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열풍이 시작된 건 대략 십여 년 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화두가 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그 이후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일종의 요술상자이자 수수께끼처럼 사회에 퍼지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인문학이라는 '그 무엇'의 힘에 닿아보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관련 책들, 강연들이 쏟아졌고, 크고 작은 성행을 이룬 경우도 적지 않았다. 더불어 '인문학 셀럽'이라 부를 만한 이들도 상당수 탄생시키며 적지 않은 시장을 형성했다. 그런 열풍에 힘입어, 소위 ‘인문학 씬’에 … [Read more...] about 인문학은 무용했는가
타인들의 세상, 청년들의 세계: ‘버닝’
※ 이 글은 영화 〈버닝〉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내용 누설을 원하지 않으면 이 글을 닫아 주세요. 정지우 문화평론가의 영화 읽기 북향의 단칸방에는 하루 한 번 햇빛이 든다. 그러나 그 빛은 진짜 햇빛이 아니다. 남산타워 전망대의 유리에 반사된 빛이 방안으로 슬며시 들어 벽을 비춘 것이다. 청년은 그 찰나와 같은 순간에, 세상을 꿈꾼다. 어딘가에서 건너온 빛, 그 빛이 반사된 길을 따라나선다면, 어쩌면 저 진짜의 빛이 있는, 진짜의 세상과 만날 것이다. 그를 둘러싼 삶이라야 … [Read more...] about 타인들의 세상, 청년들의 세계: ‘버닝’
삶의 결핍과 존재의 성숙에 관하여: ‘우리도 사랑일까’
정지우 문화평론가의 영화 읽기 인생에는 빈틈이 있기 마련이야. 그걸 미친놈처럼 일일이 다 메꿔가면서 살 순 없어. 〈우리도 사랑일까(take this waltz)〉(2011)는 결혼 5년 차 부부의 이야기다. 프리랜서 작가인 마고와 남편 루는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낸다. 그들의 결혼생활에는 다정함과 유머, 장난스러움과 사랑스러움이 풍부하게 자리 잡았다. 그러나 마고는 이처럼 안정적으로 이어지는 결혼생활에서 권태를 느낀다. 행복하긴 하지만 강렬하지 않고 … [Read more...] about 삶의 결핍과 존재의 성숙에 관하여: ‘우리도 사랑일까’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일에 관하여, ‘지니어스’
[정지우 문화평론가의 영화 읽기] “그는 삶의 방식을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이야.”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등 당대 최고이자, 여전히 거장으로 기억되고 있는 작가들의 유령이 있다. 그 유령은 그들의 곁에서, 드러나지 않게 그들을 길들이고, 조력하며, 세상의 빛을 보게 만들었다. 영화 <지니어스>는 그 유령, 스크라이브너스 출판사의 편집자 ‘퍼킨스’가 또 다른 거장이 된 작가 ‘토마스 울프’를 만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어할 수 없는 정열에 휘둘리며 글을 쓰고, … [Read more...] about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일에 관하여, ‘지니어스’
삶의 기본을 박탈하는 사회 ‘나, 다니엘 블레이크’
정지우 문화평론가의 영화 읽기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다. 사회 안에는 더 쓸모 있게 여겨지는 존재들이 있다. 더 머리가 좋고, 더 건강하고, 더 체제에 잘 복종하여 사회가 선호하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만이 쓸모 있는 존재는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쓸모의 자리가 있다.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노인도 혼자 남겨진 아이에게 동화책 읽어주며 보살피는 일을 할 수 있다. 홀로 지내는 아이에게, 또 노인에게 서로는 세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왜인지 이 사회에서는 … [Read more...] about 삶의 기본을 박탈하는 사회 ‘나, 다니엘 블레이크’
삶의 핵심을 사는 가장 단순한 방법, ‘내사랑’
정지우 문화평론가의 영화 읽기 그녀에게는 많은 게 필요하지 않다. 그저 붓 한 자루만 있으면 된다. 그에게도 많은 게 필요하지 않다. 그저 그녀와 함께하는 삶, 그리고 그 삶을 일궈갈 집 한 채만 있으면 된다. 샐리 호킨스와 에단 호크가 주연한 <내 사랑 … [Read more...] about 삶의 핵심을 사는 가장 단순한 방법, ‘내사랑’
사랑의 모양, 인간의 모양 ‘셰이프 오브 워터’
※ 본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정지우 문화평론가의 영화 읽기 “삶은 실패한 계획의 잔해에 불과하다.” 부서진 존재들의 삶이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완성’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존재들. 그리하여 어딘가가 결핍되었거나 모자란 존재들이라 여겨지는 이들의 삶이다. ‘정상적인 기준’에서라면 인간은 당연히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이성’인 ‘인간’을 사랑해야 하며, 안정적인 직장에서 충분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영화 <셰이프 오브 … [Read more...] about 사랑의 모양, 인간의 모양 ‘셰이프 오브 워터’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일에 대하여
1. 글을 아주 잘 써서 먹고 살겠다는 생각은 잘못된 발상에 가깝다. 글 실력이 뛰어나서, 글을 '아주 잘' 쓴다는 이유로 먹고사는 경우는 잘 없다. 오히려 조금 더 정확한 발상을 한다면, 유명세를 얻어(인지도를 높여) 글을 쓰고 먹고 살겠다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다. 글을 통해 먹고 사는 경우의 절대다수는 '유명한 인물'이 '글을 쓰기' 때문이지, 글 실력을 아주 열심히 연마하여 글을 아주 잘 쓰기 때문은 아니다. 유명한 글쟁이 중에 소수의 글 잘 쓰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 … [Read more...] about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일에 대하여
멋지게 저항하는 ‘지상생활자의 수기’: 최서윤의 『불만의 품격』
청년 세대에 대한 절망과 포기, 자조에 대한 이야기들이 퍼져나갈 때, 청년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혹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들어보고 싶다면 『불만의 품격』(최서윤 저, 웨일북)을 읽어보면 된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최전선에 있는 한 명의 여성이자 청년이 어떻게 온몸으로 이 사회에 살면서 질문을 던지고, 저항하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는 저항한다. 그런데 무엇에? 그것은 오랫동안 기성세대가 ‘적’으로 여겨왔던 자본주의 자체도, 독재 정권도, 기타 이데올로기나 사회체제도 … [Read more...] about 멋지게 저항하는 ‘지상생활자의 수기’: 최서윤의 『불만의 품격』
아재들의 전성시대, 청년들의 절망시대
최근 화제가 되었던 영포티(Young Forty) 논란은 소비의 주도권을 쥐게 된 X세대와 관련이 깊다. 이미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보였던 X세대의 문화적 소비권력은 점점 미디어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다. '중년 남자와 20대 여성'의 로맨스에 가장 큰 불만을 표출하는 건 '20대 여성'이었다. 이 20대 여성은 여전히 10년도 더 전에 규정되었던 ‘88만원 세대’ 혹은 ‘N포 세대’의 꼬리표를 이어받고 있는 세대다. 현재의 30대를 포함하여 20대에 이르기까지, 이 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가진 … [Read more...] about 아재들의 전성시대, 청년들의 절망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