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도착했다
응급실에 도착해서도 심폐소생술을 계속했지만 가망이 없었다. 의사는 사망 증명서의 사인(死因)을 “미상”으로 썼다. 이미 심장이 멎은 상태에서 병원에 왔기 때문에, 기존 병력이나 짐작 가는 사인이 있어도 이 병원에서는 쓸 수 없다고 했다. 사망 증명서를 본 아빠 친구와 삼촌, 아빠 회사에서 나온 총무과 과장이 모두 원무과에서 따졌다.
그때도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뒤늦게야 사망 증명서의 사인에 ‘협심증으로 인한 심장마비’ 등 정확한 이유가 없으면 보험∙산재 신청 등 추후 행정처리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런 경우 부검을 해야 ‘여러모로’ 좋다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다).
어른들은 내가 모르는 언어를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 따졌다. ‘이 사람들에게 죽음은 처음이 아니겠구나. 익숙한 일이겠구나’란 생각이 드는 한편, 아는 게 없는 나의 무지함과 손을 벌려야만 간신히 한 발을 떼는 내 모습에 무력감 같은 것도 들었다. 모르는 것이 당연한 건데도.
무력감은 장례식장으로 이동했을 때 더 커졌다. 집에서 가까운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1층의 사무실로 향했다. 나와 엄마 뒤로는 삼촌, 아빠의 친구, 엄마의 친구 등 많은 어른이 따라 들어왔다. 다들 사무실 의자에 앉은 나를 바라봤다. 그곳에서 가장 어린 사람은 나였지만, 모든 것을 책임질 사람도 나였다.
아는 게 없으니 네가 알아서 다 하라는 엄마의 떠넘김도 당황스러웠다. ‘나도 아는 게 없는걸요.’ 그렇게 아는 게 없는 상태로 차가운 유리가 깔린 테이블 위에서 몇 번의 사인을 했다. 사무실 직원은 상품 소개를 계속했다. 수의, 제단, 입관 용품, 장지 용품, 염습 인건비, 제단과 꽃값, 음식 종류 등을 대여섯 장이 넘어가는 항목과 금액을 설명했다.
이 정도는 기본으로 다 합니다. 저렴하게 해드릴게요.
직원이 하자는 대로 골랐다. 유일하게 옵션이 주어진 납골함은 학과 꽃이 그려진, 개중 가장 고급스러워 보이는 40만 원짜리로 골랐다. 어른들이 뒤에 서 있는데 25만 원이나 30만 원짜리를 고르면 안 될 것 같았다. 나중에 화장터에서는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같은 납골함을 파는 것을 봤다.
성복제, 발인제, 봉분제… 수많은 제사도 체크했다. 각 제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해주지도 않은 채 그저 금액만 알려줬다. 엄마나 삼촌에게 물어봐도 다들 잘 모르는지 고개를 돌렸다. 담당자는 여전히 ”대부분 다 하는 단계고 음식도 잘 나와요.”라고 권유했다. 이 장례식장의 모토는 “좋은 데 보내드리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인 것 같았다.
‘어느 정도’가 고인의 품위와 품격을 해치지 않는 선인지 나는 궁금해졌다. 고인을 잘 떠내 보내야 한다는 유가족의 마음을 얼마나 장사로 환원할지도 궁금했다. 궁금한 건 많고 아는 건 없었지만 결국 결정은 내 몫이었다. 수많은 서류에 사인을 마친 나는 어쩌면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가족들에게는 곧 입을 옷을 나눠줬다. 엄마와 나, 여동생은 검은 한복을, 삼촌과 사촌오빠는 양복을 입었다. 상주 완장은 사촌 오빠가 찼다. 어른들은 하나같이 같은 말을 했다. ‘집에 남자가 한 명도 없으면 사람들이 무시한다, 남자 한 명은 있어야지’ 그렇게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사촌 오빠가 나 대신 상주를 섰다. 온갖 결정은 내가 내렸지만 아빠를 보내는 예식은 다른 사람 몫이었다.
장례식장에서는 평생 같이 산 직계존속보다도 남자를 선호한다는 사실도 그제야 알았다. 삼일장 내내 사촌오빠는 술을 따르고 불을 붙였다. 어차피 잘 알지도 모르는 나보다 대소사를 많이 경험한 중년 어른이 하는 게 맞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갈수록 억울하고 화가 났다. 한 집안의 장녀임에도, 아빠를 마지막으로 보내드리는 날에도 나는 앞에 설 수 없었다. 여자였기 때문에.
