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초등교사의 정치 사회적 정체성을 고민하며 쓴 글이다. 본문에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중등교사들 역시 초등교사를 둘러싼 문제의 자장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음을 밝힌다.
요컨대 ‘그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것. 나는 초중등교사 전체의 교직 정체성 여하에 따라 우리나라 학교 교육의 미세한 결들이 결정된다고 믿고 있다. 교육혁신의 성패 또한 이에 큰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한 좀 더 심도 있는 토론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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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혜 이화여대 교수가 2011년 ≪한국교원교육연구≫ 제28집에 쓴 논문 <온라인 교사공동체의 협력적 전문성 개발-인디스쿨 사례 연구>를 찾아 읽었다. 초등교사 중심의 온라인 교사 커뮤니티로 유명한 ‘인디스쿨’이 “종래 개인주의적 접근방식에서 탈피하여 온라인상에서의 협력적 전문성 개발이라는 새로운 접근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점을 밝히려 한 논문이었다.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과 인디스쿨에 대한 이야기를 짤막하게 나누고 난 뒤였다. 10만 명을 훌쩍 넘어 우리나라 초등 교사 거의 대다수가 가입해 있는 국내 최대 온라인 교사 커뮤니티, 아이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감각적인 교육활동 자료들이 많아 초등 교사들이 수업을 준비하는 데 크게 의지하는 공간, 예의 선생님 촌평을 빌리자면 보수화한 젊은 교사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중심으로 강하게 결속해 있는 공간 등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하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대화를 마친 뒤 구글 검색창에 곧장 ‘인디스쿨’ 네 글자를 입력했다. 검색 결과물 40만 개가 화면에 떴다. 서 교수의 논문은 결과물 중 8번째에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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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교수의 논문에서 흥미롭게 읽은 대목은 인디스쿨 교사들의 ‘실천’과 관련하여 결론에 제시해 놓은 논쟁적인 내용이었다.
교사들이 원하는 협력은 자료를 공유하는 수준의 협력이었다. 실천 수준의 협력은 아니었다. (중략) 그러나 실천 수준의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교사들의 전문성 향상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 서경혜(2011), <온라인 교사공동체의 협력적 전문성 개발-인디스쿨 사례 연구>, ≪한국교원교육연구≫ 제28집, 155쪽.
서 교수가 논문 말미에 정리해 놓은 ‘참고문헌’을 보니 인디스쿨을 학술적으로 조명한 시도가 몇 편 더 있었다. ≪한국교원교육연구≫에 실린 논문이 한 편 더 있었고[서경혜(2009), <교사 전문성 개발을 위한 대안적 접근으로서 교사학습공동체의 가능성과 한계>], ≪교육공학연구≫에 이와 비슷한 주제의 논문이 실려 있었다.[김도헌(2008), <교사들의 지식공유 및 전문성 향상을 위한 네트워크 기반 실천공동체의 발달과정>] 그 전에 석사학위논문 한 편도 나와 있었다.[신은화(2006), <온라인 교사 커뮤니티 성공 사례 연구-‘교컴’과 ‘인디스쿨’을 중심으로>]
서 교수는 예의 논문에서 인디스쿨이 “실천 수준의 협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가 말한 “실천 수준의 협력”은, 자료 공유에 기반한 실천과, 이러한 실천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나 개선안 마련, 후속 단계의 또 다른 실천 등이 협력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단순하게 바꿔 말하면 인디스쿨 교사들이 자료를 공유만 할 뿐 협력 수준에서 각자의 실천 결과를 함께 나누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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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연구자가 일개 온라인 교사 모임을 학술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이례적이었다. 인디스쿨이 단순한 커뮤니티가 아니라 우리나라 초등 교직 사회의 어떤 특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는 방증으로 읽혔다. 나는 인디스쿨의 “실천 수준의 협력”에 관한 서 교수의 논평을, 사회적 연대의식의 결핍이나 부재로 특징지어지는 이즈음 젊은 교사들의 문제와 연결된 것으로 이해했다.
