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오래 사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정확히는 살아 있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그리고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들킬세라 눈치를 본다. 행여나 주변 가족들이 할머니를 두고 ‘너무 오래 살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다’라고 생각할까 봐, 자꾸만 먼저 선수를 친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챙피스럽다.
빨리 죽어야지, 너무 오래 살았어.
할머니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할머니가 오래 사는 것을 민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우리의 답은 늘 정해져 있다.
할머니가 오래 살아서 우리는 좋지 뭐.
하지만 우리도 사람이기에 할머니의 답정너 질문에 짜증을 내며 “아, 그런 말 하지 마 진짜”하고 짜증을 내기도 한다. 여느 날도 안부를 묻듯이 익숙한 답정너 대화를 반복하다가 그날에서야 문득 할머니가 ‘살아 있음’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둘만 남아 머리를 맞대고 잠이 들던 밤, 할머니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할머니, 오래 사는 게 부끄러워?
창피하지, 뭐….
어떤 계기가 있었어? 아니면 할머니 주변 할머니들이 그런 얘기를 막 해?
내 얘기 들어 봐봐. 어느 날은 내가 노인정 앞에 앉아 있었어. 근데 당동 할매가 보행기를 끌고 걸어가는 거여. 그르니까 옆에 있는 망초이(할머니 친구의 별명)가 막 이러더라구. ‘저것 좀 봐. 한 번도 쉬지도 않고 올라간다야’.
당동이란 마을은 할머니가 자주 가는 노인정으로부터 약 2km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올해 89세인 나의 할머니가 ‘할머니’라고 부를 정도면 나이가 아주 많으신 할머니인데, 그 할머니가 긴 거리를 걸어가면서 힘들어하지도 않는다고, 늙은 사람이 죽지도 않고 저렇게나 정정하다고 옆에서 흉을 보았다는 것이다.
나는 할머니를 보며 ‘노인으로서의 소수자성’을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노인 혐오’를 내면화하고 만 노인을 목격한다. ‘노인은 냄새난다’, ‘노인은 오래 살아 젊은 사람들에게 민폐다(당장 교과서의 저출산 담론도 이런 혐오를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날카로운 말이 부유하는 사회에서 노인은 ‘살아 있는 자신’을 혐오한다.
여성 혐오를 내면화한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과 달리 자신은 ‘명품백을 욕망하지 않고 남자 친구와도 더치페이한다’며 선을 긋는다. 그럼으로써 혐오의 대상이 되는 범주에서 자신만을 제외하려고 노력한다. 할머니도 마찬가지로 다른 노인들과 자신 사이의 선을 긋는다.
다른 노인들은 한 달에 한 번 씻는다더라 어휴 더러워. 어떻게 그럴 때까지 참는지?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목욕을 해. 항상 한다구.
할머니는 오래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뿐 아니라, 자신에게서 냄새가 날까 봐 강박적으로 씻는다. 우리가 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자신이 다른 노인들과 달리 얼마나 자주 씻는지 강조하고 혹시 자신에게서 냄새가 날까 봐 스킨십을 거부한다(하지만 그러게 거부하다 우리가 억지로 뽀뽀하면 되게 좋아해 한다).
할머니를 껴안거나 입을 맞추려고 할 때마다, ‘아이고, 할머이 냄새나!’ 하고 거부한다. 그럴 때면 산뜻하게 그 말을 무시하고 ‘냄새 같은 거 하나도 안 나!’ 하며 의도적으로 온 얼굴에 뽀뽀를 퍼붓는다. 할머니가 듣고 싶은 말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더이상 할머니의 생각을 교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아무리 가까운 관계의 할머니라도 타인의 마음은 교정할 수 없거니와 할머니의 마음을 돌리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대신 할머니한테 진심을 꼭꼭 담아 이렇게 말하곤 한다.
할머니, 오래 살아줘서 고마워. 게다가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줘서 진짜 진짜 고마워. 할머니가 이렇게 오래 살아줘서 우리가 할머니 볼 수 있잖아. 고마워.
원문: 레인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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