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0년대 초반,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만 해도 일본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이 지금만큼 좋지는 않았다. 우리나라 미디어에서는 한류 열풍이니 뭐니 신나게 떠들어댔지만, 실제로 내가 만난 일본 사람들의 대부분은 한국에 별 관심이 없었다. 물론 K-POP이나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래서 대학에서 사귄 일본 친구들로부터 한국에 대한 무지함에서 비롯된 무례한 질문들도 꽤 많이 받았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
한국에도 스키장이 있니?”
“한국에도 밥솥이 있니?”
“한국 여자들은 다 성형한다던데 너도 성형한 거야?”
“너는 다케시마가 누구 땅이라고 생각해?”
저런 무례한 질문을 들을 때마다 속에서 천불이 났다. 저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앉아 있을 성격은 못되었기에, 무지함과 무례함을 넘나드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웃으면서 친절하게 팩폭하곤 했다.
한국에도 스키장이 있니?
→ 응, 당연하지! 나는 일본에도 스키장이 있는 줄 몰랐어! 일본 사람들도 스키를 타는구나! 신기하다.
한국에도 밥솥이 있니?
→ 응, 한국 밥솥으로 밥 지으면 완전 맛있어! 너도 한국 여행 갔을 때 기념품으로 하나 사와!^^
한국 여자들은 다 성형한다던데 너도 성형한 거야?
→ 아니, 안 했지만 성형한 얼굴로 봐주다니 기쁜걸? 돈 벌었네! 한국에는 성형 안 해도 예쁜 여자가 많아서 네가 생각한 것만큼 성형한 사람이 많진 않아!
너는 다케시마가 누구 땅이라고 생각해?
→ 아,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구나! 다케시마가 아니라 ‘독도’라고 부르는 거란다. 독도는 한국 고유의 영토야ㅎㅎ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한국과 중국을 제대로 구분조차 못하는 일본인들도 상당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본 대학에서 개발경제학 수업을 들을 때도 한국은 선진국이 아닌 개발도상국 그룹으로 분류되곤 했다. 인복 하나는 타고 난 덕분에 내 주변 일본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가끔씩 한국을 은근 아래로 보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일본 사람을 만날 때면 너무 화가 났다.
이랬기 때문에, 10년 전만 해도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느 정도의 편견과 불편함을 필연적으로 감수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2. 일본은 지금 K-컬처 홀릭?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주재원으로 다시 일본에 와서 살고 있는 지금, 예전에 비해 한국에 대한 인식이 정말 많이 좋아졌음을 몸소 느끼고 있다.
예전에는 한국에 관심도 없던 내 일본 친구들이 최근 한국 드라마에 푹 빠져있다고 고백하고, BTS가 너무 멋있다고 말한다. 미용실에 가서 잡지를 펼치면 한국식 메이크업, 한국식 헤어스타일에 대한 기사가 도배되어 있다. 드럭 스토어에 가면 한국 연예인 사진이 여기저기 걸려 있고, 심지어 지하철 배너 광고에서도 한국 연예인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집 근처 대형 마트에 가면 목 좋은 곳에 한국 음식 코너가 커다랗게 마련되어 있다. 하라주쿠나 신주쿠 같은 도쿄 번화가에 나가면 한국 음식점, 한국식 카페, 한국 화장품 가게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예전엔 일본 친구들이 너저분한 동네라고 가기 꺼렸던 한인타운 신오쿠보도, 요즘 일본 젊은 세대 사이에서 핫플레이스로 등극했다. 신오쿠보에 가면 한국식 술집과 한국 음식점 앞에 길게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일본인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3. 일본에서 떠나는 한국 여행: 일본 속의 한국을 찾아서
K-Pop, 드라마, 영화부터 뷰티, 푸드, 스타일, 술집까지. 지금 일본은 K-컬처 홀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엔터테인먼트·콘텐츠 분야뿐만 아니라 의류, 화장품, 식품, 인테리어까지… 이제는 한류가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서 일본 사람들의 생활 속 일부로 자리 잡은 것 같다.
믿기지 않는가?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한국인 듯 한국 아닌 한국 같은
랜선 일본 여행.
