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쓰는 법을 바꾼 이유
잠깐 다른 말로 시작해 보자. ‘테일러 스위프트 필기법’이라는 게 있다. 내 글씨 쓰기는 이 필기법을 알고 난 이후로 달라졌다.
딱히 ‘테일러 스위프트 필기법’이라는 명칭으로 정해진 건 아니지만, 가장 유명한 사람이 테일러 스위프트니 그 이름을 붙여보았다. 펜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엄지 끝으로 밀면서 쓰는 필기법이다. 한번 써 보면 의외로 잘 써진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만 글씨가 좀 못나게 써진다.
실제 테일러 스위프트는 글씨 못 쓰기로 유명하다고(…) 하지만 나는 원래 글씨를 나쁘지 않게 쓰는 편이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 필기법이 손목과 손가락의 부담을 줄여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손으로 뭘 쓰는 걸 무척 좋아하는 편인데, 한 단락 이상 쓰고 나면 손목이 아파 더 오래 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새로운 필기법으로 글을 쓰면 3단락 이상 써도 손목에 부담이 잘 오지 않는다. 기존의 필기법은 세 손가락이 펜을 지탱하는 상태에서 손목을 움직여 글씨를 쓰는 방식이라면, 이 필기법은 검지와 중지가 가볍게 펜을 지탱하는 상태에서 엄지손가락 끝만 유연하게 움직여 글씨를 쓰는 방식이라 그런 것 같다.
적응하는 데에는 약 21일 정도 걸린다고 한다. 나도 실제로 딱 3주가 지난 뒤 글씨체가 안정감을 찾기 시작했다. 이 필기법을 알게 된 이후로 소소하게 인생이 바뀌었다. 예를 들어, 지금은 일기에 쓰고 싶은 내용이 많다고 해서 압박을 느끼지 않는다. 필기할 내용이 많을 때도 편하다. 그리고 또 하나 자유로워진 게 있는데, 필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필사, 나도 많이 시도해 보았는데요
윤동주는 백석의 시를 필사했다고 한다. 작가 신경숙은 「필사로 보냈던 여름방학」이라는 글에서 수많은 작가를 필사하며 보냈던 습작 시절을 이야기하기도 했다(작가 유시민은 신경숙이 너무 많은 필사를 해서 자신의 문장과 타인의 문장을 혼동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렇게 작가를 동경하는 수많은 사람이 필사에 도전했다. 나도 그랬다. 그리고 번번이 실패했다(흑흑…).
처음으로 필사했던 건 오정희의 소설이었다. 한국문학 중 오정희의 문장을 으뜸으로 친다는 이야기를 들어 그런 것이었다. 야심 차게 작가의 대표작 「유년의 뜰」을 구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 취향의 문장은 아니었다. 난 간결한 문장을 좋아하는 반면, 반면 오정희의 문장은 너무 길어서 어디에서 호흡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책을 다루는 것도 어려웠다. 쉽게 펼치기 위해 책을 팔꿈치로 누르다가 책이 미끄러진 게 부지기수였다. 독서대가 있었다면 일이 좀 더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게 문제인가 싶어서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류의 단편집 「달빛의 강」도 도전해 봤다. 꽤 오래 썼지만, 결국 실패했다.
실패한 이유는 뚜렷하다. 물리적으로 손이 아프다는 것이다. 내가 봤을 때 손글씨로 부담스럽지 않게 할 수 있는 필사는 시까지가 마지노선이다. 소설 필사는 손목 싸움이다. 손목의 튼튼함이 승패의 열쇠다. 하지만 난 며칠 전에 찾아갔던 안마원에서 손목 관절 아프지 않냐는 걱정스러운 질문을 받았다. 만져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수준이라는 뜻이다.ㅠㅠ
소설가 오정희는 대학 다닐 때 커다란 주전자에 커피를 가득 끓여 새벽 내내 마시면서 소설을 쓰고 필사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난 그 경지까지 갈 수 없었다. 이렇게 손이 아파서 다들 원고지에 글은 어떻게 썼는지 모르겠다. 원고지 쓰는 법을 익히자마자 키보드로 넘어온 컴퓨터 키드들은 필사를 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게 다 빌 게이츠 탓이다.
하지만 테일러 스위프트 필기법은 나를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두 페이지, 세 페이지 훌쩍 넘겨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게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이제 나는 마음대로 필사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으로 성공했다. 내가 필사를 마친 첫 원고는 바로 시사인 천관율 기자의 기사 「한국 정치 요동칠 20대 국회 최대 사건」이었다. 약 3일 정도 걸렸고, 이면지 3장 정도 쓴 것 같다.
그런데 필사는 왜 하는 걸까요
그런데 잠깐 생각해 보자. 왜 하필 필사를 하는 걸까? 필사를 하면 뭐가 좋아질까? 아니, 애초에 필사가 무슨 뜻일까? 네이버에게 물어보자.
