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산 문제는 비혼 혹은 딩크에 대한 가치관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결혼한 커플의 출산율을 보면 평균 자녀 수가 2명에 이를 정도이니, 무엇보다도 이 문제는 비혼에 대한 가치관과 가장 큰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비혼에 대한 관점은 완전히 양분되어 있는데, 하나는 젊은이들이 열악한 사회환경의 문제로 비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시선과, 다른 하나는 시대의 변화로 비혼 자체를 하나의 가치관으로 더 선호한다는 관점이다.
언론이든 학자든 ‘대책 마련’ 혹은 ‘대안 제시’에 관여하는 이들은 대부분 전자의 관점에 서 있다. 환경이 좋아지면 결혼을 한다. 그리고 출산을 한다. 이때의 환경이란, 절대적인 물리적 조건으로, 정부의 다각도의 물질적 지원이 필요하다. 흔히 저출산 관련 대책이라는 것은 이러한 논리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결혼할 여건이 어느 정도 되고, 아이를 낳아도 ‘키울 수 있는’ 다수의 젊은이들이 굳이 결혼이나 출산에 적극적이지 않다. 그 이유는, 굳이 결혼과 출산의 방식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삶을 의미화하고, 라이프스타일을 합리화하며, 실제로 그리 절망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살아낼 방법이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디어 역시 <효리네 민박>이라든지, <나혼자 산다>라든지, 그 외 여행 프로그램 등을 통해 비혼이나 딩크, 싱글의 삶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갖 화려한 방식으로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기존의 결혼을 추구하던 핵심적 감정이 분리감, 소외감, 박탈감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 더 이상 ‘결혼을 하지 않는 일’이 그러한 감정을 과거처럼 강력하게 촉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혼하지 않는 이들끼리의 소속, 그들끼리의 취향, 그들끼리의 라이프스타일은 갈수록 확고해지고 있으며, 소외될 가능성도 거의 없어지고 있다.
이는 전반적으로 젊은이들의 가치관이 ‘결혼하고 출산하고 싶다’의 지향 자체를 벗어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 세대, 혹은 우리 세대를 전후한 세대들이 바라는 것은 총체적 의미에서 ‘잘 살며(well-being)’ 각자의 개별적인 행복을 누리는 것이지, 어떤 집단적 가치관에 따라 공통된 지향에 투신하는 게 아니다. 국가, 가정, 결혼, 출산, 출세, 무엇이 되었든 과거 기성세대의 핵심적 가치관이라 할 만한 것들이 그 자체로 지향해야만 하는 절대성은 완전히 상실했다고 볼만하다. 오히려 그것들은 다른 가치들과 동등하게, 때론 더 열등하게 취급되며 비교하고 선택하는 대상이지, 결코 ‘인생’의 ‘근본적인’ 추구는 아닌 것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결혼 정책, 저출산 정책 같은 것은 효용을 발휘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기존의 정책들은 이미 ‘과거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다소 보수적인 시민들에게만 어느 정도 의미 있는 것인데, 그런 시민들이 전체 젊은 인구의 몇이나 차지할지는 의문이다. 대략적인 판단으로는(인생의 가치관 설문과 통계 등에 따라 짐작한 정도로는) 30% 이하라 생각되며, 따라서 기존의 지원책들은 겨우 그 정도에만 미미한 영향을 미치는 데 그치는 것이다.
젊은이가 ‘소확행’을 외치는 이유
비혼 문제에서 또 다른 핵심은 소위 이상의 상향 평준화, 혹은 가치관이나 욕망의 상향 평준화와 관련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백마 탄 왕자를 만나고 싶다든지, 부잣집 처가를 등에 업고 셔터맨이 되고 싶다든지 하는 물질적 욕망 이상으로, 자기 삶의 전반적인 질 자체가 끌어올려 지기를 지향하는 차원이 과거와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과거 사람들은 주변에서 보던 삶을 반복했다. 미디어 속 삶이라 해도 그렇게까지 화려하지 않았고, 이상은 말 그대로 먼 이상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모든 것들에 직접적으로 닿을 수 있는 소비 체계와 가치관이 마련되었고, 실제로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그러한 ‘이상들’을 누리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욜로(YOLO) 현상이다. 이를테면, 굳이 부자가 아니더라도 특급 호텔에서 하룻밤을 즐기거나 해외여행을 떠나고 명품 아이템 한 개 정도를 구입하는 성향이 생겨난 것이다.