1. K-POP 스타
- 일본 TV 광고에 나오는 자랑스러운 BTS
한국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일본 남사친들도 BTS가 멋있다고 말할 정도로, 일본 내 BTS의 인기는 대단하다. 최근 BTS가 일본에서 발표한 베스트 앨범은 100만 장이 넘게 팔렸다. 외국 가수로서는 대단히 이례적인 기록이다. BTS 사진이나 캐릭터가 붙은 상품은 비싼 가격에도 불티나게 팔리다 보니, 광고업계에서도 러브콜이 쏟아지고 있다.
그나저나 소파에 앉아있는 게 저렇게 멋질 일인가? 나도 자일리톨 껌 씹으러 편의점에 가볼까 싶다. (참고로 일본 사람들은 자일리톨을 ‘키시리토루’라고 발음한답니다)
- 지하철에서 발견한 아이유
출근길 지친 몸을 이끌고 지하철을 탔는데 어쩐지 눈앞이 환하길래 고개를 들었는데, 눈이 마주친 아이유 님. 한국 화장품 브랜드인 모양인데, 해외에서도 직접 모델을 하고 계신다. 암울했던 수험생 시절에 큰 힘이 되어준 아이유 님을 머나먼 타국 지하철에서도 만나다니, 무척 감격스럽더라.
2. 뷰티
- 일본 드럭스토어에서 발견한 트와이스
요즘 일본 드럭스토어에 가면 한국 화장품이 없는 곳을 찾아보기가 더 힘들다. K-뷰티는 어디서나 손쉽게 만나볼 수 있다. 실제로 일본 패션 잡지를 보면 거의 예외 없이 한국식 메이크업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위의 사진에서도 트와이스의 사나와 다현이 직접 어퓨라는 국내 메이크업 브랜드의 광고 모델로 활동하는 걸 볼 수 있다.
- 도쿄 번화가 하라주쿠에 위치한 에뛰드 하우스
명동처럼 보이지만, 전혀 명동이 아니다. 일본의 유명 번화가인 하라주쿠에 크게 자리잡은 매장의 모습이다. 안타깝게도 핑크 알러지가 있어 직접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에뛰드 하우스가 일본에 있는 많은 공주님들의마음을 사로잡았기를 응원한다.
3. 스타일
- 하라주쿠에 위치한 ‘스타일난다’와 ‘레드아이’
홍대처럼 보이지만, 전혀 홍대가 아니다. 역시 번화가인 하라주쿠에 위치한 한국의 유명 패션 브랜드들이다. 의류와 액세서리 역시 일본에 침투해 있는 것이다.
요즘 길거리를 지나다니다 보면 한국식 패션을 장착한 일본 여성분들이 부쩍 늘어났다는 인상을 받는다. 실제로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의 젊은 여성 사이에서 한국식 패션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K-POP 아이돌이나 한국 드라마 등 한류 콘텐츠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4. 푸드
- 일본 돈키호테에 있는 한국 라면 코너
과장을 보태 말하면 한국의 고향 근처 마트보다 종류가 많은 것 같다. 비단 돈키호테뿐 아니라, 일본 편의점과 집 근처 마트 등 어딜 가도 한국 라면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격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10~20% 비싼 수준), 라면은 언제든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 일본 돈키호테에 있는 한국 과자 코너
예전에는 한국 제과 회사들이 일본 과자를 벤치마킹했는데, 이제는 한국 과자가 일본으로 직접 수출되어 제과 코너에서 판매된다. 참고로 내 주변 일본 친구들은 크라운제과의 버터와플을 굉장히 좋아하더라.
- 일본 마트에 진열된 한국 양념들
5년 전만 해도 일본에서 한국 양념을 찾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국제 택배(EMS)로 보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본 마트에서도 쉽게 한국 양념을 찾아볼 수 있다.
위의 사진은 CJ비비고의 해찬들 쌈장과 고추장이다. 일본 마트에 갈 때마다 새삼 비비고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일본어로 쌈장은 ‘싸무쟝’, 고추장은 ‘고츄쟝’이라고 발음한다. 귀엽…)
5. 드링크
- 일본 마트에 진열된 K-음료
한국 음료도 이제는 일본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에서 흔히 보는 옥수수수염차, 보리차부터 시작해서 어린이들의 대통령 뽀로로 음료, 베지밀, 박카스까지 매우 다채롭다. 심지어 ‘쌕쌕’, ‘봉봉’ 같이 한국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추억의 음료까지 팔고 있다.