사실 인디스쿨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고 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 7월 초부터였다. 6‧30 사회적 총파업에 즈음하여 일부 전교조 교사들이 조합에서 탈퇴하는 사례가 수도권 일부 지역에서 있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들었다. 그 움직임의 중심에 인디스쿨에 소속되어 있는 젊은 초등 교사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학교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자신들의 ‘권리’나 ‘특권’을 빼앗는 것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페이스북 친구인 송원재 전 전교조 서울지부장이 6월 28일 페이스북에 써 올린 글에 생생히(?) 표현해 놓은 것처럼, (학교 비정규직들을) “공정한 절차를 거쳐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것은 찬성하지만, 날로 먹으려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는 생각이 그들의 속내인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의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는 ‘차별의식’을 생각했다. 그들은 정규교사와 비정규교사를 가르는 교원임용시험에서의 당락 여부를 중시한다. 정규교사는 그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였으니 그에 걸맞는 능력에 맞게 특권적인 대접을 받는 게 당연시된다.
비정규교사는 그래서는 안 된다. 합리적인 공정성과 정의의 문제다. 이런 목소리들이 곳곳에서 들렸다. 급기야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는 조리사들에게 일정한 시험을 치르게 한 뒤 정규직화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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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로 먹으려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 몇 년 전 오찬호가 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을 읽고 길게 서평을 쓴 적이 있다. 글머리를 이렇게 시작했다.
20대는 약자이면서도 약자인 줄 모른다. 포악한 강자처럼 약자를 짓밟는다. 20대는 모순 덩어리다. 그들도 약자의 비참에 눈물을 흘릴 줄 안다. 하지만 약자들과 ‘연대’하자고 말하면 순식간에 안면을 바꾸며 “제가 왜요? 그들이 그러면 안 돼요. 날로 먹으려는 거잖아요.”라고 한다.
오찬호는 이 책에서 20대가 학력위계주의에 빠져 있다고 보았다. 수능점수에 따라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쭉 이어지는 수능배치표상의 학교 순위를 노골적으로 강조하고 내면화하는 태도가 학력위계주의다. “서연고서성한중”으로 시작하는 서울 소재 대학 서열 목록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20대에게 수능점수는 대학과 학생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진리의 빛’이다.
이들은 수능성적과 그것을 기준으로 한 대학서열을 가지고서 타인을 평가하는 것이 (상당 부분 비논리적인 고정관념에 근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합리적이고 공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치 비정규직 전환 요구 문제 등의 사회적 이슈에서도 차별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듯이 말이다. – 오찬호(2013),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개마고원, 141쪽.
자기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 세상이 뭐가 문제냐며 힐난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사회구조와 시스템의 문제를 보자고 강조하는 나는 기회의 균등과 과정의 공정과 결과의 정의 문제를 차분히 짚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가령 기회 균등의 문제를 보자. 2010년경 ‘정의’ 열풍을 몰고 온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에 그려진 샌델 교수의 강연 한 토막을 보자.
“능력 위주 사회에서는 기회가 공정하다고 해도 타고난 재능 덕에 자격 없는 사람이 남보다 앞서거나 보상을 받습니다. 노력도 노동윤리도 수많은 가정환경에 좌우됩니다. 가정환경은 우리 노력과 상관없습니다. (중략) 심리학자들은 형제간 출생순서에 따라 노동윤리와 노력이 차이가 있다고 말했는데,(이와 관련하여 캐나다 심리학자 로저 반즐리의 연구와, 이를 소개한 말콤 글래드웰의 논급에 대해 쓴 글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학생 중 첫째 손들어 보세요!” 그리고 대다수가 손을 들었고 논쟁은 종료된다.
– 오찬호(2013), 위의 책, 210~211쪽에서 재인용함.
사람들은 개인의 능력과 의지가 그 사람 개인의 것이라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샌델 교수의 말에서처럼, 첫째로 태어난 것은 성공(가령, ‘하버드’라는 명문대 입학)에 큰 영향을 준다. 집안에서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할 확률이 훨씬 높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첫째로 태어나거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는 것은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소득에 따라 꿈조차 달라지는 세상이다. 오찬호가 책에서 인용하는 <소득에 따라 꿈도 다르다: 소득별·학교별 장래희망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외국어고의 경우 장래희망이 고소득 전문직인 학생이 76퍼센트에 이르는 반면에 실업고는 3퍼센트에 불과하다. 거꾸로 중하위직종을 꿈꾸는 경우는 외고가 11퍼센트, 실업계는 79퍼센트다. 꿈과 희망이 ‘뜨거운 가슴’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 돈이 있어야만 가슴도 뜨거워질 수 있다는 말이 서늘하게 들린다.
