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헬싱키에 위치한 카모메 식당은 채광이 잘 드는 큰 창과 푸른색 하얀색의 배합의 깔끔한 벽이 따스한 느낌을 주는 일본 가정식 식당이다. 핀란드에 아무런 연고도 없어 보이는 일본인 사치에가 어쩌다 핀란드에 오게 되었는지, 이곳에 오기 전 일본에서는 어떤 일을 했는지 영화는 관객에게 말해주지 않은 채 그녀가 식당을 막 오픈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치에는 부지런하다. 마켓에 가서 부지런히 장을 보고 식당에 돌아와 청소를 유리 글라스를 하얀 천으로 깨끗이 닦는다. 이렇게 매일 성실히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만, 가게를 오픈 한 지 한 달이 되어가는데도 좀처럼 손님은 오지 않는다. 낯선 동양인을 유리창 너머로 구경하는 현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만이 가게 안으로 들어온다. 그녀가 어린이인지, 성인인지 수근거리는 핀란드 사람들에게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가볍게 목례를 건네지만, 아줌마들은 그녀의 인사에 대꾸도 하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뜬다. (그리고 다음 날 또다시 가게 앞에 나타난다. 그냥 가시라구요)
식당에 첫 발걸음을 한 영광의 주인공은 일본 애니메이션 덕후 토미. 일본어도 어느 정도 할 줄 알아서 사치에와 일본어로 대화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 어느 날 그는 다짜고짜 갓챠맨(독수리 오형제) 주제가 가사를 사치에에게 물어본다. 그 바람에 며칠이나 사치에의 머릿속은 갓챠맨 주제가 도입부로 간질간질 거린다.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가사 때문에 괴로워하던 그녀는 서점에서 우연히 일본인으로 보이는 여성을 발견하고, 초면인 그녀에게 갓챠맨의 가사를 물어본다. (그나저나 아이폰 이후의 세계와 이전의 세계는 이토록 다른 것이었나… 검색 한 번 보면 끝날 일인 것을)
갓챠맨의 가사를 빠삭하게 꿰고 있는 그녀의 이름은 미도리. 어떤 사연을 한 트럭만큼 안고 있길래,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무작정 손가락이 찍은 곳이 핀란드여서 여기로 왔다는 걸까. 여하튼 갓챠맨을 계기로 미도리는 사치에의 집에 머물면서 카모메 식당 일을 돕게 된다. 이후에 공항에서 짐을 잃어버려 할 수 없이 핀란드에 발이 묶인 마사코까지 카모메 식당을 찾게 되면서 영화는 사치에, 미도리, 마사코가 이곳에서 잃어버렸던 무언가, 찾고 싶었던 무언가를 찾게 되는 과정을 따스하게 그려나간다.
10년쯤 전에 스웨덴으로 교환학생을 떠나기 전에 지인이 추천한 영화가 바로 <카모메식당>이었다. 당시에는 내가 생활하게 될 북유럽의 이국적인 풍경과 정갈한 일본가정식의 매력이 섞여 여운을 남겼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 결혼도 하고, 어쩌다 일본에서 살게 되면서 다시 찾아보게 된 이 영화는, 그때와 달리 내게 사치에라는 인물의 아름다움과 강인함을 전하는 영화로 다가왔다.
1. 우는 사람에게는 이유를 묻지 말고 휴지를 가져다줍니다
세계지도에서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었을까. 갓챠맨 노래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나쁜 사람일 리가 없을 거라고 경계심을 낮추며, 사치에는 미도리를 자기 집에서 생활하게 한다. 미도리는 사치에가 정갈하게 차려 낸 밥상 앞에서 결국 눈물을 터뜨린다. 일본인들의 소울푸드 쟈가니꾸(소고기 감자조림), 미소시루, 흰 쌀밥, 그리고 따뜻한 차를 보고서.
사치에는 당황하지 않고 그런 감정 나도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 당황하지 않고 휴지를 건넨다. 이 장면에서 사치에가 걸어온 인생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겠구나 생각했다. 강인한 사람만이 저런 방식으로 위로할 수 있다. 번지르르한 말이 아닌 정성을 담은 지은 밥상으로, 그리고 적절한 침묵으로.