아빠 분향소의 전광판은 깔끔했다. 엄마, 나, 동생, 딱 세 명이었다. 나는 전광판에서야 상주가 될 수 있었다. 다른 분향소에는 전광판이 이름으로 꽉 차 있었다. 네댓 명의 자식, 그 자식들의 또 네댓 명의 손주들. 아빠를 일찍 잃은 핵가족은 장례식에서 ‘보기에 좋지 않았더라’ 타입이었다.
‘여자 셋만 남아서 가여워서 어째’라는 시선도 지긋지긋했다. 언젠가 기사에서 본, “장례식은 정상 가족의 삶을 평가하는 최종 시험장”이란 말이 지겹게 공감이 갔다. 전광판의 엄마 이름 옆에는 ‘미망인(未亡人)’이 적혀 있었다. ‘남편과 함께 죽었어야 했는데, 아직 죽지 못한 사람.’ 오래된 여성 혐오였다.
영정사진을 들고 장지로 향하는 사람도 내가 아닌 남자였다. 어른 여성인 나를 장례지도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애기처럼 취급하며 반말을 했다. 나는 왜 이렇게밖에 될 수 없었는지, 지나간 시간들을 생각했다. 이곳의 시스템은 다들 내가 아무것도 모르기를 바라는 것처럼 굴었다.
가부장제 속에서 상업화된 장례문화
내가 목격하고 체험한 장례란 가부장적 정상 가족이 얼마나 잘 살아왔는지를 심판하는 마지막 관문소였다. 여성과 남성이 할 일은 엄격히 나뉘어 있었고, 여성은 장손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고 겸허히 한 발짝 뒤에 서야 하는 ‘음’적인 존재였다. 그간 모든 제사와 명절에서 반복된 전통적 여성상이 가장 강하게 재생산되는 곳이 장례식장이었다.
보수적인 가족상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정상가족’의 재현은 상업화된 장례 문화와 결합했다.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고,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채로 반복되는 제사들. 그저 시간이 되면 기계처럼 음식이 세팅되고 절을 하는 절차화된 의례. 품위, 품격이란 이름으로 높아진 각종 상조용품들. 애도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장례를 치르며 나는 이런 다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 장례식은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아빠를 보내면서 내가 평생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애도의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된 채로 성장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등학교 때도 남자 사촌들에게는 “네가 자라서 해야 하는 일이다”라며 술을 따르는 법도 가르치고, 교복을 입을 나이에는 양복도 대신 입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무얼 했나. 음식을 들고 나르기만 했다. 회사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호주제가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고 사라지고, 여성을 종중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부계혈족과 모계혈족을 차등하지 않아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음에도, 어떤 중요한 관습과 비공식적인 유산은 여전히 가부장제에서 남성들에게만 전해진다. 그런 문화에서 자라난 여성은 소중한 사람을 갑자기 떠나보내게 되었을 때도 예식을 주체적으로 이끌만한 경험이랄 게 단 하나도 없다.
1인 가구, 비혼 가구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증가하는 시대, ‘정상 장례’ 문화도 바뀌어야 할 때다. 현재 우리나라의 1인 가구는 약 30%에 달하며, 2047년에는 1인 가구와 2인 가구의 비율이 전체 가구의 60%에 달할 것이라는 통계가 발표되었다. 대가족이 붕괴하고, 결혼하지 않는 가구가 급속도로 늘어나지만 장례 문화는 유독 변화가 더디다. 대부분 갑작스럽게 장례가 치러지는 경우가 많고, 이때 전통적인 관습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식의 당사자가 주체적으로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결혼식과 달리, 장례식은 대상의 부재를 전제한다. 유가족이 변화를 주려고 해도 “괜히 초지지 말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하지만 당장 장례문화를 바꿀 수는 없더라도, 내 장례식은 바꿀 수 있다. 그러려면 미리 장례에 대한 가치관을 세워두는 게 중요하다.
미리 내가 어떻게 죽을지 고민하고, 죽기 전에 내 주변에 있을 사람들과 이를 공유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상주는 고인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절차는 고인을 가장 잘 애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 방식은 사람마다, 가정마다 모두 다르다. 죽음이란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장례에 대한 가치관을 세워두는 것은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미래의 장례문화를 상상하다
고령화가 일찍 시작된 일본에는 이미 대안 장례가 많이 등장한다. 일본 도쿄 도심에 있는 신주쿠구에는 고코구지라는 절이 있다. 이곳에 들어가면 반짝이는 2,000여 개의 불상이 LED 조명으로 빛나는 ‘루리덴’이라는 납골당이 있다. 현대미술관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납골당은 부처의 지혜를 의미하는 빛과 일본의 사계를 테마로 형상화한 곳이다.
