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는 것이 죄가 될 수 있을까? 『나목』은 그 죄인 된 자의 고백이다. 박완서는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에 대해 침을 튀기며 연설하는 종류의 작가는 못 된다. 그보다는 인간의 허영심과 욕망에 대해 신랄하게 직시하고 냉소적으로 통찰하는 작가에 가깝다. 그것이 전쟁통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유일한 가족 어머니에 대한 증오심까지 진솔하게 발화하는 것에 이를 때, 박완서 특유의 통렬함은 가부장제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맞물려 그 진솔함의 날을 한껏 세운다. 제기랄 어머니이기 때문일까? 썅, … [Read more...] about 살아남은 자의 ‘죄 됨’: 박완서 〈나목〉
사랑하는 마음을 외면한다는 건, 〈옷소매 붉은 끝동〉
원작은 묻는다. 왕은 궁녀를 사랑했다. 궁녀는 왕을 사랑했을까? 출발은 정조의 어제비문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가장 완벽한 왕이 남긴 비통의 말, 어떤 왕도 남기지 않았던 말, 사랑한다. 참으로 속이 탄다. 네가 죽고 나서 나와 헤어졌다. 나는 비로소 너의 죽음을 깨달았다. 정조의 어제비문 중 가장 완벽한 왕이 유일하게 사랑한 여인, 성덕임. 왕은 궁녀를 사랑했다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러나 장옥정과 함께 유일하게 자신의 이름을 남긴 여성임에도, 성덕임의 … [Read more...] about 사랑하는 마음을 외면한다는 건, 〈옷소매 붉은 끝동〉
사랑의 모양: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며
현실이 아닌 허구 세계에 젖어 사는 요즘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기 위해 수목을 기다리며 일주일을 살아내는 나날이 반복되었다는 뜻이다. 그중에서 내가 유난히 꽂혀 있는 포인트는 주인공 우영우의 우당탕탕 성장 스토리일 것 같으나, 실은 영우와 준호의 들꽃 같은 로맨스다. 최애의 순간 드라마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가장 애정하는 순간이 한 번쯤 찾아온다. 덕후들은 그것을 ‘치인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비장애인이 아무렇지 않게 쓰는 ‘치인다’는 표현은 누군가에겐 폭력적인 … [Read more...] about 사랑의 모양: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며
할머니는 ‘살아 있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할머니는 오래 사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정확히는 살아 있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그리고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들킬세라 눈치를 본다. 행여나 주변 가족들이 할머니를 두고 '너무 오래 살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다'라고 생각할까 봐, 자꾸만 먼저 선수를 친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챙피스럽다. 빨리 죽어야지, 너무 오래 살았어. 할머니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할머니가 오래 사는 것을 민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우리의 답은 늘 정해져 있다. 할머니가 … [Read more...] about 할머니는 ‘살아 있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영화를 보고 싶다면
※ 이 글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말보다는 '위안부' 생존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일본군 성노예제에 의한 피해성과 그럼에도 고된 삶을 살아낸 주체성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 할머니와 같이 생존자의 성함 뒤에 '할머니'를 붙였습니다. 생존자인 동시에 여성 노인으로서 일상을 살아가는 삶에 대한 존칭을 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를 묘사하는 콘텐츠는 대부분 다음의 두 가지를 포함하곤 한다. 끌려가기 전의 유년 시절을 … [Read more...] about 마음이 따뜻해지는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영화를 보고 싶다면
〈겨울왕국〉, 자책하는 엘사와 열린 문 안나
※ 〈겨울왕국〉과 〈겨울왕국2〉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흔히 속편은 무리하게 재미를 추구하다 인물의 성격에서 개연성을 잃곤 한다. 그러나 겨울왕국 2는 훌륭히 재미를 구현해냄과 동시에 우리의 주인공인 엘사와 안나의 성격의 개연성을 유지했고 동시에 각 캐릭터 나름대로의 성장까지 이루어냈다. 이 글에서는 〈겨울왕국 1〉과 연결하여 엘사와 안나가 어떠한 개인적 삶과 환경에서 성장했기에, 엘사는 자책을 과하게 하고 책임감이 지나친지 안나는 모두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 [Read more...] about 〈겨울왕국〉, 자책하는 엘사와 열린 문 안나
집의 취향과 존엄, 영화 〈소공녀〉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은 둘이다. 바로 미소와 서울.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서울에서 미소는 자신의 취향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과감히 집을 포기한다. 대신 대학 때 함께 밴드를 했던 친구들의 집에서 하룻밤씩 자며 집을 구하기 위한 보증금을 모아보자고 다짐한다. 그렇게 오랜만에 방문한 친구들의 집. 그런데 이 친구들, 집은 있지만 취향은 없다? 살아남기 위해 집과 취향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공간 서울에서 과연 미소는 취향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취향을 잃지 않되 … [Read more...] about 집의 취향과 존엄, 영화 〈소공녀〉
넷플릭스의 〈빨간 머리 앤〉이 가진 따스한 시선과 뚜렷한 한계
Anne with an Equality 넷플릭스 <빨간 머리 앤>의 영어 원제는 <Anne with an E>다. 영어 원제(<anne of the greengable>)와 다른 제목을 사용했다. 나는 이 제목을 지금까지 대중문화에서 묘사된 앤과 차별점을 두겠다는 선언으로 읽고 싶다. 실제로 넷플릭스의 앤은 달랐다. 수줍어하지 않고 특별함을 드러내는 소녀라는 점에서 '비호감'이었고 "여자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며 주장하는 당대의 페미니스트였으며 동성애자, … [Read more...] about 넷플릭스의 〈빨간 머리 앤〉이 가진 따스한 시선과 뚜렷한 한계
가족,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사이코지만 괜찮아〉
※ 드라마의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문영의 아버지(이얼 분)는 오랫동안 치매를 앓으며 정신병원에 입원되어 있지만 고문영(서예지 분)은 그를 한 번도 찾아가지 않는다. 보다 못한 병원장이 '아버지 산책시키기'를 처방할 정도지만 문영은 아버지를 절대 산책시키지 않는다. 드라마는 이런 문영의 행동을 판단의 시각에서 재단하지 않는다. 대신 문영의 과거를 밝힘으로써 문영이 그럴 수밖에 없는 맥락을 밝힌다. 문영의 아버지는 12살의 어린 고문영에게 폭력을 가한 적이 있다. … [Read more...] about 가족,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사이코지만 괜찮아〉
채드윅 보즈먼을 추모하며: 그의 흑인영화 다시 읽기
어느 비 오는 날, 영화배우 채드윅 보즈먼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사망 소식을 믿을 수 없어 자꾸만 검색을 해보다가, 그의 죽음이 돌이킬 수 없는 사실임에 허망해하다가, 이윽고 최근 그의 외모가 날이 갈수록 수척해졌음이 떠올랐다. 그는 세상에 알리지 않은 채 자신만의 싸움을 하며 영화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며칠간 다시 볼 수 없는 채드윅을 그의 영화를 통해 다시 만났다. 채드윅의 필모그래피는 흑인 인권의 고민을 담은 영화들이 주를 이루었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세상에 나온 순서대로 인종차별 … [Read more...] about 채드윅 보즈먼을 추모하며: 그의 흑인영화 다시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