차지하는 게 ‘직장 생활’이라 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속했던 곳은 비교적 경쟁 구도가 덜했던(나만의 착각이었을까)조직이었다. 인사 시즌이라고 매서운 피바람이 불던 곳도 아니었고, S나 A 같은 애매한 알파벳으로 나에게 등급을 매기지도 않았다. 다른 조직과는 다른 잣대가 버거운 적도 있었지만 그냥 묵묵히 내 일을 하면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나는 끊임없이 바깥을 살폈다. 혹시나 나도 모르게 느긋해진 내가 뒤처질까 싶어서였다. 사내에서 하지 않은 경쟁을 바깥에서 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무언가 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늘 노심초사했다. 그렇게 일궈온 커리어는 마치 회전 초밥집에 쌓인 접시 같았다. 욕심껏 놓치지 않고 옆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쌓아야 하는. 높이 쌓고 싶은 나의 접시는 삶의 바퀴였다. 바퀴 없는 일상은 구를 리 없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 한동안은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울타리 밖을 동경하면서도 감히 넘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감정에 충실히 무뎌지기로 했다. 사표를 던지지 말아야 할 이유는 던져야 할 이유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울타리 밖을 엿보는 매 순간이 올 때마다 ‘별것’ 아니라며 술잔을 넘겼다. 물론 그날의 술은 지독하게도 썼다.
‘별것’ 아닌 순간은 포인트 적립되듯 찔끔찔끔 쌓여갔다. 어느 날 우연히 들여다보니 목돈으로 쓸 수 있을 만큼 불어있었다. 다른 것보다 회의가 문제였다. 논점은 흐려지고 산으로 강으로 나자빠진 회의가 미칠 듯이 싫었다. 회의가 끝나는 시간은 결론에 다다랐을 때가 아니라, 마무리를 위해 애써 웃음을 지을 때쯤이었다. 회의가 끝나면 우리가 쏟아낸 말은 휘발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닌 회의도 있었지만)내가 담당하는 업무 회의를 마치면 회의록을 써야 하는 압박만 덩그러니 남았을 뿐이다.
발언된 내용을 곱씹으며 쓰는 회의록은, 그러니까 날것의 음성을 정제된 언어로 기록하는 일은 그 어느 업무보다 고역이었다. 써 내려가는 문장 한 줄 한 줄로부터 화가 잔뜩 났다. 그러다 어느 날은 그 권태가 절정에 다다랐고 모든 것을 놓고 싶었다. 거짓말처럼. 나는 왜 화를 내야 하며, 이 화의 원인으로 타인을 지목해야 하며, 일일이 토를 달아야 하며, 그리고 이 흩어진 문장을 대체 왜 기록하고 있는 것인가. 해마다 업데이트되는 ‘비전 보고서’가 사내에 돌았지만, 거기엔 내 비전은 없었다.
그렇게 바로 퇴사를 결정했다고 하면 이 글은 완벽한 기승전결을 이루겠지만, 착실한 나는 그로부터 이 년을 더 버텨냈다.
지하철로 향하는 수많은 발걸음에 장단을 맞추는 것이 군무라면, 작은 빵집을 여는 새벽은 전쟁터다. 적은 그 누구도 아닌 타이머로 사방에 널리고 널린 것이 특징이다. 초 단위로 째깍거리는 이 타이머가 울리면 나는 모든 행동을 멈추고 다시 그를 올려다보여야 한다. 당최 초 단위로 움직여본 적이 없던 나는 이 작은 요물 앞에서 매일을 절절맨다.
새벽부터 오픈 전까지의 여섯 시간 동안은 오로지 빵과 나만의 시간이다. 잠이 들기 전까지 한참을 뒤적이던 뉴스도, 재밌는 영상도, 경쟁할 타자도 없다. 트집거리를 잡아낼 시간도 사람도 물론 없다.
