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생의 커리큘럼 마지막에는 모든 과를 순환하는 병원 실습이 있다. 공부했던 내용을 병원에서 실제로 체험해보기 위함이다. 내가 처음으로 실습을 나간 과는 소아청소년과였다. 그 첫 병원 체험에서 나는, 지금도 인상에 강렬하게 남아 도저히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실습 의대생은 가운을 입고 있지만 크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실은 전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주요 업무는 그 과의 의료진이 하는 일을 마냥 옆에서 지켜보고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도 우리는 소아청소년과 교수님의 회진을 따라 돌고 있었다. 평소처럼 교수님은 소아청소년과 병동에 있는 자신의 환아들을 전부 순서대로 진료하곤 밑층에 있는 환아 한 명을 보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당연히 우리는 조심조심 따라서 탔다.
엘리베이터에는 사람들이 어중간하게 서 있었고 마침 아이를 동반한 한 아주머니도 있었다. 아주머니는 교수님과 안면이 있던 사이인 듯 교수님을 보고 아주 반갑게 인사했다. 친절한 교수님은 흔쾌히 웃는 얼굴로 인사를 받아 주었다. 느낌상 교수님이 늘 보던 아이와 보호자는 아니었고 몇 번쯤 진료하느라 마주쳤던 아이로 보였다. 의례적인 인사가 짧게 지나고, 병원인지라 아주머니는 금방 아이에게 화제를 옮겼다.
“선생님, 저희 아이가 요새 골골대서, 괜찮나 좀 봐주세요.”
막 내려가고 있는 엘리베이터였다. 잠시 후면 문이 열리고 우리는 내려야 했다. 배운 대로 진료하기에는 환경이나 공간도 적절하지 않았고 시간도 아주 짧았다. 의사도 결국 세팅된 진료실에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환자를 맞이해야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었다. 막 실습을 나온 우리는 교수님이 그 짧은 사이에 아이를 과연 어떻게 진료할지 주시하고 있었다.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교수님은 전혀 망설임 없이 시작했다.
“어디 보자.”
교수님은 일단 그 네댓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에게 유난히 큰 손을 뻗었다. 그리고 눈을 껌뻑이던 아이의 이마에 손을 댔다. 특이했던 것은 우리가 흔히 그러듯 손에 이마를 대는 정도가 아니라, 저 정도면 머리 모양이 온전히 느껴지겠다 싶게 오른손으로 아이의 이마를 전부 가리고 왼손으로 뒤통수를 감쌌던 것이다. 아이의 작은 이마와 머리는 교수님의 양손에 눈망울까지 푹 잠겨 제법 귀여웠다. 그 몸을 굽혀 양손을 뻗은 교수님과 가만히 서 있던 조그마한 아이를 지켜보자, 그것은 흡사 열이 아니라 아이의 마음을 재는 장면 같았다. 한동안 교수님은 그 상태로 아이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열은 없는데, 많이 골골대나요?”
실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주머니는 아이를 그사이에 정식으로 진료해달라고 한 것은 아니었고 다만 아이를 챙기고 사랑을 나누어 주었으면 했다. 그리고 그 찰나에 우리가 보았던 광경은 이미 충분히 아이를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모습이었다. 그 혼잡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얼마나 더 훌륭하게 마음이 오갈 수 있었을까. 짧은 진료는 아주 완벽하게 끝났다. 아주머니는 아이가 괜찮을 것 같다고 말하곤 감사함을 표시했다. 교수님은 호쾌하게 아이에게 건강하라는 덕담을 남겼다. 시간은 되려 남았다. 문이 열리자 교수님은 그다음 환자를 위해 성큼거리며 발길을 옮겼다.
그 장면을 기억하고 있던 나는 어느덧 의사가 되었다. 환자에게 손대는 일조차 겁이 나고 무서웠던 학생은 혼자 하루 백여 명의 환자를 직접 책임져야 하는 응급의학과 의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일과는 매번 혼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예기치 못할 일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졌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당장 눈앞에 나타났다. 그래서 열에 달뜨거나 각자의 고통에 시달리다 응급실로 몰려든 사람 중에선 위급한 다른 사람 때문에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 환자들의 호소와 볼멘소리를 듣고 이해시키는 것도 역시 내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일견 체온을 측정하는 것 같던 그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의사가 된 나는, 체온을 재는 것은 기계가 가장 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사의 손은 자체의 온도가 있어 절대적으로 평가하기는 부정확했다. 다만 대략적으로 열기를 판단할 수 있었고, 경험이 쌓이면 심부 체온이 높은 상태와 정상이지만 열감이 있는 상태를 구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이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정량화된 체온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나는 하루에도 수없이 누워있는 환자에게 다가가야 했다. 일단 환자와 가까워지며 서로 눈빛을 교환하면 그 환자가 오래 기다린 탓에 힘겨워하거나 혹은 뒤늦게 나타난 내게 무엇인가 억하심정을 호소하고 싶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 나는 습관처럼 환자에게 다가가자마자 이마에 깊게 푹, 손바닥을 얹는다. 환자의 이마에서는 온기가 느껴지고 방금까지 다급했던 땀내와 열기가 훅 밀어닥친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떻게, 무슨 일로 오셨나요.”
그리고 가만히 그의 마음을 느껴본다. 그 사람에게 같은 사람으로 성큼 다가가는 느낌이다.
“배가 아파서 왔습니다.”
“네, 열감도 조금 있으시네요.”
방금 자신의 체온을 나누어 가진 나와 같은 사람을 미워할 수 있을까. 지금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은 채로 온기를 나누어 받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성을 낼 수 있을까. 나는 대화를 이어가며 그들의 표정이 안온해지는 광경을 본다. 그리고 그들의 호소를 귀담아듣는다. 그들은 이마에 얹혀 있는 손을 통해 마음을 전달받은 느낌으로, 내가 그의 말을 경청하고, 또 고통을 나누어 가질 것임을 직감한다.
그리고 나는, 매번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이 혼란스러운 틈바구니에서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 그들의 마음속에 큰 보폭으로 한 걸음 다가가 마음을 가늠하며 사람을 대하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원문: 남궁인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