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부동산에 아예 관심이 없던 나였는데, 서울에서 직장 잡고 봉천동에서 4평 원룸 살이를 하며 처음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에 오기 직전에는 서울숲 근처의 원룸에 살았는데, 산책을 갈 때마다 초고층 아파트를 보며 ‘저런 곳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곤 했다.
주재원 발령을 받고 도쿄행 비행기를 타기 전날 밤, 마지막으로 혼자 서울숲을 거닐며 서울숲의 랜드마크, 4대 천왕을 바라보았다. 반드시 5~10년 안에 성공해서 저곳에 입성하리라 다짐했다.
도쿄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한 달 동안은 호텔 레지던스에서 지낼 예정이지만, 8월 말에는 집을 구해서 나가야 한다.
처음에는 내가 살던 원룸보다 넓은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하던가. 역까지의 거리, 주변 환경, 입지, 조망권, 집 방향, 층수까지 점점 희망 조건이 늘어났다. 그동안 원룸 살이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쌓였던 울분이 폭발했나 보다.
이왕이면 일본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부자 동네에 살고 싶어졌다. 살기 좋은 동네를 찾다 보니 자연스레(?) 도쿄의 부동산 시장 조사로 이어지게 되었다. 다음은 그 조사 결과다.
1. 도쿄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도심 3구
도쿄는 총 23개의 특별구(区)와 서쪽 외곽지역에 위치한 26개의 시(市), 그리고 그 외 몇 개의 작은 마을(村)과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보통 서울과 도쿄의 부동산을 비교할 때 서울의 25개 자치구와 주로 비교되는 곳이 도쿄 23구다.
출처 : https://ilsc.tokyo/support_city.html 에서 구글 한국어 번역
도쿄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곳은 도쿄 23구의 중심부에 위치한 치요다구(千代田区), 츄오구(中央区), 미나토구(港区)다. 이 세 개의 구를 ‘도심 3구’라고 부른다.
우선 주택지 공시 가격(公示地価)이 가장 높은 지역을 살펴보면 1위부터 9위까지 전부 치요다구와 미나토구가 차지하고 있다.
공시 가격: 일본 국토교통성의 토지감정위원회가 정한 1㎡당 토지 가격으로, 일반적으로 토지거래나 상속세 및 고정자산세 평가, 금융기관의 담보평가, 기업이 보유한 토지의 시가평가의 기준 및 지표로 활용된다.
1위는 도쿄 미나토구 아카사카로 공시 가격(1㎡당 토지 가격)이 484만 엔(한화 약 5천만 원)이다. 평당 가격으로 계산하면 1평당 1,600만 엔(한화 약 1억 6,600만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일본도 역시 땅값이 장난이 아니다.
다음으로 상업지 공시 가격(公示地価)이 가장 높은 지역을 살펴보면 상위 1위부터 4위까지가 긴자가 있는 츄오구에 위치해있으며, 5위가 치요다구에 위치해 있다.
1위는 도쿄 츄오구 긴자 4쵸메에 위치한 야마노 악기(山野楽器) 건물로
1㎡당 토지 가격이 무려 5,360만 엔(한화 약 5억 5,700만 원)에 달한다. 평당 가격으로 계산하면 1평당 1억 7,688억 엔(한화 약 18억 4천만 원)이다.
악기 파는 곳이 평당 18억 원이 넘다니, 도대체 어떤 악기를 파는 곳일까. 충격적이다. 혹시 내가 잘못 계산한 거라면 부디 알려주시기 바란다. 그럼 도쿄 도심 3구(치요다구, 츄오구, 미나토구)는 도대체 어떤 곳일까?
2. 도쿄 도심 3구 각각의 특징
- 1) 치요다구(千代田区)
치요다구(千代田区)는 일본의 황궁, 국회의사당, 주요 정부 부처와 언론사들이 위치한 곳으로 일본 경제와 정치의 중심지다. 서울로 치면 중구 같은 곳으로, 대기업 및 공공기관 오피스 빌딩이 밀집되어 있다. 이 빌딩 숲 지역을 ‘마루노우치(丸ノ内)’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마루노우치 오피스가에서 근무하는 사무직 여성을 ‘마루노우치 OL(Office Lady)’이라고 부른다. 이 마루노우치 OL은 뭇 여성 취준생들의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치요다구는 도심지이기 때문에 서울 중구처럼 유동 인구는 많지만, 실질적인 거주 인구는 적어서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곳이다. 사람이 사는 동네라기보단 돈 벌러 가는 동네라고 볼 수 있다.
- 2) 츄오구(中央区)
츄오구(中央区)는 고급 백화점과 명품관 등이 밀집된 긴자, 니혼바시가 위치한 지역으로 핵심 상권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일본은행 본점, 도쿄 증권거래소 등이 위치해 있으며, 치요다구와 더불어 도쿄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한다.
