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샤이’ 커피 마니아다. 인스타 감성 가득한 힙한 카페에 갈 용기가 없어 집에서 남몰래 커피를 즐긴다. 특히 에스프레소 투샷을 때려 넣은 찐하고 씁쓸한 아메리카노를 굉장히 좋아한다. 스타벅스도 좋아하지만, 한국에 있을 때 자주 가진 않았다. 갈 때마다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평일·주말을 가리지 않고 항상 사람이 가득했다. 한국인의 스타벅스 사랑은 정말 변하지 않는구나 새삼 실감했다.
그럼 일본은 어떨까? 일본 하면 ‘도토루 커피’를 떠올리시는 분들도 계실 텐데, 스타벅스는 일본에서 도토루보다 인기가 많을까? 일본 사람들도 스타벅스를 좋아할까?
일본 스타벅스에서 본 충격적인 광경
일본 집으로 이사 온 후 맞이한 첫 주말,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 큰맘 먹고 집 근처 스타벅스를 방문했다. 주말이기도 하고 쇼핑몰 안에 위치해 있어서 평소보다 붐빌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스타벅스에 도착했을 때 마주한 광경은 상상을 초월했다.
매장밖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줄 서서 기다렸다. 줄이 너무 길어서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에서도 친환경 굿즈 캠페인을 하나? 그런데 아무리 봐도 손에 굿즈를 들고나오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처음엔 굿즈를 득템한 사람들이 누가 훔쳐 갈까 봐 품에 감추고 다니는 게 아닌가 의심도 해봤지만, 눈을 씻고 찾아봐도 굿즈 따위 어디에도 없었다. 굿즈 행사를 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주말‘이라서 사람이 많은 거였다…!
오로지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 긴 시간 인내하며 질서 있게 기다리는 일본 사람들의 경이로운 시민의식에 충격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매장 안을 흘끔 들여다보니 흡사 인기 가수의 콘서트장을 방불케 했다. 그럼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맥북을 펼쳐놓고,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시는 분들을 보고 또 한 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것이 바로 기나긴 인내 끝에 자리를 쟁취한 승자의 여유인 것인가…
집 근처 스타벅스 매장만 그렇게 붐비는 게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집으로 복귀했다. 스타벅스에 대한 내 마음은 딱 그 정도였다. 다른 매장이 저 정도로 심하진 않지만, 회사 근처, 번화가 할 것 없이 스타벅스 매장은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뤄 어딜 가든 거의 만석이었다. 일본에서는 굿즈 행사가 없는 평소에도 스타벅스에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기다리는 광경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일본 내 스타벅스의 위상
내가 인복(?)이 많아서 스타벅스에 갈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 있었던 건지, 아니면 실제로 스타벅스가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은지 ‘뇌피셜’에 근거한 추측이 아닌 객관적인 데이터와 수치를 통해 일본 내 스타벅스의 현 위치를 한 번 파악해보기로 했다.
2021년 10월 기준 일본 내 스타벅스 매장 수는 1,655개로, 일본 내 커피 프랜차이즈 중 가장 많은 매장 수를 보유했다. 일본 스타벅스의 매출은 2019년 기준 2,011억 엔(한화 약 2조 720억 원)으로 매출 규모도 일본 전체 커피 프랜차이즈 중 압도적인 1위다. 다른 프랜차이즈들의 매출 증가율이 거의 제자리걸음인데 반해 스타벅스의 매출은 꾸준히 성장하는 모습이다.
한국도 한국이지만, 특히 일본에서는 스타벅스가 매장 수와 매출 규모 모두 타 브랜드를 압도적으로 제치고 1위를 차지한다.
팩트 체크 결과, 스타벅스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명실상부 1위 커피 프랜차이즈 기업이며, 20년 넘게 꾸준히 그 명성을 유지해왔다. 일본에 카페가 스타벅스만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일본 사람들은 스타벅스에 이렇게까지 열광하는 걸까?
참고로 일본 소비자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까탈스럽기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들도 야심 차게 일본에 진출했다가 쓰라린 맛을 보고 사업을 철수한 사례가 많다. 스타벅스는 어떻게 탑 속에 갇힌 새침데기 라푼젤 같은 일본 소비자들이 탑 밖으로 긴 머리카락을 내려주도록 설득했을까?
