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 문화평론가의 영화 읽기]
“그는 삶의 방식을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이야.”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등 당대 최고이자, 여전히 거장으로 기억되고 있는 작가들의 유령이 있다. 그 유령은 그들의 곁에서, 드러나지 않게 그들을 길들이고, 조력하며, 세상의 빛을 보게 만들었다.
영화 <지니어스>는 그 유령, 스크라이브너스 출판사의 편집자 ‘퍼킨스’가 또 다른 거장이 된 작가 ‘토마스 울프’를 만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어할 수 없는 정열에 휘둘리며 글을 쓰고, 파괴적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토마스 울프에게 퍼킨스는 그 자체로 이성과 절제의 역할이 되어준다.
재즈 같은 정열과 무규칙적인 삶의 방식, 나아가 광기를 상징하는 울프와 균형 잡히고 절제된 삶을 상징하는 퍼킨스의 대조는 흥미롭다. 이들은 서로 대비되면서 동시에 각자의 결핍을 채워주는 존재로 나타난다.
울프는 일찍 아버지를 잃었고, 작중에서 ‘영혼의 아버지’를 찾아 떠날 여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퍼킨스는 그토록 아들을 갈망했으나 딸만 여럿을 낳았다. 울프는 아버지 대신 새롭게 삶을 시작하며,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길을 개척하며 걸어 나가는, 그리하여 ‘자신의 삶의 방식을 스스로 결정하는’ 아들이다.
반면, 퍼킨스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등을 떠밀고, 그가 비틀거릴 때 다시 균형을 잡아주고, 그의 길을 인도하는 아버지다. 이렇게 반쪽짜리의 두 존재가 만나, 새로운 삶을 이룬다. 그 삶으로, 위대한 작품을 낳는다.
퍼킨스는 울프가 정신없이 써 내려간 작품에 과감하게 칼질을 한다. 수많은 문장을 쳐내면서, 그의 작품이 정갈해지도록 돕는다. 이 과정은 흡사 작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도제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하나의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는 ‘새 삶’에 속하면서, 그들이 속해있던 ‘옛 삶’은 조금씩 무너져 간다. 퍼긴스는 가정에 소홀하게 되고, 울프는 연인을 내팽개친다. 새 삶이 지시하는 새로운 완성을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삶은 완성을 지향한다. 결핍을 채워줄 누군가를 찾게 하고, 둘의 결점을 보완한 아이를 낳게 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자기 삶의 ‘핵심’이 언제나 ‘부부’가 되어 ‘아이’를 낳아 ‘가정’을 이루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울프와 퍼킨스는 그들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소설 작품을 통해, 삶의 완성으로 다가간다. 그 일에 강렬하게 몰입하며, 기존의 삶의 과정에서 벗어난다. 울프는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퍼킨스의 회사와 집에서 살다시피 한다. 퍼킨스 역시 가족과의 휴가를 포기하며 일에 몰입한다.
퍼킨스는 휴가를 함께 떠나지 못하는 이유로 “일생에 한 번 만난 천재 작가와의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라 말한다. 아내는 그에 대해 ‘현재’ 역시 일생에 한 번이며, 그의 ‘딸들’ 역시 이번 일생에서밖에 만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퍼킨스가 ‘일’에 사로잡히는 과정에는 그 일에 대한 ‘의미부여’가 동반된다.
자신이 필생의 작가를 만났고, 그를 통해 역작을 남기고, 천재를 발굴한다는 데서 오는 강렬한 성취감에 휘어 잡히는 것이다. 그러나 울프의 연인이었던 엘린은 그러한 일이 주는 공허감 역시 알고 있었다. 사랑으로 조력했던 울프가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나서, 그녀는 이루 말할 데 없는 허무를 느꼈음을 고백한다.
‘완성을 향한 정열’은 어쩌면 우리 인간 유전자의 가장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본능일지도 모른다. 삶의 모든 세부를 내던지고 몰입하려는 성향은 쉽게 극단적이 된다. 예술 작품을 향해, 불륜의 상대를 향해, 전체주의적인 이념을 향해 손쉽게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기존에 우리 삶을 지탱하고 있던 다양한 세부들이 휩쓸려 떨어진다.
우리의 하루하루를 지탱하던 무수한 것들, 집 안에 놓인 꽃 한 송이, 사랑하는 딸을 위해 고른 원피스 색깔, 오늘 하루를 위해 마시던 커피 한 잔과 연인의 눈썹 모양 같은 것들이 ‘강렬한 하나의 완성’ 앞에서 무색하게도 허물어져 버리는 것이다.
퍼킨스는 울프에게 빠진 생활에서 조금 물러나, 그러한 삶의 세부들을 지키는 균형 잡힌 삶으로 돌아가려 한다. 다시 절제하고, 유지하며, 지켜내는 삶을 챙기려 한다. 울프는 그런 퍼킨스를 향해 ‘두려움에 사로잡혀 용기도 없이’ 산다고 비난한다. 자기 안의 재능과 욕망을 분출하며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억누른 채 견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퍼킨스는 그에 대해 단지 “삶의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대답한다.
울프는 자기 삶의 방식을 스스로 결정하며 사는 사람이다. 물론, 퍼킨스라고 해서 자기 삶의 방식을 스스로 결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울프의 말대로, 퍼킨스는 두려움 때문에 보다 ‘일반적인’ 삶의 방식, 즉 직장에 안정적으로 출퇴근하며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삶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자유롭게 살아가는 울프를 만나, 그토록 흔들리며 몰입했을 것이다.
그러나 울프의 삶이라고 완전한 건 아니었다. 그의 작품도 균형과 절제의 힘을 입어서야 대중을 만날 수 있었고, 그의 삶 역시 그래야 했을 것이다. 파탄 난 인간관계와 홀로 남은 삶, 결국 요절하고야 마는 그의 삶이 그 자체로 완성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언제나 ‘하나’로는 부족한지도 모른다. 하나를 택하면 다른 한쪽이 유달리 커 보이거나, 택하지 않은 측면이 아프고 그립다. 그러나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삶은 역시 하나뿐이다. 그 하나가 주는 것과 앗아가는 것에 대해 영화는 담담히 속삭인다.
“삶의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은 다르게 ‘흘러’ 다른 곳과 ‘때’에 이른다. 그러나 그 어느 곳도 ‘완벽한 낙원’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