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상 최대의 행복이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TV를 보거나 라디오를 듣는 게 전부였던 때가 있었다. 10대부터 20대 중반까지 그랬다. 학교 숙제가 아니라면 굳이 책을 들춰보는 일은 없었고, 라디오와 TV를 붙들고 살았다. 방학 때면 밤늦은 시간까지 TV와 라디오에 빠져 지냈다. 그 안에는 뭐든 다 있었다. 빛나는 스타도 있고, 가슴 설레는 로맨스도 있고, 짠내 나는 현실도 있었다. 작은 브라운관을 통해 지구 반대편 뉴욕 패션쇼의 백스테이지에도, 미슐랭 별 세 개의 레스토랑에도 갈 수 … [Read more...] about 잘하고 싶어서 안 했습니다
문장은 짧게, 여운은 길게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후, 달라진 점은 문장의 길이다. 손톱깎이처럼 딱 자른다. 기계처럼 거침없이 끊는다. 한 문장이 한 줄 반 이상 넘어가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마침표를 소환한다. 퇴고할 때 대부분 하는 일은 문장을 끊어내는 일이다. 마침표를 찍고 또 찍는다. 글을 잘 쓰고 싶었다. 그래서 글쓰기에 관한 여러 책을 읽었다. 또 글 잘 쓴다는 사람들의 책을 뒤졌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건, 단문.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문장을 짧게 쓰는 습관을 들이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정말 잘 … [Read more...] about 문장은 짧게, 여운은 길게
당신의 다이어리는 안녕하십니까?
2021년 새해가 시작된 후 첫 월요일. 지난 연말 내내 커피 17잔을 마시고 맞바꾼 초록색 별다방 다이어리를 펼쳤다. 지난번, 연말이 되면 매해 연례행사처럼 다이어리를 모으기만 했지 정작 사용하지 않았다는 글을 쓰고 난 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군가의 말대로 뭔가를 모으기만 하는 걸 열심히 한다고 착각하며 살았다. 몇 년째 책장 틈에서 먼지만 쌓여가는 다이어리를 더는 방치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2021년 다이어리만큼은 빛 한 번 보지 못하고 쓸쓸히 퇴물이 되는 슬픔을 겪지 않도록 최선을 … [Read more...] about 당신의 다이어리는 안녕하십니까?
지금, 당신 등의 ‘성분표’에는 뭐가 적혀 있나요?
엄마에겐 참기름에 대한 철칙이 하나 있다. 참기름은 무조건 전통시장 기름집에서 갓 짜낸 것만 산다는 것이다. 노란색 혹은 빨간색 플라스틱 모자를 쓴, 소주병에 담긴 그 참기름 말이다. 엄마가 기름집의 참기름만 고집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맛과 향 때문이다. 마트에서 파는 난다 긴다 하는 대기업들의 제품은 따라올 수 없는 진한 맛과 향이 있다는 것이다. 기름집 참기름 맹신자(?)의 딸로 몇십 년을 살았으니 이젠 눈 감고도 공장 출신과 기름집 출신을 구별할 수 있다. 이 차이는 단순히 … [Read more...] about 지금, 당신 등의 ‘성분표’에는 뭐가 적혀 있나요?
안 해본 건 늘 쉬워 보이지
언젠가 가죽공방 원데이 클래스에 간 적 있다. 카드 지갑, 필통, 키링 등 단 몇 시간 안에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짧은 수업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 그중 난 필통 만들기를 택했다. 재단된 가죽에 구멍을 내고, 실로 꿰맨 후 똑딱이 버튼을 박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단순한 작업. 2–3시간 만에 제법 모양을 갖춘 핸드 메이드 필통을 완성해 냈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내 필통이 탄생했다. (자세히 보면 바느질 상태는 삐뚤빼뚤하지만) 생애 최초 가죽 공예 작품(?)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가며 … [Read more...] about 안 해본 건 늘 쉬워 보이지
왜 난 쓰지도 않을 ‘별다방 다이어리’에 집착할까?
