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이 기차에 서서 가는 까닭」이라는 기사를 읽고 아차 싶은 마음이 가슴 한 구석을 찔렀다. 서울에 살 적에, 명절만 되면 나는 기차표를 구하기 위해 부지런히 예매 사이트에서 ‘새로고침’을 누르기 바빴다. 혼자 가면 되는 일이었고 그런 식으로 하다 보면 언젠가 표는 생기기 마련이어서, 한번도 고향에 서서 간다든지 가지 못했던 적은 없었다. 나는 명절 ‘기차표’ 구하는 일에 일종의 자부심마저 갖고 있었다.
명절이 되기 한달전쯤, 인터넷에서는 일제히 ‘명절 예매 기간’이 열린다. 이 기간을 놓치면 사실상 위와 같은 방법이 아니고서는 기차표를 구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이 기간에조차 원하는 시간대에 예매를 하기 위해서는, 새벽같이 일어나 부지런히 예매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대학생이었던 나도 예매를 놓칠 때가 많았으니, 스마트폰은커녕 인터넷에도 익숙지 않은 세대에게 기차표 구하기란 불가능과 다름 없을 것이다.
자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노인들은 자녀가 표를 대신 구해주는 일도 있을 것이다. 명절이 주로 자식들이 노부모를 찾아가는 형태를 이루고 있지만, 당연히 노인들의 수요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그 기간 ‘기차를 탈 수 있는 권리’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해결책은 오로지 ‘가족’에 맡겨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문제 해결 방편인 가족주의는 여기에도 등장한다. 가족이 알아서 하라, 가족이 해결하라, 가족의 도움으로 버티라는 지상명제가 그대로 반영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서 가족은 사회가 보장하지 못하는, 사회가 버려놓은, 사회가 방치해놓고 방기해놓은 영역들을 치워내는 쓰레기차 같은 영역이다. 교육은 부모의 재력에 의해 좌우되고, 육아는 부모의 여유에 의해 결정된다. 노인들의 생존과 생계 또한 가족들에게 맡겨져 있다. 사실상 가족이 버티고 있지 않으면 제대로 된 사회의 보호들, 법적 방어수단들,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반들조차 얻을 수 없다.
가족이 보호해주고 책임질 수 없는 경우에, 그는 사회에 노출된다. 그런데 가족의 울타리 없는 우리 사회란, 야생과 하등 다를 게 없다. 나는 서른이 넘었지만, 여전히 부모님으로부터 육아와 같은 측면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동네에 하나 있는 육아지원센터는 한참 떨어져 있어서, 아이를 쉽게 맡길 수도 없고, 미리 예약을 해야 하는데 예약은 일찌감치 다 차버린다. 내가 알기로 이 대도시 전체에서 그런 육아지원센터는 10곳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나마 가족주의와 집단주의가 위용을 발휘하던 시대도 지나, 가족이란 그 힘을 점점 상실해가고 있다. 가족이 주는 순기능은 사라지고, 가족 내에서 온통 트라우마를 입고 쫓겨난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또다른 야생을 만들고, 가족의 해체는 흔히 볼 수 있는 게 되었다.
그런데도 사회는 가족을 대체할 만한 방책을 거의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 가족은 붕괴되어 가고 있는데, 사회는 여전히 온갖 책임을 가족에게만 떠넘기고 있다. 각자도생이라지만, 각가도생이라는 게 우리 사회에 더 적절한 말일 것이다. 개인주의와 사회적 책임의식은 흉내만 내고 있을 뿐이다.
당장 약자들을 위한 전방위적이고 적극적인 보호들이 필요하다. 그 다음에는 기존의 가족이 모든 걸 떠맡던 구조를 완화하고 사회가 나서서 더 많은 것들을 책임져줄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흔히 말하는 흙수저나 금수저에 따라 모든 게 결정되는 생애주기와 라이프스타일의 문제도 결코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사회가 먼저 안전한 곳이 되어야 한다. 사회가 하나의 집이 되어주어야 한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