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겐 참기름에 대한 철칙이 하나 있다. 참기름은 무조건 전통시장 기름집에서 갓 짜낸 것만 산다는 것이다. 노란색 혹은 빨간색 플라스틱 모자를 쓴, 소주병에 담긴 그 참기름 말이다. 엄마가 기름집의 참기름만 고집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맛과 향 때문이다. 마트에서 파는 난다 긴다 하는 대기업들의 제품은 따라올 수 없는 진한 맛과 향이 있다는 것이다. 기름집 참기름 맹신자(?)의 딸로 몇십 년을 살았으니 이젠 눈 감고도 공장 출신과 기름집 출신을 구별할 수 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출신지나 제조 공정의 차이 때문에 오는 게 아니다. 포장 뒷면을 보면, 참깨 알만큼 작은 글씨로 ‘원재료 및 함량’이 쓰여 있다.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는 다수의 공장제 참기름은 참깨분, 즉 참깨 가루를 압착해 짜낸 기름이다. 반면, 기름집 참기름은 통깨를 볶아 기름을 낸다. 원재료인 참깨가 가루냐 통이냐로 참기름의 맛과 향이 결정되는 것이다. 소비자들이 세심하게 포장 겉면 깨알 같은 글씨들을 세심하게 확인하지 않으면 참깨분으로 만든 밍밍한 참기름을 고를 확률이 높다. (물론 마트에도 통참깨로 짠 참기름 제품도 있고, 기름집에서도 참깨분으로 참기름을 만드는 곳도 있다)
제품 성분표를 보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참기름의 비밀. 그걸 알게 된 후 버릇이 하나 생겼다. 가공식품을 사게 될 때는 꼭 제품을 뒤집어 제품 성분표를 본다. 원재료는 뭐가 얼마나 들었는지, 인공첨가물은 뭐가 들었는지 천천히 살핀다. 같은 제품이라도 제조사에 따라 재료의 함량과 성분은 천차만별이다. 흐릿해지는 눈에 힘을 빡 주고 참깨 알만큼 작은 제품 성분표 속 글자들을 보며 생각했다.
내 등에 원재료 및 함량 표시가 적힌 제품 성분표가 있다면 뭐가 적혀 있을까?
지난 연말, 호되게 몸살을 앓았다. 시간이 지나 크고 차가운 쇠망치로 맞은 듯 쑤셨던 근육통은 사라졌다. 하지만 ‘열없는 오한’은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계속 날 괴롭혔다. 그다지 추운 날씨가 아니었는데도 으슬으슬 몸이 떨렸다. 오한을 몰아내려 숨이 막힐 만큼 겹겹이 옷을 껴입었다. 발, 허리, 배, 등 몸 곳곳을 핫팩으로 도배했다. 담요만큼 두껍고 커다란 머플러를 미라처럼 몸에 휘감고 살았다. 무슨 짓을 해도 뼛속부터 올라온 독한 한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코로나 19는 아니었으니 오해 마시길…)
여러 상황 때문에 병원은 가지 못했다. 대신 출근 전 약국에 들러 처방받은 약을 먹었다. 한약, 양약을 아우르는 총천연색 감기몸살약이 몸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 약마저 다 떨어진 어느 날 새벽 7시. 아직 어둠이 다 사라지지 않은 그 시간, 지하철역 앞의 약국이 간판이 반짝였다. 이 시간에 용케 문을 연 약국이 있었다. 마치 사막을 떠돌던 길 잃은 방랑자가 마주한 오아시스 같았다. 사무실에 들어갔다 약국 여는 시간에 다시 나오는 수고를 덜었다. 문을 빼꼼 열고 들어가 잠이 덜 깬 약사에게 기계처럼 증상을 말했다. 약사는 좀비 같은 몰골의 나를 빤히 보더니 말했다.
“감기약을 먹어도 계속 오한이 난다고요? 그게 다 에너지가 바닥이 나서 그래요.”
증상을 말하면 자판기처럼 감기약을 쥐어 주던 이전 약사들과 달랐다. 그는 일시적으로 에너지를 채워준다는 약을 감기약 대신 내밀었다. 계산 후 그 자리에서 바로 약을 입에 털어 넣고 약국을 나왔다.
약 효과가 바로 나타난 걸까? 아니, 정확히는 예상치 못한 약사의 그 말이 더 효과가 컸다. 약사의 그 한마디 덕분에 흐릿했던 정신과 몸이 선명해졌다. 의사나 약사들이 자동응답기처럼 하는 말이 있다. ‘스트레스받지 마시고요, 잠 충분히 자고 밥 잘 먹고 쉬면 나아요’. (그걸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닙니다만…) 분명 그 말과 크게 다른 말이 아닌데도 묘하게 위로가 됐다.
아! 내 몸에 에너지가 바닥이 난 거였구나. 연료 부족 경고등이 깜빡이고 있는데 무시하고 계속 가속 페달을 밟은 거다. 내 몸에 에너지가 바닥났다고 신호를 보냈는데 그것도 모르고 몸을 쥐어짰으니 탈이 난 거였다. 그때 내 등 뒤에 제품 성분표가 있다면 아마도 이런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을까?
피로 50%, 에너지 20%, 스트레스 15%, 불안 10%, 무력감 3%, 짜증 2%…
제품 성분표가 등에 있으니 내가 이 상태인 걸 확인할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분표를 확인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도구를 이용하면 확인이 가능하다. 미용실에 가면 된다. 눈이 닿지 않는 뒷머리의 상태를 확인해 보라며 미용사는 거울에 다시 거울을 비춰 보여주곤 했다. 이 방법이라면 나라는 인간의 성분표가 등에 있건 머리 꼭대기에 있건, 뒤통수에 있건 다 확인할 수 있다.
2021년에는 거울 보는 시간을 늘리기로 다짐했다. 기본 상태를 비추는 거울인 ‘식욕’이 어떤지, 심리 상태를 비추는 거울인 ‘안색’이 어떤지, 고민 상태를 비추는 거울인 ‘책·동영상·음악 목록‘은 어떤지, 안정 상태를 확인하는 거울인 ’수면’ 등등 여러 종류와 모양의 거울 속 나를 들여다보면서 세심하게 체크하기로 했다.
에너지가 바닥이 났는지도 모르고 채찍만 휘두르지 말고. 가능한 이상이 생길 일 자체를 만들지 말고. 능력 밖의 일을 끌어안고 해결해 보겠다고 무리하지도 말고. 생기지도 않은 일을 앞서서 걱정하지도 말고. 무기력 뒤에 숨어 회피하지 말고. 나에 대해 온전히 집중하기로 했다.
2021년의 날들을 이렇게 채우면 분명 내년 이맘때쯤 내 등의 성분 표시에는 좀 더 따뜻하고, 긍정적인 단어들이 가득 차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길 간절히 바란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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