아버지 잘 만나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죄’일 수 없겠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부모와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공부를 더 잘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능력주의’만 강조하면, 그 덕이 없었던 사람은 도대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오찬호가 분개에 찬 목소리로 내놓은 반문이다.
과정의 공정과 결과의 정의 담론이 어떻게 왜곡되어 유통되고 있는지도 살펴보자. 오찬호는 우리 사회에서 과정의 공정을 왜곡시키는 대표적인 언변술로 “모두가 불공정한 과정을 겪고 있다! 그러니 다 똑같은 조건이다!”라는 말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모두가 불공정한 게임을 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 마찬가지이니 모든 사람이 ‘동일한 조건’ 아래 있다는 식의 착각을 하게 한다.
결과의 정의 또한 ‘자기 책임 논리’의 덫에 빠져 있다. 균등하지 못한 기회 덕분에 서로 다른 출발선에 서서 경주를 시작한 뒤 공정하지 못한 경쟁 과정을 거쳐 얻게 된 결과의 피해자들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자기 스스로 지고 있다. 자기 책임의 논리에 경도된 우리 사회의 많은 젊은이들이 비정규직이 피해를 입는 것은 그들이 못나서고, 학교 서열에 따라 멸시와 차별을 받는 것을 능력 부족 탓이라고 여기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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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교사 집단은 전국 10개 교육대학 출신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각자 (교대 출신이라는) 내부자 의식이나, 선‧후배 사이 결속력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나는 초등교사 집단에 퍼져 있는 이러한 독특한 문화(?)와 분위기가 교대의 대사회적인 높은 위상이나 교사 직종의 직업 안전성 들과 결합하면서 초등교사들을 배타적인 선민주의에 빠지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고 있다.
정확한 데이터는 없지만, 교대생 부모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비교적 높은 편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수능 성적을 포함하여 입시 성적 전반을 볼 때 교대생들은 전반적으로 ‘모범생’ 범주에 포함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경제적으로 중산층 이상 집안 출신의 공부 잘하는 학생이 교대에 입학하고 교사 직군에 편입되는 셈이다. 요사이 젊은 교사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는 데 민감한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이러한 사실들과 연결하여 이해하면 지나칠까.
초‧중등을 막론하고 젊은 교사들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가입하는 것을 꺼려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전교조의 정치성이나 경직된 조직 문화 들에 대한 거부감을 주된 이유로 든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면에 그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연대의식의 결핍이나 부재 문제가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교조가 사회적 연대를 실천하는 유일무이한 조직은 아니지만, 교사들의 처우와 교육 시스템 개선에 앞장서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고려할 때 안타까운 일이다. 인디스쿨 내 일부 교사들의 ‘실천’이 ‘사회적 연대’보다는 ‘이익의 연대’에 가깝게 보이는 것도 이런 점들과 관련될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유대 관계가 갈수록 떨어진다. 사회생활을 해 나가는 데 중요한 공동체성이나 사회적 상호작용과 같은 태도들을 갖추는 일이 쉽지 않다. 특권의식과 배타적인 선민주의에 빠진 일부 젊은 교사들이 자신들의 손익 계산에는 민감하면서 사회적 연대나 협동에는 별다른 시선을 주지 않으려는 모습이 묵시록적인 ‘징후’로 보이는 까닭이다.
이기심을 부추기고 자기만을 돋보이게 한 이들에게만 보상을 해 주는 사회는 긴장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런 사회는 종종 극심한 불평등에 빠져들어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심각하게 만든다.
(중략) 공감하는 능력 또한 사회적 격차가 벌어지는 만큼 저하될 것이다. 불평등이 심한 사회는 공감 수준이 떨어지고 불안정한 사회로 치닫게 될 것이다.
개인주의가 활개치는 사회는 비록 잘 사는 것처럼 보이거나 다수의 부유층을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사실은 매우 높은 범죄율과 사회적 긴장 상황이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 – 데이비드 호우(2013), 『공감의 힘』, 지식의 숲, 300쪽.
원문: 정은균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