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 3년 간의 연애가 장거리 연애를 시작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갑작스러운 이별에 정신줄을 잡고 있기도 힘든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주를 마지막으로 재택근무도 끝나버려서 월요일부터 매일 사무실 출근을 하게 됐다. 회사에서 이성적인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 밝고 유쾌한 척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거라고 억지로라도 많이 웃을 테니 빨리 다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수요일 오전, 서울 본사에 있을 때도 같은 부서에 근무했던 차장님께서 회사 근처에 쯔케멘이 유명한 곳이 있다며 점심에 같이 가자고 하셨다. 도저히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기에 차장님을 따라 도쿄역 근처 라멘집에 갔다. 주문한 쯔케멘이 등장한 순간 쯔케멘 정도라면 목구멍으로 넘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발은 탱글탱글 쫄깃쫄깃, 국물은 완전 찐하고 걸쭉하니 너무 맛있었다. 걸신들린 듯 숨도 안 쉬고 단숨에 면발을 후루룩 흡입했다. 없던 입맛도 돌게 하는 맛이다. 먹는 순간만큼은 잠시나마 이별의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 설거지가 필요 없을 정도로 그릇을 깨끗이 비운 후, 그제야 차장님과 대화다운 대화를 시작했다. 차장님께서 남자친구랑은 잘 지내고 있냐는 기습 질문을 날리셨다.
…ㅎ
애써 밝게 웃으며 ‘아, 저 최근에 헤어졌어요! 장거리는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봐요.’라고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차장님은 순간 흠칫 놀라셨지만, 더 좋은 남자를 만나면 되니까 너무 슬퍼말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셨다. 남자는 남자로 잊는 거라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루트를 소개해주셨다. 일본 주재원 모임, 도쿄 직장인 단체 미팅, 그리고 회사 근처에 있는 긴자 코리도 거리에 가보라고 말씀하셨다. 특히 긴자 코리도 거리는 금요일 밤 도쿄 직장인 남녀가 몰려드는 만남의 장, ‘헌팅의 성지’라고 한다.
신주쿠나 시부야도 아니고, 긴자에 그런 곳이 있다고? 긴자는 도쿄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동네 중 하나다. 긴자 근처에는 일본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유수의 대기업, 정부 기관, 외국계 기업이 몰려 있다. 물론 가고 싶은 맘은 전혀 없었지만, 일본 경제의 심장부, 도쿄 도심 오피스가에 헌팅의 성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순수한’ 호기심에 코리도 거리에 대해 조사해보기로 했다.
코리도 거리가 ‘헌팅의 성지’로 변모하게 된 역사적 배경
긴자 코리도 거리(銀座コリドー街)는 JR 유라쿠쵸역과 신바시역을 잇는 철길 아래에 있는 음식점 거리다. 고급 이자카야, 세계 각국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 고급 바 등 세련된 가게가 모여 있다. 근처에는 황궁, 재판소, 증권사, 은행 등 각종 정부기관과 대기업이 밀집해 있다.
원래 이곳은 샐러리맨이 퇴근 후 동료들과 함께 저녁을 먹거나 가볍게 한 잔 하러 들리는 고급 식당가였다. 긴자 한복판에 위치한 이 고급스러운 레스토랑 거리가 어쩌다가 헌팅의 성지가 된 걸까?
Scene #1. 2010년대 중반. 도쿄 마루노우치에 위치한 모 대기업 오피스
대기업 직장인 S 씨는 올해로 싱글 3년 차다. 대학 때부터 사귀었던 사람과 헤어진 후 좀처럼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다. 집-회사-집-회사만 반복하다 보니 애초에 새로운 이성을 만날 기회도 없다. 사내에서 찾아보려고 해도 괜찮은 사람들은 이미 다 짝이 있다. 사회인이 돼서 연애를 시작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Scene #2. 긴자 코리도 도리. 금요일 밤 9시경
매일같이 야근에 시달리다가 오늘은 웬일로 상사가 휴가를 내서 오랜만에 일찍 퇴근한 S 씨. 그냥 집에 가긴 아쉬워 직장 동료들과 코리도 거리에 위치한 고급 이자카야에 들렀다. 퇴근 후 동료들과 술한잔 걸치는 게 S 씨 인생의 유일한 낙이다.
취기가 어느 정도 올라왔을 때, 문득 옆 테이블을 보니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여성이 친구들과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다. MBTI가 I로 시작하는 내향형 S 씨는 평소 같았으면 가만히 있었겠지만,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평소에 없던 용기가 갑자기 샘솟는다. 알코올의 힘으로 자신감을 장착한 S 씨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단발머리 그녀가 있는 옆 테이블로 향한다.
