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설 때였다. 설 연휴 일주일 전부터 길거리 여기저기 내걸린 펼침막들이 명절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가 사는 전북 군산에서는 일주일 전쯤부터 거리 곳곳이 펼침막 모드로 바뀌기 시작했다. 요새 설치되는 펼침막은 짤막한 문구임에도 세태와 시류의 풍향이 담겨 있는 듯하다. 명절 때 걸린 펼침막을 보고 읽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어느 날의 퇴근길이었다. 교차로에서 녹색 신호를 기다리던 중 인상적인 문구가 담긴 펼침막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에미야 어서 와라~ 올해 설거지는 … [Read more...] about “결혼과 동시에 부계사회의 노예가 되었구나”
“새끼야, 빨리 꺼져” 그 말이 악마를 만들었다
1. 몇 년 전 책 한 권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다 우연히 ‘희대의’ 범죄자 신창원에 관한 이야기를 보았다. 신창원이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닐 때였다. 학교에 내야 할 돈을 챙겨가지 못했다. 선생님이 “새끼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하러 학교 와. 빨리 꺼져.”라고 말했다. 신창원은 그 말이 가슴에 ‘악마’를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교사는 학생을 ‘말’로 가르친다. 교사에게 언어는 교육 활동의 처음이자 끝이다. 신창원의 이야기를 읽으며 교사의 말 한마디가 … [Read more...] about “새끼야, 빨리 꺼져” 그 말이 악마를 만들었다
‘그녀’만 있고 ‘그남’은 없다
1. ‘그’와 ‘그녀’는 삼인칭대명사다. 각각 주로 남자와 여자를 가리킬 때 쓰인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아닌 사람”, “앞에서 이미 이야기하였거나 듣는 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지시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나는 사전 유의 문법적 쓰임새에 관한 설명과 별개로 ‘그’와 ‘그녀’를 구별해 쓰지 않는다. 남자든 여자든 제3의 인물을 가리킬 때 ‘그’로 통일해서 쓰려고 노력한다. ‘그녀’가 있다. ‘그’는 ‘그남’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녀’만 있고 ‘그남’은 … [Read more...] about ‘그녀’만 있고 ‘그남’은 없다
진실스러움의 정치와 제정신의 정치
1. 지난 며칠간 『계몽주의 2.0』을 읽었다. 순전히 제목에 들어있는 ‘계몽’이라는 말 때문에 손에 쥐게 된 책이다. 정색하고 진지하게 말해 보자면, 계몽이 절실하게 필요해 보이는 우리 시대에 사람들로 하여금 계몽의 이유와 근거를 차분하게 정리할 수 있게 해줄 것 같았다. 웃음과 유머가 시대의 총아처럼 각광을 받는 세상이다. 분야를 막론하고 감성과 감각적 흥미가 우선 강조된다. 그러다 보니 이성과 합리를 따지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진다. 사실과 이론에 근거해 하나하나 따져보자고 말하면 누굴 … [Read more...] about 진실스러움의 정치와 제정신의 정치
지성의 타락과 반교육의 문화
지성(intellect)과 지적 능력(intelligence)의 차이를 어떻게 정리할까. ‘지혜롭다’와 ‘똑똑하다’ 같은 형용사로 이들을 대별할 수 있을까. 지성적인 사람과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은 어떻게 구별하나. 지성과 지적 능력의 관계는 상보적일까 모순적일까. 리처드 호프스태터 컬럼비아대학교 특훈교수는 1964년 퓰리처상 수상작 『미국의 반지성주의』(2017, 교육서가)에서 지성과 지적 능력을 이렇게 구별했다. 지성은 두뇌의 비판적이고 창조적이고 사색적인 측면이다. 음미, … [Read more...] about 지성의 타락과 반교육의 문화
언어는 힘이 세다
1. 때로 우리는 제정신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다. 2. 2001년, 미국에서 9·11 사태가 일어났다. 2년 뒤 미국 정부는 9·11 사태의 대응책으로 이라크 침공을 감행했다. 표면적으로 대량 살상 무기 개발 의혹을 받고 있는 사담 후세인 독재 정권을 제거한다는 명분이 뒤따랐다. 이 전쟁에는 ‘이라크의 자유(Freedom of Iraq)’라는 그럴듯한 이름이 부여되었다. 이라크에 자유와 평화를 선사한다는 도덕적인 목표에서였다. 적국에 대한 공습 과정에서 발생하는 … [Read more...] about 언어는 힘이 세다
10대의 글쓰기와 ‘각자의 언어론’
※ 격월간 잡지 《민들레》 제113호(2017년 9-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섹스하고 싶다.” 단 한 문장이었다고 한다. 그간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일생을 앞당겨 상상한 뒤 자신의 묘비명에 남기고 싶은 문구를 써 보는 국어 수업 시간이었다. 짐작하건대 교실 분위기가 자차분하게 가라앉았을 것이다. 연필을 들고 묘비명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는 학생들은 처음에 장난처럼 생각을 펼쳐가다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며 점차 머릿속이 묵직한 감정들로 채워지지 않았을까. … [Read more...] about 10대의 글쓰기와 ‘각자의 언어론’
“1그램의 경험이 1톤의 이론보다 낫다”
1 ※ 아래 내용은 오즐렘 센소이, 로빈 디엔젤로의 <정말로 누구나 평등할까?> 39~43쪽에서 발췌하였다. 1981년 미국 교육학자 진 애니언(Jean Anyon)이 사회 계급에 관한 중대한 연구를 했다. 노동계급・중간계급・상류층 학교 각각의 학생들에게 ‘A. 지식이란 무엇인가? B. 지식은 어디에서 오나? C.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나? 있다면 어떻게?’ 등 일련의 질문을 던졌다. 학생들이 속해 있는 사회 계층에 따라 지식에 대한 정의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밝히기 … [Read more...] about “1그램의 경험이 1톤의 이론보다 낫다”
“날로 먹으면 안 되잖아요”라는 말
이 글은 초등교사의 정치 사회적 정체성을 고민하며 쓴 글이다. 본문에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중등교사들 역시 초등교사를 둘러싼 문제의 자장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음을 밝힌다. 요컨대 ‘그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것. 나는 초중등교사 전체의 교직 정체성 여하에 따라 우리나라 학교 교육의 미세한 결들이 결정된다고 믿고 있다. 교육혁신의 성패 또한 이에 큰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한 좀 더 심도 있는 토론이 이루어졌으면 … [Read more...] about “날로 먹으면 안 되잖아요”라는 말
“착하고 양심적인 당신, 권위에 쉽게 복종하겠군요.”
1 2013년 3월 25일, 부산 해운대구의 한 아파트에서 고등학교 2학년 학생 권 군이 투신자살하였다. 경북 지역의 한 자율형사립고 재학생이었다. 2학년에 진급해 치른 첫 번째 모의고사에서 인문계 1등을 차지했다. 1학년 때 반장, 2학년에 올라가서 부반장을 맡았다. 투신 1주일 전 담임교사와 상담을 하면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행정학과에 가고 싶다”고 웃으며 말했다. 권 군이 투신 직전 자신의 어머니에게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 “제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데 이제 더는 못 버티겠어요. … [Read more...] about “착하고 양심적인 당신, 권위에 쉽게 복종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