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은 묻는다.
왕은 궁녀를 사랑했다. 궁녀는 왕을 사랑했을까?
출발은 정조의 어제비문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가장 완벽한 왕이 남긴 비통의 말, 어떤 왕도 남기지 않았던 말,
사랑한다.
참으로 속이 탄다.
네가 죽고 나서 나와 헤어졌다.
나는 비로소 너의 죽음을 깨달았다.
- 정조의 어제비문 중
가장 완벽한 왕이 유일하게 사랑한 여인, 성덕임. 왕은 궁녀를 사랑했다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러나 장옥정과 함께 유일하게 자신의 이름을 남긴 여성임에도, 성덕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덕임이 인간 이산을 사랑했는지 여부를 알 수 없다.
이 ‘알 수 없음’의 공백에 작가는 이야기를 채워 넣었다. ‘그 궁녀는 왕을 사랑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읽다 보면, 덕임이 산을 사랑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철저하게 남성중심적인, 게다가 그 남성이 왕인 공간에서 인간 성덕임은 ‘선택하는 삶’을 제한당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간 성덕임을 ‘선택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으로 숨을 불어 넣었다. 후궁의 비단옷이 아닌, 나인의 낡고 낡은 옷을 입더라도 자주적인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하는 사람으로 빚어냈다. 그러니 우리는 또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궁녀는 왕을 사랑했을까?
덕임은 단 한 순간도 왕을, 산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산의 사랑한다는 고백에도 언제나 답을 얼버무리고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을 때도 자신이 아닌 여성 친구들을 찾는다. 결국 왕의 사랑한다는 고백에 끝내 답하지 않는다. 이것은 가장 완벽한 왕 이산의 마지막 상처가 되고 만다.
마지막의 마지막이 지나간 지금까지도, 그 사람이 가장 소중히 여겼던 세상에는 끝내 끼어들지 못했다는 패배감이 들었다.
- <옷소매 붉은 끝동> 원작 중
오랜 시간이 흘러도 덕임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외면할 수 없었던 이산은 덕임의 유품을 찾는다. 그리고 그때 덕임의 친우 경희는 진실을 말해준다. 덕임은 자신의 진심을 몰랐을 뿐이라고.
자가께서는 단지 모르셨을 뿐이옵니다.”
“무엇을?”
“스스로의 진심을요. 어쩌면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척하셨을 수도 있구요.”
- <옷소매 붉은 끝동> 원작 중
이 점에서 나는 소설 속 덕임이 이산을 사랑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덕임은 이산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몰랐을까. 아니 왜 모른 체 해야 했을까? 나는 이산의 사랑 방식에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덕임은 선택하는 삶을 살고자 한 여인이었다. 이산은 한 여인만을 사랑할 수 없는 군주였다. 그렇게 덕임은 이산의 청혼을 두 번씩이나 거절하며 후궁의 자리로터 도망친다. 그러나 결국 세 번째 청혼에 이르렀을 때, 산은 왕의 힘으로 덕임을 취한다. 그리고 후궁이 된 덕임은 더 이상 선택하는 삶을 살 수 없게 된다.
자신이 어떤 딸이었고 어떤 궁인이었는지는 상관없다. 왕을 사랑했는지 안 했는지도 상관없다. 오로지 왕에게 얼마나 사랑받았는지가 생애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것이다.
애초에 존재 이유가 그 정도였다는 듯이.
- <옷소매 붉은 끝동> 원작 중-
여기서 덕임은 두 가지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 나는 경희의 말을 빌어 덕임이 자신의 마음을 모른 체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산을 사랑하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산이 덕임을 사랑하는 방식을 인정하는 것이 되므로.
산이 덕임을 사랑한 방식은 덕임이 살고자 한 삶이 아니었다. 그저 옆에 있으라 했다. 총애받는 잉첩이라는 티가 나지 않도록 숨소리도 내지 말라고 했다. 그저 완벽한 왕의 궁궐의 일부가 되라고 강요 받아야 했다. ‘선택하는 삶’이란 작고도 드넓은 꿈을 꿨던 새는 가장 호화로운 새장에 갇히고 말았다.
가슴이 아팠다. 한 번도 그 사람에게 잘해준 적이 없었다. 날 사랑하든 말든 옆에 있으라고 강요했다. 네 주제를 알라고 억눌렀다. 아이를 가졌을 때조차 투정은커녕 눈치나 보게 만들었다. 후궁은 임금밖에 기댈 구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야멸차게 굴었다.
- <옷소매 붉은 끝동> 원작 중
그렇기에 덕임은 죽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조차 사랑한다는 말을 끝내 하지 못한다.
깨달음은 어쩔 수 없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온다. 산은 덕임을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늘 존재했다. 남성이었으며, 지아비였으며, 왕이었다.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존재하기에 산은 덕임을 굳이 이해하지 않는다. 그저 끝까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은 덕임을 원망하고 상처받을 뿐이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결국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산은 덕임을 끝내 이해하고 만다.
왜 마지막 순간에 이 옷을 찾았을까
헤어질 땐 경황이 없어 묻지 못했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추억하며 떠나고 싶었던 걸까. 임금의 품에 안긴 것을 후회하였던 걸까. 수많은 가설이 가능했지만 왕은 생각했다.
스스로 선택한 삶을 기억하고 싶었던 거라고.
- <옷소매 붉은 끝동> 원작 중-
원문: 레인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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