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결
현재 일본의 민법에 따르면 결혼을 하기 위해서 남자와 여자는 반드시 성씨를 한쪽으로 통일해야 한다. 이를 부부동성제라고 하며 외국인과 혼인했을 경우만 결혼 이전의 성씨(旧姓)를 각자 유지할 수 있도록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결혼 이전의 성을 유지할 수 없는 현행법이 개인의 존엄과 남녀평등을 보장하는 헌법에 위배된다고 소송을 제기한 도쿄도의 사실혼 부부 3쌍에게, 2021년 6월 23일 일본 최고재판소는 현행 부부동성제가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합헌’ 판결을 내렸다.
6년 전인 2015년도에도 동일한 소송이 진행되었지만 최고재판소는 역시 합헌 판결을 내렸고 6년이 지난 후에도 법원은 사회의 변화와 국민들의 의식 변화를 고려하더라도 현행법이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2015년 당시 15명의 재판관 중 위헌을 표명한 사람은 5명이었으며, 2021년에는 한 명이 줄어든 4명이었다. 부부별성제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 국가는 전 세계에서 일본이 유일하다.
이전에 「너의 이름은」이라는 글에서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일본에서는 개인적인 친분 관계가 아닌 이상 기본적으로 성씨로 불린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도, 직장에서도, 식당을 예약을 할 때도 모두 성씨를 사용한다. 전 국민의 약 절반이 김, 이, 박, 최 4개의 성씨를 갖고 있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개인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수의 성씨가 존재한다.
이런 성씨의 활용도를 고려할 때, 결혼으로 성씨가 바뀌는 건 우리나라로 치면 개명을 하는 것과 비슷한 변화가 아닐까.
부부동성제를 여전히 지지하는 여론
결혼으로 성씨가 바뀌는 일은 서양권 국가에서나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같은 동아시아 국가이면서 부부별성제를 채택하고 있는 중국, 한국과 달리 일본이 부부동성제를 고집하고 있는 점은 흥미로웠다. 결혼을 하면 한 가족이 된다는 건 같은 성씨를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본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엄마만 다른 성을 쓰는 한국의 상황이 낯설게 느껴질 테다. (부부동성제에 따라 여자 쪽에서 남자 쪽으로 성씨를 바꾸는 경우가 95% 이상을 차지한다)
일본인 지인들과 이야기하며 한국은 결혼 후에도 각자 성을 유지한다고 얘기했을 때, 공통적으로 받은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가족인데 엄마만 혼자 성이 다르면 섭섭하지(寂しい) 않아요?
지금까지 내가 사용했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성씨를 바꿈으로써 내가 선택한 사람과 새로운 가정을 만들어나간다는 일체감, 소속감을 더 크게 느끼고 있는 듯했다. 실제 2017년 내각부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혼인에 따라 자신이 성씨를 바꾼다고 했을 때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가?”라고 묻는 항목의 응답 결과는 다음과 같다.
- 성씨가 바뀌면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 같은 기쁨을 느낀다: 41.9%
- 상대와 하나가 된 듯한 기쁨을 느낀다: 31.0%
-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23.0%
- 성씨가 바뀌어 위화감을 느낀다: 22.7%
- 지금까지의 나를 잃어버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8.6%
- 기타: 0.4%
- 모르겠다: 2.0%
- 2017년 내각부 여론조사(복수응답)
특히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 같은 기쁨, 상대와 하나가 된 듯한 기쁨을 느낀다고 응답한 비율은 남성보다 여성 그룹에서 더 높게 나타났는데 실제로 성씨를 바꾸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쪽은 대부분 여성이니 이러한 변화를 실감하는 것도 여성 쪽인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선택적 부부별성제 도입에 대해서 일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같은 여론조사에서 현재의 부부동성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원하는 사람들에 한해 각자의 성을 유지할 수 있는 선택권을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혹은 현행 제도를 유지하면서 직장 등 다른 곳에서 이전 성을 유지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을 더 넓게 보장하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 부부는 반드시 같은 성씨를 사용해야 하며 현재 법률을 개정할 필요가 없다: 29·3%
- 원하는 부부에 한해서는 다른 성씨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42.5%
- 현행 제도를 유지하되 이전 성을 활동명(称性)으로 사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야 한다: 24.4%
- 2017년 내각부 여론조사, <선택적 부부별성제도>
선택적 부부별성제 도입을 둘러싼 의견 차이는 남녀 구도로 나뉘어져 있지 않았다. 성씨를 바꾸어야 하는 건 일반적으로 여자 쪽임에도 불구하고 부부별성제 도입에 찬성하는 비율은 남녀 그룹 모두에서 42.5%로 동일하게 나타났다. 반면 연령대에 따라 입장은 달라졌는데 현행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은 30대 그룹에서 가장 낮게 나타나며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점점 높아져, 70대 이상에서는 그 숫자가 과반수를 넘어갔다 (참고 그래프).
