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데이트 장소로 아쿠아리움을 좋아했다. 애인이 있는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코엑스나 롯데월드 아쿠아리움 티켓을 주기도 했다.
영화 <클로저>에서 줄리아 로버츠와 클라이브 오웬이 수족관에서 처음 만나는 순간이라던가, 영화 <후아유>에서 인어 쇼를 연습하는 아쿠아리움 다이버 이나영과 조승우의 사이버 러브라던가.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도 빼놓을 수 없다. 열대어로 가득 찬 수족관을 마주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클레어 데인즈의 첫 만남은 얼마나 설레는지.
수족관은 확실히 낭만적인 구석이 있다. 온갖 색과 소음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수족관만큼은 물속에 들어온 듯이 고요하고 이색적인 공간감을 선사한다. 모든 것이 푸르게 보이는 시원한 시야, 바닷속을 걷는 듯한 길고 둥근 터널, 야광 조명을 받고 반짝이며 헤엄치는 해파리… 돌고래에게 먹이를 던지며 동물 친화적이고 배려심 넓은 주인공의 성격을 은유하기도 하는 아쿠아리움은 탁월한 영화적 공간이다. 너무나 현실적인 도심 한가운데서 이렇게 비현실적인 몽환을 느낄 수 있다니 말이다.
수족관은 우리에 갇힌 호랑이나 사자가 있는 동물원에 비해 동물을 대상화한다는 죄책감이 덜했다. 어쩌면 그것도 아쿠아리움 특유의 낭만적 공간이 불러낸 착시 효과 때문일지도 몰랐다. 언젠가부터 나는 수족관도 자연스럽게 가지 않게 되었다. 인간의 낭만을 위해 배경이 되는 동물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자유롭게 헤엄치지만 결국 한정된 공간일 뿐이고, 조련사와 유대감을 형성한 물개와 돌고래의 관계도 결국 ‘쇼’를 위한 우정이니까.
그럼에도 약간의 의문이 내 안에 남아 있었다. 사자, 호랑이, 독수리에 비하면, 해파리, 불가사리, 열대어 정도는 괜찮지 않냐고. 아쿠아리움을 둘러싼 동물권 운동도 대부분 고등 지각 능력이 있는 돌고래나 벨루가(흰고래) 등 포유류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어쨌든 수족관을 불매하기는 쉬웠다. 원래도 그렇게 자주 가는 일이 없는 이벤트성 장소였으니까. 그렇게 나는 동물원과 수족관의 차이, 은연중에 위계를 만든 내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채로 넘어갔다.
평온하고 게으른 수족관 불매는 어느 날 쉽게 깨졌다. 스페인으로 건축 답사를 갔을 때 일이다. 발렌시아에는 해양예술 과학단지인 ‘예술과 과학 도시’가 있다. 유명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조성한 이곳엔 발렌시아 해양박물관, 레이나 소피아 예술 궁전, 유럽 최대 규모의 수족관인 오세아노그라픽이 있다. 칼라트라바의 건축을 보러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안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가. 내 불매는 명분과 변명으로 쉽게 무너지는 정도의 다짐이었다.
오세아노그라픽은 하루를 온전히 다 써도 다 보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나는 급한 대로 관람 시간이 정해진 돌고래쇼부터 보러 갔다. 무대에서 멀찌감치 혼자 떨어져 앉았다. 본격적인 시작 전에 오세아노그라픽의 브랜드 영상이 떴다. 해양에서 구조한 동물을 치료하고, 멸종 위기에 빠진 동물을 보호하며, 해양 동물과 친환경적으로 함께한다는 그럴싸한 메시지.
이후 등장한 돌고래는 귀엽고, 조련사는 친절했다. 그러나 돌고래가 실수 없이 귀여움을 부릴수록, 조련사의 말을 잘 들을수록, 점프를 높이 할수록 불쌍해서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혼자 우는 게 민망한 나는 선글라스를 끼고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 내가 위선적이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왜 아까 해파리를 볼 때는 안 울었지? 내 교감과 동정의 감수성은 갈치, 고등어, 불가사리에겐 작동하지 않지만, 돌고래에는 작동하는 걸까? 이곳에서 나는 분열되고 위선적이어서 숨겨둔 이 감정과 또다시 마주했다.
하지만 결국 답은 간단하다. 종의 위계를 세우는 구조 자체를 거절하면 된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전시 당할 권리’는 어떤 동물에게도 없다. 해파리든, 멸치든, 그 목적이 인간의 재미와 감동, 눈요기를 위해 전시되는 것이라면 수용해서는 안 된다. 벨루가는 안 되고, 불가사리는 된다? 그런 위계의 기준을 세우다 보면 어느 순간에서는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된다. 어떤 것은 되고, 안 되고를 고려하는 이분법 사고는 ‘관람’의 비윤리성을 흐린다.
사실 수족관이나 동물원은 명분에 속기 쉽다. 동물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이들을 교육한다는 명분. 게다가 수족관은 왠지 동물원보다는 괜찮을 것 같다는 윤리의 비교우위까지 선점한다. 그러나 공룡에 대한 아이들의 무한한 애정을 생각해보면, 꼭 직접 봐야 공부가 된다는 말도 틀린 말이다. 다행히 AR·VR 기술의 시대는 전시 관람의 새로운 미래를 제시한다. 곧 우리가 굳이 동물을 관람하러 집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최근에는 정치적으로도 보다 진일보한 목소리가 등장하고 있다. 뮤지션 전범선 씨는 「동물당이 필요하다」라는 칼럼에서 유럽의 동물당을 소개하고, 한국의 동물당 창당 의지를 밝혔다. 사회적 약자인 동물의 권리 보호를 시민사회의 영역에서 정치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다짐한다. 좀 더 강하게 수족관을 불매하자고. 그리고 나는 기대한다. 아마 지금 운영 중인 수족관을 마지막으로 관람의 시대는 사라질 거라고. 수족관의 아포칼립스(종말)는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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