일본 사람들이 스타벅스에 열광하는 세 가지 이유
1. 프린세스 공략 작전
첫 번째 이유는, 스타벅스가 기존의 일본 카페 시장에서 비주류 고객층이었던
일본의 2030 여성을 집중 공략했기 때문이다.
스타벅스가 일본에 진출하기 이전인 1990년대만 해도 일본 카페의 주요 이용객은 젊은 여성층이 아닌 중장년 남성이었다. 중장년층 남성분들이 예쁜 카페에서 동년배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떠는 모습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이 시절 일본의 카페는 지금의 카페처럼 예쁘고 세련된 곳이 아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카페’라고 하면, 1970년대 한국의 다방을 연상시키는 ‘킷사텐(喫茶店)’이라고 불리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어두운 갈색 계열의 인테리어에 무려 전 좌석 흡연이 가능해 칙칙한 분위기와 담배 연기가 환상의 하모니를 이루는 곳이다.
‘킷사텐(喫茶店)’은 밖에서 영업을 돌다가 체력이 소진된 샐러리맨들, 가장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 아버지 세대가 잠시 쉬러 오는 공간이었다. 책을 읽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휴식을 취하는 그들만의 힐링 공간이었다. 아버지들의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이 엄숙한 공간에 2030 젊은 여성들이 가고 싶어 할 리 만무했다.
스타벅스가 일본 시내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96년 8월의 어느 여름날이었다. 도쿄에서 가장 비싼 거리 ‘긴자’에 1호점을 낸 스타벅스는 기존의 일본 카페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세련된 인테리어와 유럽풍 오픈 테라스, 고급스러운 메뉴를 선보였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전 좌석 전면 금연을 시행했다. 참고로 이 시절은 킷사텐은 물론이고 음식점, 술집, 심지어 신칸센에서도 대놓고 담배를 태울 만큼 실내 흡연이 보편적인 시절이었다.
스타벅스의 금연 정책이 일본 내에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은 예상 가능한 결과였다. 일본 사람들은 당시 카페의 주요 고객이었던 흡연자를 거부하는 스타벅스가 잘 될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커피를 좋아하지만 예쁘고 분위기 좋은 카페가 없어서 못 갔던 샤이 고객들이 스타벅스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스타벅스는 유행에 민감한 젊은 여성층을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일본에서 카페 붐을 일으켰다. 그동안 탑 속에 갇혀 있던 새침데기 라푼젤 같은 일본의 2030 여성들의 마음을 스타벅스가 제대로 저격한 것이다.
스타벅스는 아빠들의 쉼터였던 일본의 카페를 딸들의 핫플레이스로 완전히 바꿔 놓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걸 스타벅스는 이미 알았던 걸까. 스타벅스의 커피 가격은 다른 카페에 비해 상당히 비쌌지만, 딸들은 용돈으로 친구들과 스타벅스에 가서 기꺼이 비싼 돈을 지불하고 커피를 사 마셨다.
스타벅스는 모든 아빠의 딸들을 집중 공략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스타벅스 CEO는 천재인 것이 분명하다. 처음에는 젊은 여성들이 주로 스타벅스를 찾았지만, 젊은 남성들, 중장년층들로 고객층이 점차 확대되면서 지금은 일본 1위 커피 프랜차이즈로 당당히 자리 잡게 됐다.
참고로 지금도 스타벅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본 커피 프랜차이즈는 여전히 옛날 ‘킷사텐’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다. 일본의 오리지널 카페 문화를 체험하고 싶으시면 코로나 풀리고 한 번 방문해보시기 바란다.
2. 맛
두 번째 이유는, 다른 커피 프랜차이즈보다 커피가 압도적으로 맛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분위기 좋은 카페여도 커피가 맛없으면 고객들이 찾지 않는다. 일본 사람들이 스타벅스를 계속 찾는 이유는 분위기도 좋은데 커피 맛도 좋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워낙 맛있는 커피를 파는 카페가 많다 보니 스타벅스 커피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지만, 일본에는 스타벅스의 커피 맛을 뛰어넘는 커피 프랜차이즈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도토루를 비롯한 기존의 일본 커피 프랜차이즈들은 분위기도 칙칙한데 커피 맛도 그저 그렇다. 스타벅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본 커피 체인점은 에스프레소 추출해서 커피를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도대체 커피를 어떻게 만든단 말일까? 대부분의 유명 커피 체인점은 편의점 커피처럼 버튼 하나만 누르면 커피가 나오는 기계를 사용한다. 통 안에 원두만 채워놓으면 기계가 알아서 커피를 뽑아주기 때문에 아르바이트생은 편하지만, 손님들의 혀는 불편하다.