부부별성제도를 허용해야 한다(빨간색) 비율은 2001년 이후 2012년까지 낮아지다가 2017년에 다시 42.5% 수준으로 돌아온다. 부부별성제도를 허용할 필요가 없다는 보수적인 입장(파란색)도 2001년 이후 높아지다가 2017년에 다시 꺾인다(그동안 일본에 도대체 무슨 일이…)
새로운 이름을 사용할 때 부딪히는 문제들
- 프라이버시 보호
개인적으로 부부동성제 이야기를 듣고 바로 들었던 생각은 사생활 침해 문제였다. 이혼을 하면 내가 원하지 않아도 직장과 사회에 이혼을 강제 커밍아웃해야 하는 건가? 2019년 후생노동성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본의 이혼율은 35%라고 한다. 결코 낮지 않은 비율이다. 실제 이혼을 한 사람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리는 글을 보면, 아주 가까운 지인들에게만 이혼 사실을 알리고 직장이나 먼 지인들에게는 굳이 이혼을 밝히지 않고 생활하는 경우가 흔한 듯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이혼 후 본인의 성씨를 되찾는 과정에서 사생활이 드러난다. 원하는 경우 이혼 후에도 결혼으로 얻게 된 성씨를 유지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이혼 사실을 어쩔 수 없이 공표하거나 그게 싫어서 이혼한 배우자의 이름을 유지하거나, 두 개 선택지가 모두 가혹하다. 본인의 성씨를 그대로 유지하는 배우자는 그런 부담을 떠안지 않아도 되지만 성씨를 바꾼 배우자 쪽만 이런 피해를 입는다는 점도 불공평하다.
- 커리어의 단절
혼인 평균 연령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고 여성들의 사회생활 참여 비율도 높아지고 있는데 결혼으로 성씨가 바뀌면 커리어에 크고 작은 단절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명함을 새로 만들고, 이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들에게 자신을 새로운 이름으로 소개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사소한 절차적 번거로움이라고 치부하더라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학술 연구를 하거나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커리어의 단절이라고 할 만한 불편함이 생긴다. 연구자의 경우 자기 연구 성과는 자기 이름으로 발간된 논문으로 평가받는데 갑자기 이름을 바꾸면 이전에 썼던 논문은 자신의 논문으로 인정받기 까다로워진다. 일일이 결혼 이전의 성과 이후의 성이 동일인이라고 설명을 할 수도 없고.
지인의 이모도 그렇고, 많은 여성 학자들은 호적상으로는 성씨를 바꾸어도 학계에서는 결혼 이전의 성을 유지한다. 이 경우에도 해외 학회에 참석할 때 초대장은 활동명으로 나오는데 여권에 적힌 이름은 다른 이름이니, 이 두 인물이 동일인임을 증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연예인과 같은 공인들은 결혼 이후에도 이미 알려진 자신의 이름을 활동명으로 유지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자유의 침해
위에 언급한 프라이버시 문제나 커리어의 문제를 차치하고, 단순히 본래 나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는 데 대한 상실감,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설 자리를 찾기 쉽지 않다. 피해를 수치화할 수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기에 그 정도의 불편보다는 동성제를 유지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편의가 더 크다는 주장에 반박하기 쉽지 않다.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나로 결혼을 하고 싶다는 단순한 바람임에도 불구하고. 운전면허증, 신용카드, 명함에 적힌 이름을 바꾸지 않아도 누군가의 아내 혹은 남편이 될 수 있는 선택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요구는 안타깝게도 개인 보다는 전체를 강조하는 일본 사회에서 모난 돌 취급을 받는다.
