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제 상호는 ‘스모프 양념통닭’이지만, 엄마와 저의 기억대로 ‘스머프 양념통닭’으로 표기했습니다.
내가 예닐곱 살 때 엄마는 나를 옆집에 맡겨두고 일을 나갔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보통 잠든 나를 안고 우리 집으로 건너갔는데 한 달에 한 번은 꼭 다시 문밖을 나섰다. 나는 깊은 잠결에도 ‘양념치킨 먹는 날’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어둑해지기 직전의 새파란 저녁, 가로등을 돌면 보이는 커다란 간판, 그리고 간판에 그려진 스머프는 마치 엄마와 나를 반기듯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간판 아래 허름한 문을 열고 들어서면 닭을 튀기는 소리와 황홀한 냄새에 마치 다른 세상에 닿아 있는 것 같았다.
“왔어? 반 마리 맞지?”
“네, 양배추는 많이 주세요.”
우리가 의자에 앉기도 전에 이미 튀길 준비를 마친 주인아주머니는 물처럼 넘실대는 기름 속에 튀김옷이 뚝뚝 떨어지는 닭 몇 조각을 잽싸게 넣었다. 닭과 기름이 만날 때 내는 격렬한 소리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들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이내 튀김 소리가 잠잠해지면 주인아주머니와 엄마의 대화,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던 소리가 뒤섞여서 어수선했다. 파랗고 뻘건 불빛이 뒤섞인 요란한 테이블 위에는 양배추 샐러드와 허연 깍둑무가 놓였다. 그러면 엄마는 케첩과 마요네즈가 뿌려진 양배추를 휘휘 저어서 자그마한 내 입으로 가져다주었다.
“으으, 싫어. 치킨 먹을 거야.”
채소를 끔찍하게 싫어했던 나는 주황색 소스로 범벅된 양배추를 완강히 거부했다. 주인아주머니의 뒷모습만 쳐다보면서 양념치킨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 십오 분쯤 지났을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접시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자기 생각해서 몇 조각 더 튀겼어.”
새빨간 양념 위에 깨가 뿌려져 있었고 다리 하나, 날개 하나, 퍽퍽한 살코기 몇 조각 그리고 주인아주머니의 인심 몇 조각이 더 얹어진 양념치킨 반 마리가 접시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나는 코며 입이며 볼이며 온 얼굴에 양념을 묻혀가면서 정신없이 치킨을 뜯기 시작했다. 그러다 얄따란 목과 퍽퍽한 살이 붙은 치킨 두어 조각만 남으면 엄마를 쳐다보았다. 허겁지겁 먹는 나를 지켜만 보던 엄마는 이제 다 먹었냐는 눈짓을 했다. 분명 주인아주머니께 저녁을 먹어 배가 부르다고 했던 엄마는 남은 닭 조각을 재빨리 먹어 치웠다.
양념까지 접시를 싹싹 비우고 가게를 나서면 깊은 밤하늘 아래 아까보다 더 밝아진 가로등이 있었다. 엄마의 손을 꼭 잡고 걷다가 위를 올려다보면 흡족해하는 얼굴이 보였다.
스머프 간판을 보기가 힘들어진 이후로도 내 인생에서 치킨의 활약은 대단했다. 수능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양반후반’이라는 아주 적절한 결단을 내린 스스로에게 탄복했다. 일 때문에 집을 비운 엄마가 맘껏 먹으라고 쥐여준 카드가 점수 걱정을 날려버린 덕이었다. 수능 날의 ‘양반후반’은 그야말로 상징적이었다. 치킨은 대강 배나 채우자고 허투루 택한 음식이 아니었으며 지긋지긋한 학교에서 벗어나 성인이 되었음을 자축하기 위해 간택한 음식이었다.
타지에 있을 때는 향수병이 아닌 치킨병을 앓았다. 그곳에도 물론 겉이 오돌토돌한 ‘크리스피 치킨’이 있었지만, 빨간 양념이 묻은 얇은 튀김옷의 ‘양념통닭’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무엇보다 칠리소스가 우리네 양념 소스인 척을 하는 것은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미국식 크리스마스 문화를 향유하려는 한국인의 욕망을 자극한 것”(정은정, 『대한민국 치킨전』)에 불과하던 치킨은 이제 한국인과는 떼려야 뗄 수도 없는 흡사 한식이 되었고, K-pop과 함께 역수출하기에 이르렀다.
2년간 해온 채식을 종용한 것도 바로 이놈의 치킨이다. 엄마는 내가 당신 뱃속에 있을 때 닭을 자주 먹어서일 것이라는 그럴싸한 추측을 했다. 게다가 애틋한 기억도 자꾸만 치킨을 먹으라고 나를 부추겼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아빠’가 ‘월급날’이면 ‘코트 자락’에 품어온 ‘노란 각대 봉투’ 속 ‘통닭 한 마리’ 같은 만인의 추억을 들먹거리면서 말이다. 설령 이런 추억이 없더라도 저마다 한 번쯤은 ‘닭 목을 좋아하고 닭 다리가 싫다’던 엄마들의 진짜 취향을 깨달은 아찔한 경험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1980년대 혹은 그 이전에 태어난 세대에게 치킨은 여러모로 애틋한 음식이긴 한 것 같다. 치킨에 대한 집단적 단상은 우리에게 (그게 왜곡이든 아니든 간에) 추억을 선물해주었고, 이로써 힘들었지만 꿋꿋하게 살아왔음을 확인하면서 찐한 위로를 받는다.