‘Tully’s coffee’라는 에스프레소 커피를 제공하는 미국발 커피 프랜차이즈점도 있긴 하지만, 체인점 수가 적어서 주변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얼마 전에는 집 근처 도토루에 들러 한국에서 먹던 아아를 기대하며 아이스커피를 시켰다가 미각을 잃을 뻔한 혀아픈 기억이 있다. 비단 도토루뿐 아니라 다른 체인점들도 마찬가지다.
스타벅스는 이렇게 암흑 같던 일본의 커피 시장에 혜성처럼 등장해 에스프레소 커피를 처음으로 대중화했다. 일본 스타벅스에 따르면 40년의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장인이 볶은 엄선된 아라비카 원두를 사용해 커피를 만든다고 한다. 스타벅스는 고객에게 언제든 맛있는 커피를 제공할 수 있도록 커피 제조공정과 품질을 엄격하게 관리한다.
그래서인지 ‘플라시보 효과’일 수도 있지만, 스타벅스에 가면 언제든 내가 좋아하는 찐하고 씁쓸한 아메리카노를 즐길 수 있다. 한국에서는 스타벅스의 커피 맛이 별다르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지만, 일본에서 스타벅스는 맛으로도 거의 독보적인 존재다.
3. 스타벅스 점원의 환한 미소
마지막으로, 스타벅스 점원의 환한 미소와 친절한 서비스 때문이다. 일본 스타벅스 점원은 ‘오모테나시(おもてなし)’로 유명하다. ‘오모테나시’란 ‘최고의 환대’라는 뜻으로 정성을 다해 손님을 대접하는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한국도 그렇겠지만, 일본에서는 특히 스타벅스 점원이라고 하면 뭐니 뭐니 해도 환한 미소와 수준 높은 접객 서비스가 트레이드 마크다. 지친 출퇴근길에 스타벅스에 들르면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점원의 환한 미소에 위로받을 수 있어서 스타벅스를 찾는 사람들도 상당하다. 우리나라 못지않게 일본에도 일에 치이고 일상에 치여 사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누군가의 따뜻한 환대는 큰 위로가 된다.
수준 높은 접객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일본 스타벅스는 아르바이트생이라 해도 직원 교육을 철저히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타벅스 알바는 힘들지만 ‘인싸’의 상징이자 대학생들이 동경하는 알바이기도 하다. “나 스타벅스에서 일해!”라고 말하면 주변에서 부러움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나도 일본 유학 시절 스타벅스 알바 면접을 봤지만, ‘아싸’의 벽을 결국 넘지 못하고 탈락의 고배를 마신 경험이 있다. 주륵…)
결론
지금까지 스타벅스가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새침데기 일본 소비자들을 어떻게 사로잡았는지 살펴보았다. 스타벅스의 일본 진출 전략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1. 타깃 고객 선정 및 집중 공략
기존의 일본 카페 시장의 주류 고객(중장년 남성)이 아닌 비주류 고객층(젊은 여성층)을 타깃으로 정하고, 세련된 인테리어와 전 좌석 금연 시행을 통해 쾌적하고 아늑한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 본업인 커피에도 충실
기존의 일본 카페 시장에는 없던 에스프레소 커피를 처음으로 선보였으며, 고객에게 언제든 맛있는 커피를 제공할 수 있도록 커피 제조공정과 품질을 엄격하게 관리했다.
3. 수준 높은 접객 서비스
철저한 직원 교육을 통해 수준 높은 고객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이 스타벅스를 계속 찾을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자랑스러운 우리나라의 월드 클라쓰 기업들도 스타벅스의 사례를 참조해
새침데기 일본 소비자들의 황금빛 머리카락(Money)을 탑 밖으로 끌어당기는 데 성공하길 진심으로 응원한다.
원문: Moonlighter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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