이곳을 만든 주지 스님은 납골당이 쓸쓸하기보단 즐겁고, 애도에 더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유족이 입구에서 망자 이름을 입력하면, 고인의 불상은 하얀색 불빛이 들어온다. 불상 뒤에는 보통 납골당처럼 유골함이 있다.
무엇보다 이 납골당은 ‘영대공양(永代供養)’이 이뤄진다. 망자를 책임질 수 있는 자식이 없어도 절이 끝까지 유골을 책임진다는 의미다. 핵가족화가 진행되는 가부장제 질서로 기존의 장례문화 존속이 어려워지자 새롭게 등장한 장례 문화다. 대부분의 불상은 생전에 미리 죽음을 준비한 사람들이 마련한 자리다. 자식이 있어도 부담 주지 않고 싶은 생각이 강해지면서 많은 사람이 생전에 미리 계약을 한다.
생전에 교류한 친구들과 같이 묻히는 ‘벚꽃장’도 있다. 도쿄도 마치다시에 있는 벚꽃장 묘지는 벚나무를 중심으로 만든 정원 형태의 묘지다. 이곳에 묻히는 사람들은 생전에 교류해 친구가 된 사람들이다. 이른바 ‘묘지 친구’들과 함께 묻히는 것이다.
사이타마현에는 여성들만을 위한 공동묘지 ‘나데시코’도 있다. 나데시코는 패랭이꽃을 의미하는 말로, 일본인들이 여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도 사용한다. 모두 자손이 돌보지 않아도 되는 ‘영대공양’을 기본으로 한다. 가족이 없는 사람도, 혼자 사는 여성도 걱정 없이 이승을 떠날 수 있다. 1인 가구, 비혼 가구의 장례에 대한 실험이 일본에서는 먼저 전개된다.
한국에도 기존의 획일적 장례식과 다른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 있다. 2017년 창업한 장례문화 스타트업 ‘꽃잠’은 저비용의 작은 장례식을 제공한다. 서비스는 3가지다. 빈소를 차리지 않고 입관식만 진행하는 ‘무빈소 화장식’, 빈소를 하루만 쓰는 ‘하루장’, 일반적인 삼일장을 진행하는 ‘가족장’이다. 고객들은 대부분 무빈소 화장식을 이용한다고 한다.
꽃잠은 장례식이 고인을 애도하고 유족의 슬픔을 달래는데 집중한다. 초고령사회와 1인 가구 확산에 따라, 고독사에 대한 불안과 걱정으로 연락을 주는 사람도 늘었다고 한다. 소규모 인원이 따뜻한 분위기에서 ‘조촐하지만 초라하지 않은’ 장례를 치를 수 있다면 어떨까.
앞으로도 장례를 직접 준비하는 사람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문상객 중심의 분향소, 남성 가족 중심의 조문 맞이, 싸늘한 안치실과 정적인 입관식… 어쩌면 이 모든 ‘정상 장례’는 생각보다 빠르게 대체될지 모른다.
나도 나의 장례식을 상상해봤다. 육개장을 먹지 않아도, 남자 상주가 없어도, 존엄하게 떠날 수 있는 장례식. 애도가 중심이 되는 간소화된 장례식. ‘나 없는 송별회’가 이루어지는, 조금은 산뜻한 장례식을 떠올렸다. 적어도 내가 죽을 때 즈음엔, 고인을 애도하는데 성별이나 가정의 형태가 제약을 주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장례의 청사진을 그리며, 내 죽음을 천천히 준비하기로 한다.
원문: 사과집의 브런치
매거진 소개
아빠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아빠의 삶은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 같지도, 내 삶은 『애도일기』를 쓴 롤랑 바르트 같지도 않았다. 이것은 애도의 일기가 아니다. 이것은 아빠가 죽은 후 진동하는 삶의 기록, 죽음과 삶에 대한 엇갈린 고찰, 남겨진 자가 삶을 처리하는 서툰 기록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난 후에, 사실은 이 모든 과정이 적절한 애도였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가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