반면 한결같이 맛있는 닭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산다. 이제 치킨은 흔한 음식이 되었고 맛은 진화했다. 맥주와 함께 최강 조합으로 ‘치맥’이라는 일종의 문화로 자리 잡은 지도 오래다. 마치 흑백으로 나뉘는 이분법을 거부하는 세대처럼 치킨을 더 이상 양념, 후라이드 만으로 가를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이로써 치킨집에서 ‘반반 주세요’하면 만사형통이던 시대도 끝이 났다.
치즈 가루, 마요네즈, 심지어 과자 가루까지 다양한 맛을 품은 새로운 치킨을 위한 연구는 어딘가에서 지금도 진행 중이다. 퍽퍽한 살코기를 싫어한다거나 다리보다 날개를, 살코기보다 껍질을 선호한다는 등 개인의 사소한 취향까지 맘껏 드러내는 것도 치킨 한 접시 앞이면 가능하다. 그렇게 치킨은 온 국민의 소울푸드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전화영어 선생님도 ‘취맥크’를 알더라.
그도 그럴 것이 닭은 소와 돼지를 제치고 가장 소비량이 많은 육류이다. 값이 싸고 맛이 좋아서 세계적으로도 널리 쓰이는 식자재다. 튀기고 찌고 굽는 등 닭만큼 다양한 요리법과 조리법에 따라 다른 맛을 가진 식자재도 드물다. 게다가 단백질의 보고라고 알려진 닭가슴살과 이보다 더 완전할 수는 없다는 완전식품이라는 달걀 때문에 닭은 오늘도 비정상적으로 몸집을 키우고 기계처럼 알을 낳는다.
이 때문에 닭은 비좁은 케이지에서 성장촉진제를 맞아가면서 양계장의 시계를 빠르게 돌린다. 근래엔 동물복지 인증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상황이 나아진 것 같지만 이러나저러나 퇴근 후에 영접할 ‘치느님’을 기다리는 나와 우리는 여전하다. 바야흐로 치킨의 전성시대가 왔고 닭의 수난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데 정작 치킨의 전성시대 한가운데서 아무리 찾아봐도 그때 그 맛이 나는 치킨은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겨우 그것도 특별한 날에만 먹던 애틋함이, 행여 남은 살점이 있을까 빈 뼈를 쪽쪽 빨아먹던 가난이, 반 마리뿐이라 양껏 먹지 못한 아쉬움이 사라져 버린 지 오래라 그런 것일까. 그래도 맛 좀 보겠다고 배달 앱을 켜거나 치킨집에 들어가 메뉴판을 보면 어지럽기까지 하다.
‘양반후반’ 시대에도 뼈를 깎는 고통의 선택이 필요했는데 할라마요, 갈비맛, 스노윙치즈, 쇼킹핫 등의 세계에서 겪는 갈등은 차원이 다르다. 누군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가뜩이나 피로한 일상을 끝내려고 먹으러 가서까지 선택의 기로에 서야 하는 현실에 괜한 화풀이를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인지 옛날 통닭을 표방하는 가게를 보면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싶어 위안을 얻곤 한다.
하여간 그리워할 맛이 있어 참 다행이다 싶다가도 때론 씁쓸해진다. 그때 그 스머프 양념통닭 그리고 그 맛을 그리워하는, 그러니까 음식의 기억은 그때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슬픈 사실을 고백한다. 아니 오히려 맛있어서 더 잔인하다. 스머프 양념통닭 반 마리는 내게 기쁨의 맛으로 기억되지만, 한편으로는 한 마리를 시킬 돈도 없던 그 시절 엄마의 가난한 삶을, 전보다 또렷해진 내 삶의 철학을 더욱 선명히 비춘다.
치킨의 메뉴가 늘어갈수록 닭장은 더 좁아진다는 현실과 튀김옷과 양념에 묻혀 점차 자취를 감춰가는 닭의 속사정을 깨달은 뒷맛은 영 개운치가 않다. 엄마를 생각해 몇 조각 더 튀겼다는 온정은 기대하기 힘든 세상에서 ‘무 많이’라는 말이 치킨집 사장님께 얼마나 부담스러운 말인지도 이제는 잘 안다. 그래서 나는 아마 그때와 똑같은 양념치킨을 먹게 되어도 기쁨을 느끼지 못할 것 같다. 그때 그 맛을 영영 맛볼 수 없다는 생각에 별안간 서글퍼진다.
이 글은 애틋한 치킨을 맛본 유일한 세대가, 치킨이 흔한 세상에서도 그 맛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러니에 대한 넋두리다.
원문: 오가닉씨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