筆寫 (필사)
베끼어 씀
그렇다고 한다. 간명하기 짝이 없는 정의다. 그렇다면 ‘왜’ 베껴 쓰는지 고민해 보자. 나는 이 글의 무엇을 ‘베끼고’ 싶은가? 필사는 결국 그 문장을 쓴 사람의 ‘사고의 흐름’을 익히는 과정이다. 왜 이 맥락에서 이 단어를 떠올렸는가? 왜 이 사람의 논리는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는가? 이 사람이 쓴 문장을 내가 쓰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이것들은 그 작가가 되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필사는 이 글을 쓰던 순간의 작가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읽기는 어쩔 수 없이 구멍이 생긴다. 자기도 모르게 몇 개의 단어, 몇 개의 문장을 점프하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필사는 그럴 수 없다. ‘다시 쓰기’는 말 그대로 원작자가 차곡차곡 쌓아 올려 완성한 글의 금자탑을 그대로 따라 하는 과정이다. 필사를 하는 이상 단 한 글자도 내 손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래서 필사는 빠르게 쓰는 게 능사가 아니다. 그래서 흩어지는 집중력을 한 글자 한 글자 모아 글을 받아써야 한다. 마치 그 작가가 되었다는 마음으로.
… 그런데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완전히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글을 쓴 사람의 의도와 기술을 이해하는 게 필사라면, 굳이 손글씨를 고집할 이유도 없는 것 아닌가?
1,000번 저어 드디어 필사를 완성했습니다, 키보드긴 하지만
그래서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필사를 하기 위해서. 5년 만에. 이번 작업에 필요한 도구는 만년필이나 모나미 볼펜이 아니다. 로지텍 팬터그래프 키보드와 알파스캔 모니터, 그리고 구글 문서다. 이제 책을 고른다. 논픽션의 건조한 문장과 탄탄한 논리를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시사IN》을 골랐다. 그중에서도 천관율 기자의 정치 기사를 골랐다.
천관율 기자의 글을 좋아한다. 그의 기사는 건조한 문장에도 말미에는 사람을 고양시키는 극적인 결론을 도출해낸다는 특징이 있다. 현상을 넓게 조망한 뒤 여러 학자의 이론을 들어 첩첩이 전개를 쌓고, ‘그럼에도’ 이 사회가 나아가야 하는 올바른 방향으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시키는 이 방식은 논픽션임에도 짙은 여운을 남긴다는 특징이 있다. 나는 그게 꽤 드라마틱하고, 때로는 감동적이라고 느낀다.
예전에 들었던 영화 수업의 교수님은 컷 분석 숙제를 내주시면서 말했다. 꼭 영화만 분석할 필요는 없다고, ‘무한도전’도 영화만큼 컷을 잘 쓰고 있으니 좋아한다면 그걸 숙제로 해와도 된다고. 마찬가지다. 소설을 공부하기 위해 꼭 소설만 볼 필요는 없다. 그래서 나는 기사를 베껴 쓰기 시작했다.
이게 나의 필사 노트다. 중간에 소소하게 다른 재질이 섞여 있다. 총 5편의 기사. 내가 좋아한 기사로 신중하게 골랐다. 모두 구글 문서 기준 A4 7장은 너끈히 넘는 대형 기사들이다. 이걸 썼다고 해서 내 글쓰기가 바로 레벨업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확실히 느끼는 것은 있다.
첫째, 필사의 ‘깊이 읽기’가 필요한 장르는 어쩌면 이런 논픽션일지도 모른다는 것. 속독 버릇이 있는 내가 놓쳤던 논리의 구석구석을 찾아내면서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논리를 발굴해 낸 논픽션은 이전과는 아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둘째, 이렇게 긴 글을 써내는 작가(기자)들에 대한 경외심이 생긴다는 것. 내가 아무리 한 자 한 자 생각하며 베껴 쓰려고 노력하지만 이 글을 처음으로 생각해낸 작가들만큼은 아닐 것이다. 작가는 이 한 문장을 찾기 위해 엄청난 양의 정보를 찾고 떠다니는 수많은 사념을 연결한다. 그래서 작가의 글쓰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가 된다. 독서가 우주 안의 행성을 들여다보는 일이라면, 필사는 드넓은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방법론이다.
필사를 많이 한다고 해서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모든 좋은 작가는 다른 작가의 세계를 깊게 탐구해 본 경험이 있다. 그리고 필사는 분명히 탐구의 수단 중 하나일 것이다. 글을 깊게 읽고 싶은 당신에게 추천한다. 당신이 가장 좋아한 책을 떠올려 보기를, 그리고 한 번 받아 적어 보기를. 단 한 페이지라도, 단 한 줄이라도.
원문: 김수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