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의 일이다. 당시 나는 도쿄 올림픽 개최 기간과 코로나19 시국이 겹친 8월에 일본 주재원 발령을 받게 되었다. 거의 하루가 꼬박 걸려 무사히 도쿄에 입성했다.
1. 두근♥두근 도쿄 도심 호텔 레지던스 입성기
한국에 있을 때 (작은 원룸 방이긴 하지만) 서울숲 근처에 살면서 한강이 얼마나 삶의 질을 윤택하게 해 주는지 깨달은 나는, 일본에서 임시로 묵을 호텔을 구할 때도 주변에 공원이나 강이 있는 곳을 위주로 찾았다. 도심에 위치한 호텔 중 주변에 넓은 공원을 끼고 있는 호텔을 발견했고, 망설임 없이 바로 그곳으로 결정했다.
내가 묵을 호텔은 일본의 핫플레이스 중 하나인 ‘아오야마(青山)’에 위치한 호텔 레지던스였다.
오모테산도~아오야마 일대는 한국으로 치면 청담이나 압구정 같은 동네로 비유할 수 있다. 도쿄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곳 중 하나로, 주변에는 세련된 카페나 명품 샵이 즐비하다. 도심 한복판의, 넓은 공원까지 낀 호텔에 묵을 생각에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실제로 호텔 외관도 좋았다. 주변에 예쁜 가게도 많았고,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도 굉장히 세련되어 보였다.
체크인도 순조로웠고, 직원들도 친절했다. 나는 빠르게 내가 묵을 방으로 안내받았다. 그렇게 들어간 방은 기대 이상이었다.
한국 아파트처럼 넓은 공간은 아니더라도, 원룸을 벗어난 적 없는 자취생으로서 이런 방에서 한 달만이라도 살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덕분에 방에 들어오자마자 사진을 몇 장씩 찍었고, 가족과 남자친구에게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바깥 풍경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기대하며 블라인드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런데, 블라인드를 여는 순간 다른 의미로 입이 떡 벌어졌다.
2. 들어는 보셨나요? ‘묘지 뷰’라고…
……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황급히 블라인드를 닫았다. 그러다 떨리는 손으로 다시 열어 보았다.
비석 같은 게 많이 보이는데, 역사 기념관 같은 건가? 그런데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는 비석을 저렇게 많이 세워두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분명 넓은 공원이 있는 줄 알았는데. 다시 한번 구글 맵을 켜서 확인해보기로 했다. 호텔을 예약할 때에는 보이지 않았던 호텔 옆 넓은 공원의 명칭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Aoyama Cemetery(青山霊園)
영혼들의 공원(영원)
내가 공원이라고 생각했던 그곳은 ‘영혼’들의 공원이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차가 없으면 가기도 힘든 공동묘지가, 일본에는 도쿄의 도심 한복판에 밀집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도쿄에서 땅값이 제일 비싼 미나토구 도심 한복판에 말이다. 충격이었다. 넓은 공원에서 조깅할 생각에 잔뜩 기대했는데, 도저히 저곳에서 영혼들과 함께 조깅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밤에 잠이나 잘 수 있을까.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도쿄에서 10년 가까이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친구한테 연락해서 도심지에 공동묘지가 몰려 있는 이유를 물어봤다. 친구는 대수롭지 않은 듯 웃으면서 설명해 줬다.
3. 얼떨결에 알게 된, 일본의 신기한 납골당 문화
친구의 말에 따르면, 일본 사람들은 공동묘지를 보고 무섭다거나 불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랫동안 조상신을 모셔 온 일본 사람들에게 공동묘지란 무섭고 으스스한 곳이 아니라, 자신들을 지켜주는 조상신들이 계신 자리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심지에 있는 납골당은 ‘부의 상징’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그래서 돈이 정말 많은 사람들만 묻힐 수 있다고. 실제로 2021년도 일본 도쿄도의 납골당 평균 비용은 92만 엔으로, 한화 약 1,000만 원에 육박한다.
2021년도 일본 수도권 납골당 평균비용 /출처: Life
실제로도 구글에 일본어로 ‘도심 묘지(都心 お墓)’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매우 흥미로운 검색 결과가 주르륵 나온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검색 광고다. 호기심이 생겨서, 실제로 키워드를 몇 개만 바꿔 보기로 했다.
단어 몇 개 바꿨을 뿐인데, 도심에 위치한 고급 주택 부동산 매물 광고라고 봐도 전혀 손색이 없다! (참고로 롯폰기 힐즈나 아자부 주반이면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도쿄 안에서도 최고로 비싼 동네다)
실제로 일본 도심 주요 지역의 최신 빌딩형 납골당의 경우 200만 엔(한화 약 2,200만 원)에 육박하는 비용을 지불해야 들어갈 수 있고, 경쟁도 매우 치열하다고 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도쿄 도심 납골당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일본 사람들의 마음이 서울 도심 아파트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한국 사람들의 마음과도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3. 그래서 ‘묘지 뷰’ 호텔 후기는 어떻다고?
일본 사람들은 공동묘지를 무서운 곳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낮에는 괜찮다 쳐도 담력이 약해서 잠이나 잘 수 있을지, 꿈에 뭔가 나오는 건 아닐지 별의별 걱정을 다 했다. 그렇게 체크인했던 첫날 밤에는 창문의 블라인드를 전부 닫고 덜덜 떨면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정말 꿀잠을 잤다.^^; 일본 조상신들이 한국인인 나도 지켜주는 건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게 나는 1달 간의 주재원 생활을 무난하게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가 보다.
그래도 혹시 아무것도 모르고 호텔의 ‘묘지 뷰’를 맞이한 사람들이 너무 놀라지 않기를 빌며, 이 글을 마친다.
원문: Moonlighter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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