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친구의 채식주의자 선언을 듣고 놀란 적이 있다. 그는 육류는 물론이고, 달걀이나 우유처럼 동물에서 비롯된 음식도 섭취하지 않는 엄격한 비건이 된 지 5개월째라고 했다. 어떻게 시작한 거야? 회사에서 회식도 자주 하는데 안 힘들어? 앞으로도 계속할 예정이야? 친구에게 질문하는 내 모습은 흡사 채식주의자를 검거하려고 취조하는 형사 꼴이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아차렸다. 그건 육식에 대한 죄책감에서 비롯된 자기방어였다. 몇 년 전 나도 채식을 시도한 적이 있다. 『육식의 종말』과 … [Read more...] about 완벽하지 않은 채식주의자
수족관 아포칼립스를 꿈꾸다
예전에는 데이트 장소로 아쿠아리움을 좋아했다. 애인이 있는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코엑스나 롯데월드 아쿠아리움 티켓을 주기도 했다. 영화 <클로저>에서 줄리아 로버츠와 클라이브 오웬이 수족관에서 처음 만나는 순간이라던가, 영화 <후아유>에서 인어 쇼를 연습하는 아쿠아리움 다이버 이나영과 조승우의 사이버 러브라던가.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도 빼놓을 수 없다. 열대어로 가득 찬 수족관을 마주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클레어 데인즈의 첫 만남은 얼마나 … [Read more...] about 수족관 아포칼립스를 꿈꾸다
쓰레기방에서 살아본 적 있나요
1. 그런 방을 본 적 있다. 원룸 입구에 위치한 주방의 개수대엔 설거짓거리로 가득 차 있는 방. 프라이팬에는 기름 낀 음식물이 말라붙어 있고, 유리컵 바닥엔 푸른곰팡이가 피었다. 주방에서 침대까지 거리는 열 걸음도 채 되지 않지만, 발 디딜 틈이 없어 한 발자국마다 공백을 찾아야 한다. 피자, 치킨, 떡볶이, 광어회 등 온갖 종류의 배달 음식이 박스 그대로 널려있고 어떤 봉지에는 구더기도 꼬여 있다. 날파리가 좁은 열 평짜리 방을 쉴 새 없이 날아다닌다. 침대 위에 옷들이 … [Read more...] about 쓰레기방에서 살아본 적 있나요
그냥 제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호칭의 민주화를 꿈꾸며
첫 직장 생활 때 내 호칭은 ‘마지(Margie)’였다(책의 여백에 메모하는 사람을 일컫는 ‘마지널리안’이라는 말에서 따온 이름이다). IT 회사에서 인턴을 시작했을 때다. 사수였던 과장님은 올리브. 워킹 그룹장은 제롬. 팀장도 그냥 제니퍼였다. 직급은 대외적으로만 사용됐을 뿐 실제로 불러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지는 어떻게 생각해? 회의 때는 인턴에게도 스스럼없이 의견을 묻고 경청했다.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다른 팀이나 처음 만난 사람과 소통할 때도 편하게 태그를 걸었다. 심지어 … [Read more...] about 그냥 제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호칭의 민주화를 꿈꾸며
회사 신년회에서 한 이상한 게임
전 직장의 신년회에서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아직 회사의 영업이익이 본격적인 하락세를 타기 전이라, 큰 웨딩홀을 빌려 한 해의 비전을 화려하게 선포하는 본부 행사가 가능하던 때였다. 그날은 약 200명 정도 되는 경영지원본부 임직원의 신년회였다. 총무, 인사, 교육을 담당하는 직원들이 바글바글하게 홀 안으로 모였다. 본격적인 신년회와 식사를 하기 전, 총무팀의 말 잘하는 선배들이 경직된 분위기를 깨기 위한 게임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게임의 내용은 화면에 뜨는 ‘인사 정보’의 주인공이 … [Read more...] about 회사 신년회에서 한 이상한 게임
흙수저 고백을 강요하는 사회
2019년 출간한 나의 책 『공채형 인간』에 대한 비난 글을 트위터에서 본 적이 있다. 고작 3년 일하고 퇴사한 사람이 회사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책을 쓰며, 세계여행을 간다고 하는 걸 보니 빚 없는 있는 집 자식이 분명하다는 조롱의 트윗이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다가, 보면 볼수록 재밌어서 아는 사람들에게 캡처본을 보내주고 다녔다. 책은 팔리지 않고 있었지만 잠시 셀러브리티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반응에 대한 적절한 피드백을 알고 있다. ‘흙수저 고백’이다. 퇴사하고 … [Read more...] about 흙수저 고백을 강요하는 사회
조언하는 사람들에게 조언
오랜만에 튼 TV에선 〈아침마당〉과 비슷한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날의 주제는 ‘세 명사의 행복론’. 시청자의 고민에 대해 스님, 목사님, 신부님 세 종교인이 조언해주는 포맷이었다. 주부들의 현실적인 고민에 중년의 종교인들이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하는 삐딱한 시선으로 방송을 시청했다. 시청자: 매번 취업하면, 결혼하면, 아이가 생기면 행복하겠지 하며 다음을 기약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신부님: 혼자서 보내는 여유로운 … [Read more...] about 조언하는 사람들에게 조언
싫존주의자 선언: 말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으니까
첫 직장에 다닐 때, 사수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너는 반골 기질이 보여. 나는 너를 이해하지만, 네가 다른 사수와 팀을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조금 걱정되기도 해. 비난의 어조는 없었다. 악의 없이 깔끔했다. 다른 회사 사람들에겐 내가 반골로 보일 수 있으니,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로 꺼낸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조금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튀지 않으려고 나름 조심하며 지내왔기에 내 입장에서는 본격적(?)으로 반골처럼 굴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수에게 그 말을 듣기 … [Read more...] about 싫존주의자 선언: 말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으니까
식욕억제제를 먹었다
한창 여행을 하던 무렵, 나는 외모 강박에 관한 책을 읽고, 몸의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사회적 억압에 대해 공부하며, 탈코르셋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식욕억제제를 먹기도 했다. 나는 외모 강박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나의 다이어트 욕구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퇴사 버킷리스트에 ‘세속적 아름다움을 떠나 나만의 아름다움을 찾자’는 다짐을 적고 한국 밖으로 긴 여행을 떠나왔으면서도 여전히 거기에 얽매여 있었던 것이다. 청년 실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 … [Read more...] about 식욕억제제를 먹었다
아빠가 죽어도 상주를 못 서는 딸
아빠는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도착했다 응급실에 도착해서도 심폐소생술을 계속했지만 가망이 없었다. 의사는 사망 증명서의 사인(死因)을 “미상”으로 썼다. 이미 심장이 멎은 상태에서 병원에 왔기 때문에, 기존 병력이나 짐작 가는 사인이 있어도 이 병원에서는 쓸 수 없다고 했다. 사망 증명서를 본 아빠 친구와 삼촌, 아빠 회사에서 나온 총무과 과장이 모두 원무과에서 따졌다. 그때도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뒤늦게야 사망 증명서의 사인에 '협심증으로 인한 심장마비' 등 … [Read more...] about 아빠가 죽어도 상주를 못 서는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