내가 경쟁해야 할 것은 오로지 빵일 뿐이다. 직장 생활할 때와 마찬가지로 쳇바퀴와 다름없이 빙빙 도는 일과이지만, 아니 어쩌면 더(초 단위로 움직이니까) 단단하게 조여 있지만, 매일이 다르다. 온도, 습도 등에 예민한 이 녀석을 상대하는 건 정말이지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섯 평 남짓한 이 작은 공간에서의 시간은 오로지 빵이 이끄는 대로다. 발효가 빨라지면 덩달아 나의 시계도 빨라진다. 이어폰에서 경제와 시사를 읊는 라디오 DJ의 말이 어느새 들리지 않는다. 빵을 만드는 아침엔 세상의 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다. 코인이 머리 끝까지 올랐어도, 주가가 곤두박이쳐도 집값이 미친 듯 들썩여도 나는 빵의 시간을 따를 뿐이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금이 괜찮을지 말이다. 이렇게 하다가는 세상 물정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이 든다. 누군가 어마한 부를 축적하고 있을 동안 내게 남은 건 오븐에 덴 상처뿐이면 어쩌지 하는 조바심도 난다.
‘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멋지고 뻔한 말로 스스로 위로하고 싶지만,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 풍족한 부는 행복의 많은 필요조건 중 하나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부와 삶의 질이 별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더 솔직히 말해서 아직 나는 경제적 여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 그렇다면 이 기다란 바게트를 꾸준히 팔면 나는 언젠가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있을까? 과연 그럴까?
그래도 행복하지 않아?
체력이 달려 고생이라는 말에 친구가 기습 질문을 해왔다. 통화 내내 힘들다 징징거린 내게 행복하냐니. 그런데 의외로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응, 행복해.
어떤 게? 라고 되묻는 질문엔 뜸을 들였다.
남을 탓하지 않아도 돼서 좋아.
엥? 아무리 내 입이지만 이런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쨌거나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가야 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지난 십 년 동안 일이 잘 풀리건 안 풀리건 간에, 나는 그 원인을 타인 혹은 제3의 요인으로 지목했다. 하물며 칭찬을 받거나 성과가 좋은 일에도 타인에게 영광을 돌렸다. 스스로를 한없이 작은 사람이라고 여기면서도 그렇다고 또 내가 못난 인간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뭘 해도 생산적인 에너지를 축적하지 못했고 나의 시계는 항상 타인을 향해 있었다.
세상의 시간을 따른 탓이다. 레이스는 앞으로 길게만 뻗어 있었고 출발점은 나란했다. 만약 레이스가 직선이 아닌 원형이라면 어떨까. 그렇다면 각자 출발점이 달라도 전혀 상관없을 것이다.
둥근 레이스는 우리를 일렬로 세우지 않는다. 그저 나의 출발점이 어느 지점인지, 내가 몇 바퀴를 얼마 만에 돌았는지만 생각하면 될 뿐이다.
이렇게 일을 벌인 이상 때론 희망 회로를 돌릴 필요가 있다. 빵의 시간을 따르다 보면 언젠가 무슨 형태로든 대가가 있을 거라는 믿음 같은 것 말이다. 사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말을 좋아하지 않아서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여하간 그 대가가 경제적인 것이면 좋겠지만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으로선 괜찮을 것 같다. 다다라야 할 목표가 아직 많기 때문이다. 그 목표 중엔 물론 경제적 여유가 있긴 하지만, 우선순위는 아니다. 나의 일 순위는 오로지 작지만 소중한 이곳에서 오래도록 맛있는 빵을 굽는 것뿐이다. 만약 그게 이 고생의 대가가 된다면 나는 기꺼이 빵의 시간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
오늘도 나는 또각또각 구두 대신 끈 풀린 운동화를 신고 빵의 속도로 달린다. 핏이 매끈한 코트 대신 벙벙한 작업복을, 머리엔 투박한 빵모자를 얹고서 말이다. 하여간 뭘 해도, 하지 않아도 매사 노심초사하던 지난날보단 낫겠지 싶다. 혹시 누가 알까. 오늘은 저 기다란 바게트가 어떤 행운을 가져다줄지 말이다.
오늘도 나는 나의 속도로 달린다.
원문: 오가닉씨의 브런치
몇몇 분들이 제 빵집을 궁금해하셨어요. 부끄럽지만 인스타그램 주소 남깁니다.
홍보 목적으로 오해하실까 싶어 따로 상호를 남기지 않았는데요. 그냥 아기자기하게(?) 운영 중인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부족한 글에 관심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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