굳이 달력의 날짜를 보지 않아도 연말이 왔다는 걸 느끼는 시그널이 몇 가지 있다. 핼러윈 장식이 빠지기 무섭게 크리스마스 장식이 선수 교체를 한 상점의 쇼윈도를 볼 때. 또 올해가 가기 전에 얼굴을 보자며 송년회 약속을 잡는 사람들의 연락을 받았을 때. 크리스마스 시즌을 겨냥한 영화의 예고편을 볼 때. 나는 올해가 또 마무리되어가는구나 느낀다. 동시에 쓸쓸함과 설렘이 교차하는 묘한 상태가 되곤 한다. 사실 연말을 알리는 여러 시그널 중 내 마음의 살갗에 확 와 닿는 신호는 따로 있다. 바로 … [Read more...] about 왜 난 쓰지도 않을 ‘별다방 다이어리’에 집착할까?
산, 모두 거짓말쟁이가 되는 곳
내려갈 산을 왜 굳이 오르는 걸까? 등린이(등산+어린이)시절, 산 앞에 서면 늘 저 질문이 날 가로막았다. 내 의지로 산에 가는 일은 없었다. 일 때문이거나, 단풍철이거나, 산에 갔다가 내려와 산 아래 식당에서 동동주에 파전을 먹자는 꾐에 빠져 어쩌다 산에 가곤 했다. 매번 남의 손에 이끌려 간 산. ‘클리어할 미션’을 받은 게임 속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산을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벅지 근육은 찢어질 듯 아파오고, 얼굴은 땀으로 엉망진창이 된다. 정상에 가 보지 않은 한, … [Read more...] about 산, 모두 거짓말쟁이가 되는 곳
제빵사는 결코 몰랐을 식빵의 결말
산책을 위해 집에서 10분 거리의 개천변으로 항하던 길. 생각 없이 걷던 내 앞에 한 남자가 있었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의 흔한 중년 남성으로, 마른 체구에 가벼운 운동복을 걸치고 약 5m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앞서 걷고 있었다. 그가 눈에 들어온 이유는 손에 쥐어진 식빵 봉지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손에는 핸드폰 혹은 물병이 쥐어져 있다. 그런데 남자의 손에는 한쪽 면이 전부 갈색인 맨 끝부분을 포함해 식빵 2~3장만 덩그러니 들어 있는 봉지가 있었다. 아니, 무슨 식빵 봉지를 … [Read more...] about 제빵사는 결코 몰랐을 식빵의 결말
‘미래의 나’를 여행지에서 만난 이야기
포르투갈 포르투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 이른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2박 3일간 호스텔 방에 펼쳐 놓은 짐을 정리해야 했다. 아침 식사 시간 마감 직전에야 겨우 차가운 우유에 만 시리얼을 한술 뜰 수 있었다. 늘 그랬듯 조식을 먹으며 일행과 오늘의 일정을 점검했다. 우선 아침 식사를 마치면 체크아웃을 하며 호스텔 프런트에 짐을 맡긴다. 그리고 포르투에서 꼭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들을 돌아본 후, 오후에 고속버스를 타고 리스본으로 이동한다. 이번 생에 다시 오게 될지 기약이 없는 도시, … [Read more...] about ‘미래의 나’를 여행지에서 만난 이야기
천천히 굴러가도 결국은 스트라이크
거의 1년 만에 간 토요일의 강남역은 변함없었다. 싱그러운 청춘들로 넘쳐났고, 무질서로 정신없었다. 저녁을 먹은 후, ‘소화시키자’라는 핑계로 우르르 볼링장으로 몰려갔다. 마스크로 중무장한 채. 얼마만의 볼링장인가? 21세기가 막 시작하던 무렵, 처음 가본 이후 내 인생에서 두 번째 가는 볼링장이었다. 아마 그때쯤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가 있다면, 지금은 아마 나와 볼링을 칠 만큼 자라지 않았을까? 주섬주섬 볼링화로 갈아 신고 배정받은 레인에 자리 잡았다. 편을 가르고 보니 자신의 볼이 … [Read more...] about 천천히 굴러가도 결국은 스트라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