도저히 바뀐 이름으로 사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아서 서류상 이혼을 결심한 부부의 사례가 보도되기도 한다(관련기사) 결혼 이전부터 일을 해 왔던 아내는 이전의 이름을 활동명, 통성(称性)으로 유지해 왔으나 국가시험자격증에는 통성의 병기가 허용되지 않아 호적에 올린 성씨만 기재가 가능했고, 행정서사 명함에도 자격증을 취득한 이름과 본래 이름을 양면에 각각 인쇄해서 사용했다. 이런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결국 찾지 못하고, 이 부부는 ‘부부의 날’에 이혼 서류를 제출하고, 동거인이 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우리말의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이 일본에도 똑같이 있다(出る杭は打たれる). 요즘은 남들과 다른 것이 개성이고 강점이 되어서 인정받는 시대라고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는 여전히 남들과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지탄하는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있다.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자유’ 같은 건 자기만 잘났다고 잘난 척하는 사람들의 배부른 소리로 취급당한다. 부부별성제를 허용하면 같은 성씨를 쓰는 부부를 시대착오적인 가부장적인 가치관에 빠져 있다며, 내려다볼 것이기 때문에 선택적 부부별성제 도입에 반대한다는 사람도 있다. (관련 영상)
6월 23일 최고재판소 결정이 나왔을 때 개인적으로는 이 판결의 결과가 너무나 놀라워서 야후 기사의 댓글들을 훑어보았다. 이 판결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을지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을지 궁금했다. 추천수를 많이 받은 댓글들은 최고재판소의 판결을 옹호하는 쪽이 대다수였다. 그렇게 원래 이름을 쓰고 싶으면 직장 같은 곳에서는 예전 성을 유지하고 호적상 성씨만 바꾸면 되는데 왜 저렇게 유난을 떠는지 모르겠다는 고깝게 보는 시선들이 많았다.
소송을 제기한 부부 중 한 명이 기자회견에서, 오늘 위헌 판결이 나면 시청에 각자의 이름으로 정식으로 혼인 신청서를 내려고 준비해 왔는데 제출하지 못하게 되어서 안타깝다고 했는데 뉴스에는 그 사람의 이름이 가명으로 나왔었다. 이를 지적하며, 그렇게 자기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 왜 여기서는 가명을 쓰냐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자기 이름을 유지하며 결혼을 하겠다는 개인을 향한 여론의 비난은 거셌다.
정치권으로 공을 떠넘긴 최고재판소
일본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중요한 전통처럼 이야기하는 이 부부동성제는 사실 그 역사도 길지 않으며 서양의 제도를 따라 만든 것이다. 에도 시대까지는 무사 계급만 성씨를 가지고 있었고 평민들은 성씨가 없었다. 메이지 유신 때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성씨의 사용을 평민에게도 보급했고, 이 과정에서 가족들이 성을 통일하도록 정했다. 서양에서는 진작에 혼인 이후에도 각자의 성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였음에도 이제 일본에서 120년이 넘어가는 역사를 가진 부부동성제가 일본 사회를 지탱하는 신성한 가치라도 되는 듯이 수호하려고 하는 모습도 어색해 보인다.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보호해야 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법원이 스스로의 가치를 부정하며 이 사안은 국회에서 의논해야 한다고 공을 정치권으로 넘겨버렸다.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들에게. 야당은 선택적 부부별성제 허용에 긍정적인 입장이지만, 여당인 자민당이 소극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고 한다. 이 사안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논의할 수 있도록 올해 워킹팀을 구성하였다고 하는데 그 간부들의 구성을 보니,인생에서 단 한 번도 부부별성제의 필요성을 생각해볼 일이 없었을 것 같은 인물들뿐이다.
일본이 선택적 부부별성제를 허용하는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만, 자유롭게 성씨의 변경 유무를 선택해서 결혼할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만, 결코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한 한 주였다.
원문: 할리할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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