※주의: 이 내용은 어디까지나 픽션으로, 실제로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우연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코리도 거리의 역사가 시작됐다
2010년대 중반부터 코리도 거리에 스탠딩 바, 오픈 테라스 바가 생기면서 옆 테이블 손님과 가볍게 교류하기 쉬운 환경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어느새 코리도 거리는 밤이 되면 젊은 직장인 남녀가 모여 함께 술을 마시며 교류하는 만남의 장으로 변모했다.
2016년 7월 닛테레 TV 방송 ‘마츠코 회의’에서 「결혼할 남자를 찾는 여성들 사이에서 긴자 코리도 거리는 ‘일류 샐러리맨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소개된 이후 코리도 거리를 찾는 사람들이 확 늘어났다는 말도 있다.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 밤 코리도 거리에 가면, 샐러리맨과 커리어우먼들이 넘쳐나며 밤 11시가 되면 걷지 못할 정도로 거리가 붐빈다. 차장님의 말에 따르면, 여자들끼리 코리도 거리를 지나가면 남자들이 끊임없이 말을 걸고, 바에서 술을 마시면 쉴 새 없이 합석 제의가 들어온다고 한다.
그건 차장님이 예뻐서 그런 게 아닐까요… 허허.
나 같은 찐따가 가도 과연 남자들이 말을 걸까? 괜히 갔다가 마상만 입고 돌아올 것 같다.
글로 배우는 코리도 거리 제대로 즐기는 법
호기심에 구글에 ‘긴자 코리노 거리’를 검색했다가 우연히 일본 유명 패션잡지 《CANCAM》에서 코리도 거리를 제대로 즐기는 법을 소개한 글 「코리도 거리 가이드」를 발견했다. 역시 이런 건 글로 배워야 제 맛이다. 히힛.
코리도 거리에 오는 사람들의 특징
- 20~30대 직장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 근처에 대기업 오피스가 밀집해 있어서 고스펙·고연봉 직장인이 많다.
- 남자는 정장, 여자는 비즈니스 캐주얼.
- 동성 2명끼리 오는 게 정석(3명 이상은 말 걸기 부담스럽다).
남자들이 여자한테 말 거는 패턴
- “혹시 다음 가실 곳 정해지셨나요?” (→ 안 정해진 거 다 안다.)
- “만약 저희가 재미없으면 바로 집에 가셔도 되니까…” (→ 오늘을 위해 10년간 유머 감각만 갈고닦았다. 기대해도 좋다.)
- “벌써 집에 가시는 건 아니죠?” (→ 아직 집에 갈 생각 없는 거 다 안다.)
- “옆에 친구분 추워 보이시는 데 괜찮으세요?” (→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 “솔직히 말해서 너무 제 타입이셔서…” (→ 와우)
코리도 거리를 제대로 즐기는 법 for Women♥
- 금요일 밤 9시 이후에 코리도 거리에 방문한다.
- 코리도 거리에 진입하면 우아한 자태로 ‘천천히’ 걷는다. 너무 빨리 걸으면 남자들이 말을 걸기 힘들기 때문이다.
- 괜찮다 싶은 남자를 발견하면 적극적으로 레이저 빔을 쏜다.
- 맘에 드는 남자가 말을 걸면 ‘딱 한 잔 만이에요♥’라고 말하며 너스레를 떤다.
연락처(LINE) 교환 후 대처법
연락처 교환 후 상대방이 마음에 들었냐 아니냐에 따라 이모티콘을 다르게 보낼 필요가 있다.
연락처 교환한 상대가 마음에 들었으면, 두근두근 귀여운 이모티콘♥과 함께 다음 만남에 대한 여지를 확실히 남긴다. 반대로 앞으로 인생에서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경우 터프하고 박력 있는 이모티콘과 함께 다음은 없음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맺음형 답장을 보낸다.
성지 순례: 코리도 거리 현장 잠입 취재
읽다 보니 실제로 잡지에서 소개한 내용이 맞는지 팩트체크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절대 내가 가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다. 절대. 도쿄 주재원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코리도 거리가 정말로 도쿄에서 가장 핫한 만남의 장이 맞는지 현장 잠입 취재를 해보기로 했다. (참고로 일본 정부는 10월부터 ‘위드 코로나’를 선언하고 식당 영업시간 제한을 전면 해제했다.)
순수하게 ‘취재’ 목적으로 대학 동기 친구와 함께 금요일 저녁 퇴근 후 코리도 거리 근처에 있는 ‘에비스 바’에 방문했다. 오픈 테라스 명당자리에 앉아 시원한 에비스 생맥주와 맛있는 안주를 먹으며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난 일본 맥주 중에 에비스(YEBISU)를 가장 좋아한다. 생맥주로 즐긴 에비스는 정말 어나더레벨이었다. 잠시 취재의 본분을 망각한 채 신나게 먹고 마시다 보니 어느덧 밤 9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9시쯤 되니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20–30대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샐러리맨들이 많이 보였다. 잡지에서 말한 그대로였다. 긴자에 젊은 직장인들이 그렇게 많은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니 눈앞에서 진풍경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여자 무리에게 말을 거는 점잖은 정장 차림의 샐러리맨들, 주변을 의식하며 ‘천천히’ 걷는 여자들, 이미 한 잔 걸치고 온 것 같은 남자 둘, 여자 둘 그룹으로 거리가 인산인해를 이뤘다.
