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의사는 과학자이다. 과학자는 정해진 사실과 자료를 근거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다. 학문적인 통계와 수없이 쌓인 증례들을 통해서 가장 합당하고 맞는 판결을 내린다. 그리고, 그 판결을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한다. 그 수많은 숫자만큼이나 다양하고, 서로 아무도 같을 수 없는 인간에게 그대로. 왜냐하면, 의사는 과학자니까. 1. 불행의 시작은 평범했다. 그것은 언제나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온다. 나는 밤 당직 중 교통사고 환자를 하나 받았다. 그 환자는 다른 … [Read more...] about 3일 동안 죽은 채 살아있었던 환자
한산했던 응급실의 어느 주말 이야기
1. 병원A의 응급실은 한산합니다. 특별한 일 없이 늘 그렇습니다. 복잡한 환자나 중환자는 근처 대학병원으로 가버리고, 병원A의 응급실을 찾는 사람들은 그들의 판단으로 중소병원인 A에서 치료 받으면 될 정도라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환자 본인의 판단은 대부분 정확합니다. 그래서 유흥가 근처에 위치한 병원A의 응급실은 찰과상이나 감기, 두드러기가 반절 정도, 나머지는 밤새 볶고 지진 음식에 술을 먹다 배탈난 사람들이 환자군의 거의 전부입니다. 찰과상은 소독하거나 간단히 봉합하면 집에 … [Read more...] about 한산했던 응급실의 어느 주말 이야기
첫 병원 실습의 기억: 마음을 진료하는 시간
의대생의 커리큘럼 마지막에는 모든 과를 순환하는 병원 실습이 있다. 공부했던 내용을 병원에서 실제로 체험해보기 위함이다. 내가 처음으로 실습을 나간 과는 소아청소년과였다. 그 첫 병원 체험에서 나는, 지금도 인상에 강렬하게 남아 도저히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실습 의대생은 가운을 입고 있지만 크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실은 전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주요 업무는 그 과의 의료진이 하는 일을 마냥 옆에서 지켜보고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도 우리는 소아청소년과 교수님의 … [Read more...] about 첫 병원 실습의 기억: 마음을 진료하는 시간
응급의학과 의사가 읽은 한 신경외과 의사의 죽음: 숨결이 바람 될 때
의사가 맨 처음으로 대학병원에 입사하면 인턴이 된다. 인턴은 4주씩 13개의 과를 1년간 추첨으로 순환근무한다. 그 과의 핵심 업무를 맡기는 어렵지만, 옆에서 지켜보고 같이 일하면서 일종의 대리 체험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과의 업무를 곁에서 볼 수 있는 인턴 과정을 마치면 자신이 가고 싶은 과를 지원할 수 있다. 그리고 합격하면 수련 과정을 통해 그 과의 전문의가 된다. 나도 이 과정을 거쳐 현재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되었다. 나의 첫 순간 우리의 처음은 언제나 … [Read more...] about 응급의학과 의사가 읽은 한 신경외과 의사의 죽음: 숨결이 바람 될 때
추석의 119 상황실 단면
0. 왁자지껄한 119 상황실에 앉아 근무하고 있으면, '거기 119죠?' 라고 시작하는 통화 내역들이 귓가에 몇 개씩 항상 들려온다. 그것들은 대부분 평탄하지만, 어떤 것은 제법 재미있거나 때로는 분노를 유발하게 하는데, 개중 몇 가지만 이번 명절을 기회 삼아 소개해 볼까나. 1. "거기 119죠?" "네. 신고자분 말씀하세요." "우리 집에 지금 벌이 한 마리 들어왔어요. 빨리 벌 잡으러 오세요. 큰 놈이란 말이에요." "벌 한마리요?" "네. … [Read more...] about 추석의 119 상황실 단면
‘김영란법’, 그동안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기에
오늘 언론에 '김영란법'이 합헌 선언되고, 관련 내용과 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이 대서특필 되고 있다. 그런데 전문의를 취득한 지 얼마 안 되는 순진한 의사로 살아온 나에게 이 소동은 조금 의아하다. 일단 나는 의사로만 살아왔으니 사회생활이건, 직장생활이건 의사 집단밖에는 모른다. 그리고 의사가 직무와 관련해 남에게 이해관계를 미칠 수 있는 행위는, 환자에게 줄 약을 고를 수 있는 처방권이나 수술 기구 등을 선택하는 것 정도이다. 이 선택에서 의사가 접대를 받고 관련된 집단에게 이득을 주는 … [Read more...] about ‘김영란법’, 그동안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기에
다시 불거진 의대생 산부인과 실습 논란을 보며
아주 특별한 상황이지만, 응급실에서도 분만하는 경우가 있다. 모든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수를 상정하는 응급실의 특성상, 분만도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래서 나도 응급의학과 의사로서 몇 번의 분만에 직접 관여해야 했다. 준비된 분만실이 아닌 응급실에서 분만해야 하는 상황이니 그것들이 얼마나 급박했겠는가. 택시에서 양수가 터져 전 의료진이 응급실 앞에 주차된 택시로 달려가 아이를 받아 탯줄을 잘라 가져온 경우도 있었고, 아이가 머리만 빼꼼히 나온 채로 소생실에 들어온 경우도 있었고, 변기에 … [Read more...] about 다시 불거진 의대생 산부인과 실습 논란을 보며
예술가들은 공간을 일군 대가로 그 공간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공간을 꾸미자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상수동 이리까페가 끝내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유는 지긋지긋한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입니다. 현재까지의 팩트를 나열해보겠습니다. 2004년 서교동에서 처음 문을 연 이리까페는 이미 한 차례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에 쫓겨나, 2009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습니다. 당시 상수동 와우산로 3길은 시끄러운 홍대 골목에서 벗어난 조용한 주택가에 불과했습니다. 주변 상권이라는 것 자체가 미미했고, 복잡한 홍대 앞 분위기에 질린 예술가들은 이 한적한 뒷골목까지 기꺼이 … [Read more...] about 예술가들은 공간을 일군 대가로 그 공간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그는 고요히 피웅덩이를 깔고 누워 있었다
※ 이 글은 응급의학과 전문의인 글쓴이의 경험을 바탕으로 허구를 섞은 팩션(faction)입니다. 0. 나는 학생 시절 중국에 간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제법 긴 여행을 했고, 또 한 번은 어학연수를 했다. 막연히 중국인들과 섞여서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며 지냈다. 항상 겨울이었고, 대륙은 언제나 쌀쌀하고 외로웠다. 의사소통이 그리 원활하지는 않았으므로, 그들이 아무리 가까이 내게 다가와도 우리에겐 어떤 벽 같은 것이 존재했다. 일정 수준의 이야기를 넘어서면 그들과 나는 서로 … [Read more...] about 그는 고요히 피웅덩이를 깔고 누워 있었다
진통제 반 앰플
모든 우리 나라에는 제대로 된 의료 제도가 없고, 모든 남의 나라에는 올바른 의료 제도가 있다. 태평양을 사이에 둔 미국 교포들이 죽을 병에 걸렸다고 우리 나라로 날아와 몇 달치 보험료만 내고 저렴하게 각종 검사와 치료를 받은 다음 유유히 미국에 돌아가 살고, 우리 나라 사람들은 죽을 병에 걸렸다고 돈을 싸들고 믿을 수 있는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 기이한 일이다. 배가 아팠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데다 미국은 멀고 비행기 값은 비싸서 어쩔 수 없이 집 근처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는 … [Read more...] about 진통제 반 앰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