참고로 츄오구는 꾸준히 인구가 증가하고 있어 일본에서 부동산 투자로 매력적인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츄오구는 예전부터 인구를 늘리기 위한 대책으로 고층 맨션을 많이 지어 공급 세대수를 늘려왔다. 공급이 증가하자 집값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었다. 그 결과 1997년까지만 해도 7만 명에 불과했던 츄오구 인구가 2021년 올해 17만 명으로 약 2.4배 이상 증가했다.
인구의 증가는 수요의 증가를 의미하며, 이는 곧 집값 상승을 의미한다. 실제로 츄오구는 현재 일본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고 있는 지역 중 하나다. 전통적으로 돈 많은 일본 부자들이 선호하는 동네는 아니지만, 일단 워낙 교통 입지와 상권이 좋다 보니 꾸준히 수요가 있는 동네다.
- 3) 미나토구(港区)
미나토구(港区)의 주요 지역으로는 아카사카, 아오야마, 롯폰기 등이 있다. 약 48개의 외국 대사관이 몰려 있으며 IT 대기업, 언론사, 외국계 기업의 일본지사가 위치해 있어 역시 일본 경제의 중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일본에는 경제 중심지가 참 많다).
TV 방송국이 밀집되어 있고 고급 고층 맨션이 많아 연예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로도 유명하다. 도쿄의 상징 도쿄 타워와 롯폰기 힐즈가 있는 동네가 바로 이 동네다. 대사관과 외국계 기업이 많다 보니, 외국인 거주자가 미나토구 전체 인구의 약 10%를 차지한다.
굉장히 특징적인 점은 미나토구에 무려 100개가 넘는 공동묘지(납골당)가 집중적으로 몰려있다는 것이다. 구글 맵에 ‘도쿄 묘지(東京墓地)’라고 검색해보면 특정 지역에 묘지 아이콘이 집중되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미나토구라고 생각하면 된다(왜 도심에 묘지가 집중되어 있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지난 포스팅을 참조 바란다).
3. 일본의 부자들이 모여사는 동네
그렇다면 도쿄 도심 3구(치요다구, 츄오구, 미나토구) 중에서도 돈 많은 일본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동네는 어디일까? 지극히 속세에 찌든 질문이긴 하지만 궁금해서, 도쿄 23구 주민의 연평균 소득 통계를 찾아봤다.
위의 통계 자료를 보면, 미나토구(港区)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의 연평균 소득이 1,163만 엔(한화 약 1억 2천만 원)으로 당당히 소득 랭킹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평균 소득이 1억 원이 넘는다니 상위 소득의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를 번다는 거냐.
같은 도쿄 23 구내에서도 소득 격차가 상당한데, 소득 1순위인 미나토구(港区)와 23순위인 아다치구(足立区)는 평균 연소득이 무려 816만 엔(한화 약 8,500만 원)이나 차이가 난다.
일본에서 가장 높은 평균소득을 자랑하는 이분들은 주로 미나토구에 위치한 고급 주택이나 타워맨션(초고층 고급 맨션)에 거주하고 있다. 일본 부자들이 많이 사는 대표적인 부자 동네로는 시로가네(白金), 아자부 주방(麻布十番) 등을 꼽을 수 있다.
실제로 가보면 긴자나 마루노우치처럼 화려하지는 않다. 다만 고급 편집숍, 명품숍, 예쁜 카페, 레스토랑, 고급 식료품점, 뭘 파는지는 모르겠지만 세련되게 꾸며놓은 가게가 많다. 전체적으로 고즈넉하고 일본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나는 동네다.
내가 현재 묵고 있는 아오야마 호텔도 미나토구에 있는데, 주변에 고급 슈퍼밖에 없어서(사과 3개에 8천 원…) 써브웨이랑 편의점만 주야장천 가고 있다.
부자 동네인 만큼 생활 물가도 장난이 아니다.
참고로 이 동네는 8평도 안 되는 작은 원룸 방 월세가 약 13만 엔(한화 약 140만 원)이다. 숨통 좀 트이는 방을 구하려면 최소 월세 200만 원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15평 정도 하는 방은 월세가 300~350만 원에 육박한다.
4. 결론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자’라는 말이 있다. 무리해서 미나토구에 입성했다고 치자. 지금도 호텔 앞 고급 슈퍼에서 사과 하나 살 때도 손을 덜덜 떠는데
동네 슈퍼 물가가 백화점 식료품점보다 비싼 동네에서 3년을 생활한다고 생각해보면… 안 그래도 없는 살림에 돈을 모으긴커녕 쪽박 신세를 면치 못할 게 뻔하다.
무엇보다도 가슴 깊이 품은 서울숲 4대 천왕 입성의 꿈은 영원히 꿈으로만 간직하게 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결론, 부자 동네는 부자가 된 다음에 가는 걸로. 기다려라, 서울숲 4대 천왕!
원문: Moonlighter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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