- 알코올
소주나 막걸리 등 한국표 술도 일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특히 참이슬은 요즘 어딜 가나 판다. 한 병에 약 3천 원 내외로, 가격은 한국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최근 일본에서는 국순당에서 나온 ‘1000억 프리바이오 막걸리’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한 병에 9천 원~1만 원 정도로 가격이 꽤 나가는데도 불티나게 팔린다. 유산균 섭취에 대한 강박이 있는 일본 사람들에게 ‘1000억 마리의 유산균’으로 건강한 이미지를 강하게 어필한 것이 가장 큰 성공 요인으로 보인다.
(물론 맛도 다른 막걸리에 비해 압도적으로 맛있다. 참고로 일본어로 참이슬은 ‘챠미수루’, 막걸리는 ‘막코리’라고 발음합니다ㅎ)
6. 야식의 대명사, 한국식 치킨
코로나19 이후 일본에서도 배달이 대중화되면서 한국식 치킨을 집에서 맛볼 수 있게 됐다. 위의 사진은 일본에서 인기가 많은 ‘크리스피 치킨 & 토마토‘라는 치킨 프랜차이즈다. 한국에는 없는 일본발 프랜차이즈로, 딜리버리 위주의 영업을 전개한다. 맛은 한국 치킨과 거의 똑같은데 튀김옷이 조금 두꺼운 정도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먹는 굽네치킨이나 BBQ치킨 같은 한국 오리지널 치킨 프랜차이즈도 일본에 진출해 있긴 하지만, 일본 사람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주로 한인타운이 위치한 신오쿠보나 신주쿠 근처에 매장이 밀집되어 있다)
일본 사람들은 주로 KFC나 편의점에서 조각 치킨을 사 먹는 것에 익숙하다 보니, 양이 많은 한국식 치킨을 부담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몇 년 전 한국 여행을 온 일본 친구들과 교촌 치킨 한 마리를 시킨 적이 있는데, 양이 너무 많다며 놀라 나자빠지던 귀여운 친구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나를 포함해서 4명이나 됐는데도 말이다.
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식 치킨이 좋다. 가끔 굽네치킨이 너무 먹고 싶어 미쳐버릴 것 같을 때는 집에서 1시간 반이나 걸리는 신오쿠보 굽네치킨 매장까지 찾아가서 먹고 오기도 한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음식 배달을 오토바이가 아닌 자전거로 하기 때문에, 배달 가능 범위가 한국에 비해 상당히 제한적이다.
7. 오늘의 하이라이트, 신오쿠보의 밤거리
여기까지 잘 따라와 주셔서 감사하다.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다. 5년 만에 일본에 와서 가장 놀랐던 점은 한인타운 신오쿠보의 밤거리가 굉장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5년 전만 해도 신오쿠보에 놀러 오는 사람들은 한국인이나 중국인 등 재일 외국인이나, 한국을 정말 좋아하는 소수의 일본 1020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유학 시절, 일본인 친구들한테 신오쿠보에 놀러 가자고 제안했다가 동네가 너저분하고 지저분해서 싫다고 대차게 까인 후로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일본에 없는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5년이 지난 지금 신오쿠보는 일본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완전히 탈바꿈되어 있었다. 얼마 전 방문한 신오쿠보의 밤거리는 흡사 불금의 강남이나 홍대를 방불케 했다. 설명보다 사진으로 보여드리는 게 빠를 것 같다.
백종원 프랜차이즈는 신오쿠보에서도 인기 폭발이다. 홍콩반점 앞에 길게 늘어선 일본인들을 보고 충격받기도 했다. 참고로 한신포차는 2021년 8월에 일본에 처음으로 상륙했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한 한신포차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일본 한신포차의 내부는 홍대 한신포차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다. 즉, 현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신포차 내부는 완전히 만석이었다. 체감상 한국 사람 30%, 일본 사람 70% 정도로 일본인 손님이 훨씬 많은 것 같았다.
오리지널 한국 술집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한신포차에서 일본 청춘남녀들이 술 마시며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니 마치 한국의 젊은 친구들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란 말인가.
나는 일개 한국 사람일 뿐이다. 그럼에도 한국식 문화를 즐기는 일본 사람들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는 말은 팩트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어록을 마지막으로, 한국인 듯 한국 아니 한국 같은 일본 여행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 백범 김구 <나의 소원>중
원문: Moonligher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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