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우리 사회에는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정서가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은 듯하다. 그것은 “일단 나라도 살고 보자.”라는 정서이다. 사실상 이 정서가 너무 강렬해져서, 사회나 문화에 존재하는 다른 가치들은 전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생존이 너무나 중요해진 나머지, 그 밖의 모든 것은 부수적이 된 것이다.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매슬로우의 욕구 이론에서 생존은 대략 1, 2단계 정도에 위치한다. 이 단계를 넘어서고 나면, 사랑과 소속, 존중과 인정, 아름다움과 가치 등 자기실현의 5단계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정서는 1, 2단계에 머무르면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생존의 불안과 공포에 잠식당해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는 흔히 말하는 상류 계층이라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다. 당장 1억을 버는 사람도, 지금 많이 벌어두지 않으면 나중에는 연금이 고갈되고 나라의 경제가 위축되고 원화 가치가 폭락해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있다. 당장 10억짜리 아파트를 가진 사람도 언제 부동산 시장이 변동되어 자산이 빚이 될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을 느낀다.
경제적 어려움을 현실적으로 겪고 있거나, 구직 단계에 있는 청년은 말할 것도 없다. 사회 전체가 모종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청년들은 이제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키우지 않는데, 핵심은 생존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게 불가능해졌다는 데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불안한데,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건 불안이라는 폭탄을 만들어 안고 뛰는 정신 나간 일처럼 느껴질 것이다. 안정적인 주거나 직장, 벌이도 문제이지만, 그 이전에 사회 ‘자체’에 대한 안정감이 궁극적으로 상실된 것처럼 보인다.
사회나 경제가 성장할 거라는 기대도 없고, 그렇다고 저성장 속에서 구성원이 보다 평등하거나 동등해지리라는 기대는 더욱 없다. 나는 우리 시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생각이 무엇인지 거의 알 것 같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점점 더 불균형해지고, 격차는 심각해지며, 모두가 함께 잘사는 사회가 아닌 살얼음판 속에서 몇몇만 간신히 살아남는 사회로 이동하고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 속에서 나라도,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그런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다. 전국의 사람들이 고향을 버리고 수도권으로, 서울로, 그중에서도 강남으로 모여드는 것. 장기간 미취업 상태를 유지해서라도 소수의 안정적이거나 고소득 직장으로만 몰려드는 것. 인문학 등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돈 버는 일에 대한 콘텐츠로 관심이 집중되는 것.
결혼하지 않는 것,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것, 사교육 경쟁이 극심해지는 것,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손 내밀지 않는 것, 그 모든 것들이 이른바 “일단 나라도 살고 보자”는 사고관이 확고해진 사회를 지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무의식적인 공포에 잠식된 이런 사회에서, 그런 공포와 맞서 싸울 정도로 강한 심지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고 느낀다. 사회를 어떻게든 재건하고, 제도를 혁명적으로 바꾸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사실 내게도 그것은 거의 요원한 일처럼만 생각된다.
그보다 삶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이 초조와 공포에 ‘잠식’당하지 않는 길을 찾는 것이다. 희망을 보고, 씩씩하게 자기의 대지를 갈고, 오늘도 달리며 햇빛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고 느낀다. 그들로부터 배워, 나도 나의 정원을 가꿀 줄 알아야 한다.
팽배해진 불안감, 언제 벼락 맞고 나락으로 갈지 모른다는 초조함, 내가 딛고 있는 땅에 언제 싱크홀이 생기고, 내가 타고 있는 배가 언제 침몰할지 모른다는 그 불확실성의 그 감각을 다스려야만 한다. 삶에 햇빛을 불러들이고, 내일 지구가 온난화로 멸망하더라도 오늘의 사랑을 다질 줄 아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나로서는 그것이 이 시대를 건너 보다 온전한 삶을 살아가고, 나아가 조금씩 사회를 이 땅에 다시 돌려놓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라고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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