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의 시선에 닿아 쌓인 나를 기억하는 일이다. 그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 그가 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그리하여 그에게 '나란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것, 그래서 관계 맺는 일은 내 안에 나를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고, 그렇게 더해진 나를 하나 더 짊어지는 일이다. 관계 맺는 사람이 하나 늘어날 때마다, 나도 하나가 더 생겨난다. 관계의 피로는 상대방을 보고 기억하는 것보다, 그들에게 새겨진 나를 감당하는 데서 더 크게 온다. 그러나 … [Read more...] about 관계의 피로, 나를 흩뿌려놓는 일에 관하여
저출산은 거대한 가치관 변화의 문제다
저출산 문제는 비혼 혹은 딩크에 대한 가치관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결혼한 커플의 출산율을 보면 평균 자녀 수가 2명에 이를 정도이니, 무엇보다도 이 문제는 비혼에 대한 가치관과 가장 큰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비혼에 대한 관점은 완전히 양분되어 있는데, 하나는 젊은이들이 열악한 사회환경의 문제로 비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시선과, 다른 하나는 시대의 변화로 비혼 자체를 하나의 가치관으로 더 선호한다는 관점이다. 언론이든 학자든 '대책 마련' 혹은 '대안 제시'에 관여하는 … [Read more...] about 저출산은 거대한 가치관 변화의 문제다
한국 사회는 여성의 나이에 유난히 강박적이다
대학 시절, 서양의 고전 문학에 심취했을 무렵 다소 생경하면서도 흥미롭게 다가왔던 장면이 있었다. 내가 좋아했던 이 유럽 전통의 소설들에서는 수시로 이미 결혼을 한 부인들이 등장하곤 했다. 자주 그들은 굉장히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동경할 만한 존재로 묘사되었다. 나는 이런 묘사들이 낯설어 쉽게 와 닿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미의식을 알아가는 일이 참 좋았다.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까지 한국의 근대문학 같은 데서는 거의 접하지 못했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근대문학에서 … [Read more...] about 한국 사회는 여성의 나이에 유난히 강박적이다
인문학은 무용했는가
인문학 열풍이 시작된 건 대략 십여 년 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화두가 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그 이후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일종의 요술상자이자 수수께끼처럼 사회에 퍼지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인문학이라는 '그 무엇'의 힘에 닿아보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관련 책들, 강연들이 쏟아졌고, 크고 작은 성행을 이룬 경우도 적지 않았다. 더불어 '인문학 셀럽'이라 부를 만한 이들도 상당수 탄생시키며 적지 않은 시장을 형성했다. 그런 열풍에 힘입어, 소위 ‘인문학 씬’에 … [Read more...] about 인문학은 무용했는가
타인들의 세상, 청년들의 세계: ‘버닝’
※ 이 글은 영화 〈버닝〉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내용 누설을 원하지 않으면 이 글을 닫아 주세요. 정지우 문화평론가의 영화 읽기 북향의 단칸방에는 하루 한 번 햇빛이 든다. 그러나 그 빛은 진짜 햇빛이 아니다. 남산타워 전망대의 유리에 반사된 빛이 방안으로 슬며시 들어 벽을 비춘 것이다. 청년은 그 찰나와 같은 순간에, 세상을 꿈꾼다. 어딘가에서 건너온 빛, 그 빛이 반사된 길을 따라나선다면, 어쩌면 저 진짜의 빛이 있는, 진짜의 세상과 만날 것이다. 그를 둘러싼 삶이라야 … [Read more...] about 타인들의 세상, 청년들의 세계: ‘버닝’
삶의 결핍과 존재의 성숙에 관하여: ‘우리도 사랑일까’
정지우 문화평론가의 영화 읽기 인생에는 빈틈이 있기 마련이야. 그걸 미친놈처럼 일일이 다 메꿔가면서 살 순 없어. 〈우리도 사랑일까(take this waltz)〉(2011)는 결혼 5년 차 부부의 이야기다. 프리랜서 작가인 마고와 남편 루는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낸다. 그들의 결혼생활에는 다정함과 유머, 장난스러움과 사랑스러움이 풍부하게 자리 잡았다. 그러나 마고는 이처럼 안정적으로 이어지는 결혼생활에서 권태를 느낀다. 행복하긴 하지만 강렬하지 않고 … [Read more...] about 삶의 결핍과 존재의 성숙에 관하여: ‘우리도 사랑일까’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일에 관하여, ‘지니어스’
[정지우 문화평론가의 영화 읽기] “그는 삶의 방식을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이야.”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등 당대 최고이자, 여전히 거장으로 기억되고 있는 작가들의 유령이 있다. 그 유령은 그들의 곁에서, 드러나지 않게 그들을 길들이고, 조력하며, 세상의 빛을 보게 만들었다. 영화 <지니어스>는 그 유령, 스크라이브너스 출판사의 편집자 ‘퍼킨스’가 또 다른 거장이 된 작가 ‘토마스 울프’를 만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어할 수 없는 정열에 휘둘리며 글을 쓰고, … [Read more...] about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일에 관하여, ‘지니어스’
삶의 기본을 박탈하는 사회 ‘나, 다니엘 블레이크’
정지우 문화평론가의 영화 읽기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다. 사회 안에는 더 쓸모 있게 여겨지는 존재들이 있다. 더 머리가 좋고, 더 건강하고, 더 체제에 잘 복종하여 사회가 선호하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만이 쓸모 있는 존재는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쓸모의 자리가 있다.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노인도 혼자 남겨진 아이에게 동화책 읽어주며 보살피는 일을 할 수 있다. 홀로 지내는 아이에게, 또 노인에게 서로는 세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왜인지 이 사회에서는 … [Read more...] about 삶의 기본을 박탈하는 사회 ‘나, 다니엘 블레이크’
삶의 핵심을 사는 가장 단순한 방법, ‘내사랑’
정지우 문화평론가의 영화 읽기 그녀에게는 많은 게 필요하지 않다. 그저 붓 한 자루만 있으면 된다. 그에게도 많은 게 필요하지 않다. 그저 그녀와 함께하는 삶, 그리고 그 삶을 일궈갈 집 한 채만 있으면 된다. 샐리 호킨스와 에단 호크가 주연한 <내 사랑 … [Read more...] about 삶의 핵심을 사는 가장 단순한 방법, ‘내사랑’
사랑의 모양, 인간의 모양 ‘셰이프 오브 워터’
※ 본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정지우 문화평론가의 영화 읽기 “삶은 실패한 계획의 잔해에 불과하다.” 부서진 존재들의 삶이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완성’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존재들. 그리하여 어딘가가 결핍되었거나 모자란 존재들이라 여겨지는 이들의 삶이다. ‘정상적인 기준’에서라면 인간은 당연히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이성’인 ‘인간’을 사랑해야 하며, 안정적인 직장에서 충분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영화 <셰이프 오브 … [Read more...] about 사랑의 모양, 인간의 모양 ‘셰이프 오브 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