2. 내 몸과 마음은 내가 지킵니다(ft. 수영과 합기도)
그녀는 규칙적으로 수영과 합기도를 한다. 집에서 요가 매트를 펼쳐 놓고 오른쪽, 왼쪽 다리를 차례대로 뻗으면서 왔다갔다 반복하는 동작을 너무나 진지하게 해서 웃음이 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해 오던 습관이어서 하루라도 빼먹으면 기분이 이상하다고 하는 그녀. 그 모습을 보면서 규칙적인 습관으로 다져진 그녀의 다부진 몸이 자기 덩치의 1.5배 정도 되는 핀란드 사람들 앞에서도 그녀가 주눅 들지 않고 씩씩하게 살 수 있는 힘의 원천인 걸까 생각했다.
타국에서 느낄 법한 외로움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그녀의 말과 행동에서 좀처럼 읽히지 않는다. 대신, 유유히 물을 가로지르며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사치에가 보인다. 그녀는 본인의 처지를 과장해서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않고, 볼멘소리를 내뱉지도 않고, 그저 몸을 천천히 움직이면서 감정들을 소화해낸다. 사치에의 아름다운 몸이 물속에서 반짝인다.
3. 하기 싫은 일은 안 합니다
가게를 오픈 한지 한 달이 되어도 손님이 오지 않자 초조해지는 건 오히려 일을 도와주고 있는 미도리 쪽이다. 일본인들이 먹는 전통 오니기리 대신 핀란드 사람들에게 익숙한 식재료를 사용한 오니기리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하는 것도 미도리이고, 처음으로 카모메 식당을 찾은 손님이라는 이유로 (뻔뻔하게도) 평생 커피 무료 쿠폰을 부지런히 쓰고 있는 핀란드 청년 토미에게 가끔씩 친구라도 데리고 오지 않겠냐고 핀잔을 주는 것도 미도리이다.
사치에는 자기가 만들고 싶은 공간이랑은 맞지 않는 느낌이 들까 봐 새로운 메뉴 도입을 주저하면서도 미도리의 제안을 받아들여 시도를 해 본다. (애꿎은 토미, 마루타로 시식에 강제투입. 커피 공짜로 얻어먹으니 그 정도는 해야지?) 시식 결과 내놓을 수 있는 맛이 아니어서 핀란드식 퓨전 아이디어는 탈락하지만, 시나몬롤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카모메 식당을 찾는 손님들은 하나둘 늘어난다. 그러던 어느 날 사치에를 보고 마사코는 말한다. “사치에는 좋겠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니까요.” 그러자 사치에가 하는 말.
하고 싶은 일을 해서 좋은게 아니라, 하기 싫은 일을 안 하는 것뿐이에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 여기저기서 외치는 세상에서, 하기 싫은 일은 안 하겠다고 저리 똑 부러지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 나선 것이라고 긴 방황에 이유를 대기도 하고, 아마추어는 좋아하는 일을 하지만 프로는 싫은 일이라도 필요하면 한다는 말에 뜨끔해서 관심 없는 분야의 공부를 깨작거리기도 하고, 그러다가 대체 무엇을 원하는가 거대한 질문 앞에 쪼그라드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는 말이다.(모두 내 이야기…)
코로나 때문에 유튜브 보는 시간이 많이 늘어나면서, 성공한 젊은 부자들의 인생역전 이야기를 보게 됐다. 보다 보니 불안해지더라. 가만히 월급쟁이로만 있어서는 안 되는데, 부업이라도 찾아봐야 하나 싶어 우왕좌왕하던 차에 사치에의 소신 있는 한 마디가 나를 꾸짖는 것처럼 들렸다. 딱 저 정도의 소신을 지키고 만족할 줄 아는 인생, 멋지지 않은가.
마치며
이 영화를 보고 2년 전 겨울 경유지로 핀란드 헬싱키에 짧게 방문했던 때 찍었던 사진들을 찾아보았다. 핀란드라는 머나먼 나라에서도 씩씩한 모습을 잃지 않았던 사치에처럼 나 역시 일본이든, 한국이든, 세계 어디에서든 스스로의 마음을 잘 돌보면서, 소신을 지킬 줄 아는 어른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문: 할리할리의 브런치
함께 읽으면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