미묘하게 오가는 시선들, 서로에게 보내는 치열한 하트 시그널. 각본이 짜인 연애 리얼리티 방송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이것이 바로 100% ‘리얼’ 연애 버라이어티다. 어머 이건 봐야 해! 팝콘 좀 튀겨와야겠다.
그냥 구경만 해도 너무 재밌지만 직접 코리도 거리로 나서서 ‘현장 잠입 취재’에 나서 보기로 했다. 차장님께서 말씀하신 게 진짜인지, 일본 패션 잡지에 나온 내용이 과장된 건 아닌지 팩트체크를 해볼 필요가 있었다. 취재의 목적은 다음 두 가지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이다.
- 길거리에서: 성별이 ‘여자’인 사람이 지나다니기만 해도 남자들이 말을 거는가
- 가게 안에서: 여자들끼리 바에 가면 정말로 합석 제의가 물밀듯이 들어오는가
코리도 거리 진입 직전의 횡단보도 앞에서 건너편을 보니 동물의 왕국이 따로 없다. 술이 확 깬다. 횡단보도를 건너 코리도 거리에 막상 진입하자 알코올로 잠시나마 꾹꾹 눌러놨던 찐따 본능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이 자식이 그새를 못 참고… 급 소심해져서 아이컨택은커녕 먼 허공만 바라보며 빛의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사방에 레이더를 켜고 우아한 자태로 ‘천천히’ 걸으라는 잡지의 조언을 깡그리 무시했다. 500m 남짓 되는 코리도 거리를 빠른 속도로 통과하는 동안, 몇몇 남성들이 잡지에서 나온 멘트를 그대로 구사하며 말을 걸어왔다.
혹시 다음 가실 곳은 정해지셨나요?
만약 저희가 재미없으면 바로 집에 가셔도 되니까…
오… 나 같은 찐따에게도 말을 걸다니. 성별이 ‘여자’인 사람이 지나다니기만 해도 남자들이 말을 건다는 게 진짜였구만.
- 길거리에서: 성별이 ‘여자’인 사람이 지나다니기만 해도 남자들이 말을 거는가 → YES
첫 번째 궁금증이 해소됐다. CLEAR!
안타깝게도 말을 걸어온 남성분들에 대해서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하고 2차 장소를 물색했다. 1차는 나의 ‘이별 기념’으로 친구가 쐈기 때문에 2차는 내가 쏘기로 하고 적당히 분위기가 괜찮아 보이는 바에 들어갔다. 칵테일을 마시며 친구와 담소를 나누는데 정장 차림의 샐러리맨들이 마찬가지로 잡지에 나왔던 멘트를 구사하며 다가왔다.
샐러리맨들은 마치 여성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실례라도 되는 것 마냥 성실하게 끊임없이 우리 테이블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심지어 이미 테이블에 남자들이 있는데도 다른 남자들이 다가왔다. 그냥 여자가 있는 테이블이면 아무 곳이나 찔러보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남성분들이 긴 머리 가발만 쓰고 앉아 있어도 합석 제의가 들어올 것 같다.
- 가게 안에서: 여자들끼리 바에 가면 정말로 합석 제의가 물밀듯이 들어오는가 → YES
두 번째 궁금증도 해소됐다. CLEAR!
취재의 목적을 모두 달성하고 나니 급 흥미가 떨어졌다. 내 소중한 토요일을 사수하기 위해 바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귀가했다.
총평: 색다른 경험을 원한다면 한 번쯤 가볼 만한 곳
긴자 코리노 거리를 잠입 취재한 결과, 소문대로 코리노 도리는 도쿄의 젊은 남녀들이 모이는 헌팅의 성지였다. 젊은 직장인 미혼남녀가 가볍게 만나서 술 마시고 놀기엔 최적의 장소인 것 같다. 팍팍한 현실을 잠시 잊고 색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교류하고 싶다면 한 번쯤은 가볼 만한 곳이다.
다만 다음 날 현타가 쎄게 올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나도 다음날 일어나 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어서 주말 오전을 다 날렸다는 생각에 현타가 왔으나, 독자분들께 색다른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으니 그걸로 만족한다. 한 번이면 족한 것 같다. 당분간 현실 연애는 생각이 없으므로 방구석에서 웹툰을 보며 대리 만족하련다. 앗 2D 남친♥이 불러서 그럼 이만 가봐야겠다. 데헷.
원문: Moonlighter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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