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에 일종의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상당수가 소비와 관련되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과거에 저주를 내리는 존재가 악령이나 마녀였다면, 우리 시대에는 소비가 저주를 내린다.
가령 <결혼 지옥> 같은 프로그램만 보더라도, 부부의 상당수는 소비습관 문제로 파국으로 흐른다. 현대인은 소비의 문제에서 면역력을 기르지 못하면, 거의 파멸에 다가간다.
당장 눈앞의 쾌락에 눈이 멀어 카드를 긁어대다 보면 그다음에는 리볼빙과 카드론의 늪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소비수준을 줄이는 것은 때로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어서, 좀처럼 해내지 못하는 경우들이 적지 않다. 소비수준을 줄이는 것이 너무도 비참하여 죽고 싶을 정도의 우울증을 불러일으키도록, 현대인은 어떤 매커니즘에 종속되어 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적당히 요리하는 습관을 들이면 배달 음식 등을 줄일 수 있고, 그러면 소비 습관은 물론이고 건강까지 상당히 개선된다. 그러나 그런 습관을 들이는 귀찮음은 일종의 죽음의 공포나 견딜 수 없는 비참함과 미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소비수준을 유지하지 못할 때 우리는 죽고 싶도록 세팅되어 있다. 귀찮음은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의 문제다.
마약을 제외하고, 현존하는 중독 문제 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는 ‘도박 중독’이 손꼽힌다. 도박에 빠진 사람에게는 친지도 가족도 의미 없고, 손목을 잘라도 소용없다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한 뇌생리학적인 접근도 가능하지만, 그 이전에 생각해 볼 것은 도박이 벌어들이는 ‘돈’에 관한 것이다.
돈이 아무 쓸모 없는 종이 쪼가리라면 인간이 그렇게 도박에 빠질 리는 없다. 문제는 돈에 인간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환상의 구조다.
돈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준다는 환상의 정점에 존재한다. 인간이 얻을 수 있는 모든 쾌락이나 기쁨은 돈 속에 담겨 있다고 믿어진다.
돈을 다른 말로 하면, 소비다. 우리는 소비를 통해 세상의 모든 쾌락에 접근한다. 소비의 연쇄는 공중에서 떨어지면 박살나버리는 헬리콥터처럼 우리를 끌어당긴다. 소비가 ‘모든 것’을 준다면, 소비가 멈출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을 것처럼 느낀다. 그래서 소비는 죽음의 공포와 이어져 있는 것이다.
온 인류가 ‘돈’에 생존의 기반이 되는 것들을 거의 다 걸어둔 이상, 돈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돈에 모든 것을 걸어버린 순간, 그것은 생존의 기반이면서 동시에 저주가 되었다. 많은 신화나 이야기는 우리가 ‘절대반지’ 같은 무언가를 소유하면 파멸에 이른다는 서사를 공유한다. 절대반지는 모든 것인 동시에 저주이기도 하다. 소비와 적절히 맞서 싸우지 않으면, 인간은 저주 속에서 병들어버리고 만다.
적절히 소비하되 스스로 만드는 쾌락의 영역을 넓히면서, 소비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는 영역을 늘려가는 것이 매해 나의 목표라면 목표다. 비싼 소비적인 놀이가 아니라 우리들만 아는 창조적인 놀이를 만들어낼 것. 몇 권의 책이나 백지에 글을 쓰는 일만으로도 무인도에서 행복하게 살아낼 정도의 마음을 지켜낼 것. 나의 몸을 눕혀놓고 얻는 쾌락보다는 나의 몸을 직접 움직여서 얻는 쾌감을 알아갈 것.
돈이나 소비에 미쳐버리기보다는, 그것들이 적절하게 나의 삶에 기여하도록 통제권을 잃지 않을 것. 돈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결코 믿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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