이에 더해 삶의 질이라는 것이 단순히 집단적인 욕망 아래 뒤섞이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는 인식이 퍼졌다. 이를테면, 서울 중산층 청년의 꿈은 제주도에 가서 카페나 게스트하우스를 차리는 게 아닐까? 단순히 출세하여 강남의 좋은 아파트에 살며 아이 둘 낳는 가정을 꾸리는 것보다는, 더 구체적인 행복이 항존하는 어떤 상태, 이를테면 미디어에서 골라 보여주는 어떤 파티와 같은 삶, 혹은 사람에 따라서는 벽난로를 연상케 하는 평화가 있는 이미지의 삶을 지향하지 않을까?
이는 욕망의 문제가 모종의 ‘상향평준화된 이미지’를 확고히 품게 되었으며, 그러한 이미지가 온갖 미디어를 통해 반복적으로 주입되며, 우리 역시 그에 ‘도달 가능하다’고 속삭이는 사회적 분위기와 연동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때의 결혼이란 무엇일까? 결혼의 상대방은 많은 경우 미래를 예측 가능하게 한다. 그의 사회적 지위, 계층, 성향 같은 것들이 지시하는 미래라는 것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미래가 흔히 우리가 품고 있는 ‘상향 이미지’에 도달 가능하리라 믿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사람을 운 좋게 만나면 결혼을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욕망은 지연된다. 도달 가능하다 믿어질 때까지, 현 상태의 소확행(소소하고 확실한 행복) 등을 누리며 기다리는 것이다.
가정을 이룬 삶이 지금 나의 삶보다 나을 것 같지 않으므로
마지막으로, 이러한 가치관과 욕망의 문제에 더해, 현실적인 상황이 문제시된다. 그런데 이 현실적인 상황이라는 것 역시, 단순히 아파트를 살 수 없고 양육비를 감당하기 어렵고 따위의 물질적인 문제에서만 바라볼 게 아니다. 청년 세대가 처한 물질적 조건, 현실적 조건의 문제는 보다 다양한 경험적 가치관과 얽혀 있다.
이를테면, 우리의 부모 세대는 거의 행복하지 않았다. 부모 세대의 부부들에게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가정을 행복하게 유지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쌍방 모두 그렇게 대답할 가능성은 무척 낮을 것이다. 우리가 본 가정의 경험이라는 것은 주로 ‘버티는’ 것이었는데, 그러한 ‘버텨냄’이 청년의 현재 삶을 ‘버텨냄’보다 나을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삶이 본질적으로 버텨냄이라고 할 때, 핵심은 그러한 버텨냄에 얼마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인지, 또한 그로부터 어떠한 성취감이나 보람 따위를 얻어낼 것인지가 된다. 현재의 청년들에게 취직을 하고 삶을 버텨낸다고 했을 때, 그 보람이랄 것은 꽤나 구체적인 것이다. 세상에는 소비할 것이 거의 무한정 널려 있고, 그러한 소비로부터 얻는 구체적이고 확실하며 소소한 만족감이라는 것이 삶의 버팀에 대한 정확한 보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저 가정을 이루는 삶을 버텨냈을 때 얻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그저 부모의 신세 한탄밖에 아는 것이 없다면), 아파트값이든 양육비든 사교육비든 그 모든 것을 감당하며 삶 속에서 직조해낼 마음 자체가 생기질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현실적인 조건의 문제는 그것들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렬한 마음이 동반된다면, 정부의 여러 지원 정책들과 함께 어느 정도는 인간으로서 감당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핵심은 그러한 ‘마음’이 생기기까지가 더 먼 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무얼 하면 얼마를 준다, 이런 식의 대안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무얼 하기로’ 마음먹은 존재에게만 의미가 있는 방식이다. 결혼이든 출산이든 말이다. 그렇다면, 대책이라는 것은 그러한 ‘마음’을 어떻게 먹게 할 것인가에 가장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청년 세대의 마음과 싸워 설득하여 이겨야 하는 것이다.
결국 저출산의 문제란, 근본적으로 청년 세대를 아우르는 근본적인 가치관, 혹은 마음의 문제로부터 출발하여 그리로 귀결된다. 물질적인 조건의 문제는 그에 비하면 차라리 부수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안은 청년들의 실제 마음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그래서 그러한 지향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지에 따라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단순히 얼마를 더 준다고 하여, 결혼이나 출산을 딱히 지향하지 않는 사람이 결혼하거나 출산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
출처: 정지우 문화평론가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