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새해가 시작된 후 첫 월요일. 지난 연말 내내 커피 17잔을 마시고 맞바꾼 초록색 별다방 다이어리를 펼쳤다. 지난번, 연말이 되면 매해 연례행사처럼 다이어리를 모으기만 했지 정작 사용하지 않았다는 글을 쓰고 난 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군가의 말대로 뭔가를 모으기만 하는 걸 열심히 한다고 착각하며 살았다. 몇 년째 책장 틈에서 먼지만 쌓여가는 다이어리를 더는 방치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2021년 다이어리만큼은 빛 한 번 보지 못하고 쓸쓸히 퇴물이 되는 슬픔을 겪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쓰기로 마음먹었다. 다이어리로 태어난 보람을 느끼게 해 주리라 작심했다.
크다면 크고, 사소하다면 사소한 결심을 마음에 품고 다이어리를 펼쳤다. 그리고 맨 앞장에 2021년 한 해 동안 이루고 싶은 구체적이고 자잘한 목표들을 또박또박 적었다.
- 책 ○○○권 읽기
- 잠들기 전 책 한 챕터씩 꼭 읽기
- 하루에 ○○○○○보 걷기
- 몸무게 ○○kg 유지하기
- 비행기 ○번 이상 타기
- 글씨 교정 책 ○번 반복해 쓰기
- […]
- 다이어리 꼬박꼬박 쓰기
방학 때면 숙제로 일기를 썼다. 왜 써야 하는지도 모르고 쓰라니까 썼다. 그 시절, 많은 초등학생이 그런 것처럼 나 역시 개학 며칠 전 벼락치기로 한꺼번에 몰아 일기를 썼다. “오늘은 △△△을 했다. 참 재미있었다.” 혹은 “오늘은 ★★★을 먹었다. 참 맛있었다.” 정도로 복사 수준의 일기를 손으로 찍어냈다.
차라리 산수 문제를 풀라고 하지 왜 일기를 숙제로 내줄까? 선생님을 원망하며 팔이 빠져라 일기를 썼다. 그렇게 ‘일기’라는 단어에는 나에게 ‘귀찮음’ ‘하기 싫음’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겹겹이 쌓여갔다.
무언가 꾸준히 기록하는 일에 재능이 없는 나는 종종 놀라곤 한다. 사춘기 때부터 써온 다이어리가 집에 수십 권 쌓여 있다는 지인. 일, 일상, 덕질 등 필요에 따라 한 번에 여러 개의 다이어리를 쓴다는 친구. 다이어리 꾸미기, 일명 ‘다꾸’에 빠져 매달 몇만 원씩 각종 물품(?)을 산다는 후배 등등 다이어리(쓰기)에 진심인 사람이 이토록 많은지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관심 없어 몰랐던 ‘다이어리의 세계’는 실로 다양하고 또 깊었다.
2021년을 시작한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겨우 한 달을 못 채운 ‘다이어리 꿈나무‘의 행보를 중간 점검하자면 80점 정도? 이토록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는 이유는 일기를 향한 허들을 낮췄기 때문이다. 난 나를 안다. 매일 꾸준히 하지 않을걸. 그걸 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처음 다이어리를 써야겠다 마음먹을 때도 굳이 ‘매일’이란 단어를 집어넣진 않았다. 이게 바로 ‘게으름의 달인’이 꾸준히 다이어리를 쓰게 만든 꼼수.
잘하기보다 우선 꾸준히 해서 바라는 바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초반에 힘 다 빼고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보다는 우선 무사히 끝내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다이어리에 하나 둘 이가 빠지더라도 ‘망했다’며 단념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앞으로의 날들의 빈칸에 한 줄이라도 채워 넣는 습관을 들이기로 했다. 다이어리를 펼치는 일이 귀찮아질 때마다 이 말을 곱씹는다.
Done is better than perfect.
성급하게 결과를 속단하지 말고, 우선 시작한다. 그리고 끝을 맺을 것. 이게 바로 올해의 모토다. 이것이 바로 2020년의 나를 일으킬 말이다.
보통 일주일에 1–2번 몰아 다이어리를 쓴다. 주로 책 한 권을 다 읽으면 그 책의 이름을 기록하기 위해 다이어리의 월간 페이지를 펼친다. 그리고 이어 일간 페이지에 본격적으로 일기를 쓴다. 그날 있었던 특징적인 일과 그때의 감정, 그리고 마무리는 늘 그날의 나를 칭찬하는 한마디로 끝낸다.
길지도 않고, 별 심오한 내용도 없다. 어떤 싹을 틔울까? 어떤 색깔의 꽃을 피울까? 어떤 모양의 열매를 맺을까? 기대하는 농부의 심정으로 캄캄한 땅에 씨를 뿌리듯 다이어리에 감정과 글자들을 뿌려 놓는다.
2021년의 마지막 날, 다이어리 맨 앞장의 To Do List는 몇 개나 클리어하게 될까? 이 무심한 시간과 글자들이 차곡차곡 쌓여 올해의 끝에 선 내게 어떤 의미를 선물할까? 검사를 하는 선생님도 없고 ‘좋아요’를 눌러주는 독자도 없는 글, 일기. 2021년의 나를 오롯이 담을 이 초록 다이어리의 미래가 궁금하다. 몹시.
원문: 호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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