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 〈버닝〉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내용 누설을 원하지 않으면 이 글을 닫아 주세요.
정지우 문화평론가의 영화 읽기
북향의 단칸방에는 하루 한 번 햇빛이 든다. 그러나 그 빛은 진짜 햇빛이 아니다. 남산타워 전망대의 유리에 반사된 빛이 방안으로 슬며시 들어 벽을 비춘 것이다. 청년은 그 찰나와 같은 순간에, 세상을 꿈꾼다. 어딘가에서 건너온 빛, 그 빛이 반사된 길을 따라나선다면, 어쩌면 저 진짜의 빛이 있는, 진짜의 세상과 만날 것이다.
그를 둘러싼 삶이라야 모두 헛것과 같다. 타인들의 세상에서 청년이 온전히 몸을 기대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곳이란 없다. 청년은 그저 이미 자본과 권력의 직물을 모두 짜놓은 기성세대들이 쓰고 버리는 도구나 노리개 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은 사회의 유령과 같은 청년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호객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년 ‘해미’는 자신의 방에 하루 한 번 비쳐드는 빛을 바라보며 아프리카를 꿈꾼다. 그녀는 자신의 소꿉친구인 ‘종수’에게 아프리카에 사는 부시맨(부시먼족)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 부족에는 두 종류의 굶주린 자에 대해 이야기가 전한다. 하나는 리틀 헝거로, 그저 물질적으로 굶주리는 이들이다. 다른 하나는 그레이트 헝거로, 삶의 의미에 굶주린 자들이다. 해미는 그레이트 헝거 이야기에 매료되어, 아프리카로 떠난다.
청년은 ‘이곳 너머’를 꿈꾼다. 청년에게 이곳은 언제나 이방일 따름이다. 더군다나 영화 속 이곳, 서울에서 청년이 환영받을 곳이란 없다. 이미 쓰고 버릴 수 있는 청년들은 넘쳐난다. 그들을 위해 내어줄 공간도 없다. 부의 지형도가 완성된 공간에서, 청년들이 지낼 수 있는 곳이란 굽어진 골목 어귀의 단칸방 정도에 불과하다. 그들은 세계를 만나리라는 기대로, 자신들을 펼칠 수 있을 곳이라는 꿈으로 서울에 왔지만 어디에도 그들이 바라던 ‘세계’의 흔적은 없다.
아프리카에 다녀온 해미는 자신이 보았던 눈물겨운 장면을 이야기한다. 부시맨이 춤을 추며 리틀 헝거에서 그레이트 헝거가 되어 삶의 의미를 간절히 구하는 모습, 지평선 너머로 노을이 지는 장면에서 왈칵 눈물이 나서 이대로 자신도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었다고 한다. 그녀에게 그 순간은 완벽한 삶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현실의 조롱, 배척, 무관심과 소외로부터 벗어나, 더 이상 분열을 견딜 필요도 없이, 온전히 세계와 일치할 수 있었던 찰나.
하지만 노을이 지고, 그 순간은 어김없이 끝이 난다. 삶의 의미는 절정의 순간에 당도하지만, 머지않아 사라지고 남는 것은 돌아와야 할 현실일 뿐이다. 그렇게 그녀는 아프리카에서 만난 그 완벽한 순간의 찌꺼기, 혹은 흔적, 아니면 그림자와 같은 ‘어떤 존재’와 함께 돌아온다. 그 존재는 청년들이 갈망하는 어떤 세계에 이미 당도해버린 듯한 인물이다.
포르쉐를 몰면서, 강남의 세련된 빌라에 살고, 파스타를 삶아 먹는 거짓말 같은 존재. 노동의 힘겨움이나 현실의 고단함, 온갖 자질구레한 사고들에도 결코 휘말릴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자본의 비호 아래에서 완벽하게 자기 ‘페이스’를 조절하며 살아가는 가상의 인물 같은 존재. 해미는 그가 만들어낸 그 가상의 세계를 택한다. 비루한 진짜 현실도, 찰나의 진짜 세계도 아닌 그 어디쯤 존재하는 홀로그램과 같은 자본의 화려한 세계에 빠져든다.
영화는 해미의 시선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지만, 그녀라고 몰랐을 리 없다. 그녀는 자신이 정말로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종수 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종수는 기댈 곳 하나 없는 도시에서 그녀가 발견한 유일한 고향의 기억이자 어린 시절의 자신이었다. 그녀에게 도달 가능한 세계가 있다면, 그러한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종수를 통해야 한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종수의 고향집에 들렀을 때, 마치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것 같다며 감격한다. 그리고 종수와 그 ‘어떤 존재’인 벤과 셋이 함께 종수의 집 앞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오늘이 제일 좋은 날인 것 같다”고 말한다. 벤과 보냈을 화려한 생활도, 홀로 보냈던 서울에서의 나날도, 세계의 끝 아프리카에 당도했던 순간도, 마치 모든 게 ‘되돌아온 것 같은’ 그날에 미치지 못했다. 그날을 끝으로, 그녀는 사라진다.
종수와 만난 첫날, 한 술집에서 그녀는 귤을 까먹는 연기(판토마임)를 하며 말한다. 판토마임을 잘 하려면 없는 귤을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된다고. 그것은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했을 것이다. 홀로 어떤 세계를 꿈꾸며 당도한 서울에서 점점 삶의 의미조차 구하기 어려워지는 순간들을 겪으며 자신이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잊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방에 드는 한 줌의 빛과 그 너머의 세계를 보았다. 그리고 빛이 사라지는 순간, 다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자신조차 함께 사라지길 갈망했다.
스스로 사라지기를 갈망하는 해미와 달리, 벤은 무언가를 불살라 없애는 데서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는 두 달에 한 번,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불태우면서 ‘생생히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는 누군가를 살해하는 일에 대한 비유(메타포)로, 그가 해미를 살해한 인물로 암시된다. 그러나 이 영화 전체가 한편 종수가 영화의 말미에 써낸 ‘소설’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서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해미가 원하는 대로 그녀를 ‘사라지게’ 해준 인물이라 볼 수 있다.
그녀에게 사라짐이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죽음이 무섭다고 했다. 그보다는 그저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어쩌면 자신에게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종국에 완전히 잊어버렸을지 모른다.
그러고 나면 남는 것은 오직 ‘있음’ 뿐이다. 자신의 세계 전체는 있음으로 흘러넘치고, 없는 것은 남지 않게 된다. 그녀는 없음의 끝에서 그러한 세계에 당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언젠가 돌아와야 하는 여행 같은 것이 아니라 무한한 있음이 흘러넘치는, 기나긴 삶의 여정을 떠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남겨진 건 여전히 현실의 진실에 목말라하는 소설을 쓰는 청년이다. 이 모든 것을 증언하는 글 쓰는 자만이 홀로 현실에 남겨진 채로 영화는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