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일본 음식영화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일본음식’ 영화가 아니라 일본 ‘음식영화’, 즉 일본에서 주로 나오는 음식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말한다. 대단한 서사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음식 그 자체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으면서, 화려하거나 요란스럽지 않은 일본만의 정갈한 영상미가 살아 있는 그런 영화.
음식영화 천국, 일본
일본은 음식영화의 천국이다. <담뽀뽀>, <카모메식당>, <하이와언 레시피>, <토일렛>, <양과자점 코안도르>, <스키야키>, <달팽이 식당>, <남극의 셰프>, <해피해피 브레드>, <해피해피 와이너리>, 최근 나온 <리틀 포레스트>까지… 금방 생각나는 것만 대도 이 정도다. 잘 모르는 이라면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리메이크되며 화제가 됐던 만화(원작)이자 드라마이자 영화인 <심야식당>을 떠올리면 되는데, 음식을 중심으로 얽힌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에피소드 식으로 이어지며 소소한 대단원에 이른다.
음식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엮어야 하기에 배경은 주로 음식점이다. <심야식당>은 심야에만 문을 여는 묘한 식당이 배경이었고, 올 3월 음식 콘텐츠 붐을 타고 개봉했던 <해피해피 와이너리>는 홋카이도(우리로 치면 강원도?)의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 위치한 와이너리가, 감독의 전작 <해피해피 브레드>는 마찬가지로 홋카이도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겸 카페가 배경이었다. 이색적이면서도 매력적인 공간인 것이 포인트라, 이 모든 음식영화들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카모메 식당>(2007)은 핀란드의 헬싱키로, <하와이언 레시피>(2009)는 하와이의 호노카아 마을로 간다.
그 공간을 찾는 사람들은 고독하거나 상처 입었거나 인생에서 실패를 맛보고 있거나 인생이 허무하거나 실연했거나 기타 등등 자신만의 문제를 안고 있는 이들인데, 음식으로 위로받고 다시 일상을 이어갈 힘을 얻는다.
그런데, 이런 음식영화들의 원작이 대부분 만화나 소설, 에세이라는 걸 떠올려 보면 일본은 음식영화만이 아니라 음식을 소재로 한 장르 전체가 매우 두텁게 포진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화나 드라마화, 즉 영상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오히려 최근의 일로, 보다 긴 전통을 가진 장르는 음식만화일 것이다.
앞서 소개한 <고독한 미식가>, <심야식당>를 포함해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미스터 초밥왕>, <요리왕 비룡>, <신의 물방울>, <맛의 달인> 등이 모두 구루메 만화에 속한다. 최근 한국에서도 스타 셰프들의 잇단 흥행과 함께 ‘먹방’, ‘쿡방’ 같은 신조어까지 탄생시키며 음식 콘텐츠가 대세라지만 일본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오히려 이런 음식 콘텐츠 붐과 함께, 일본의 음식콘텐츠 유입이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은 왜 음식 콘텐츠가 발달했을까?
일본 특유의 잔잔하고 힐링힐링한 음식영화와, 다큐 뺨치는 취재력을 바탕으로 한 요리만화, 음식소설이나 에세이를 즐겨오면서 늘 ‘어떻게 일본은 음식 콘텐츠가 이렇게 발달했을까’하는 의문이 있었다.
각 영화, 만화, 소설, 에세이들은 이미 장르의 규칙이 형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앞서 설명한 것이 힐링 계열 음식영화의 장르 관습이었다면, 요리만화는 주로 대결 구도를 바탕으로 한 무협 서사의 구조(비룡류)를 갖는다. 음식 에세이들은 음식과 관련된 기억에서 시작해 식(食), 곧 먹는다는 행위 자체의 의미를 탐구하는 경향이 있다. 한 음식문헌 연구자에게 이 현상에 대해 물었다가 의외의, 그러나 매우 통찰력 있는 답을 얻을 수 있었는데, 음식만 그런 게 아니라 “일본은 모든 장르가 대체로 다 깊고 두껍다”고… 사실 그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일본의 장인정신’ 같은 추상적이고 실증 불가능한 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일본 대중문화의 긴 역사에서 찾는 게 나을 것 같다. 배를 채우는 먹거리였던 음식이 미디어를 통해 하나의 콘텐츠가 되고 있는 근래의 현상은 ‘음식의 대중문화화’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텐데, 일본은 이 대중문화화가 보다 빠르게 이루어진 것이다.
음식을 소재로 한 콘텐츠는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음식은 문화의 중요한 요소였고, 인류는 기록이 가능해진 이후부터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분하여 기록하고 문헌으로 전수했다. 보다 문명이 발달한 후에는 요리법 같은 보다 차원 높은 정보들이 기록을 통해 보전됐다. 근대 이전까지 이런 기록들이 소수의 사람들(수도원, 왕궁 등) 사이에서만 공유됐다면, 인쇄술이 발달한 이후에는 보다 폭넓은 대중이 이를 공유할 수 있게 됐다. 대중들을 위한 요리법이 개발되고, 요리책이 상품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요리책의 생산과 소비는 점차 현대적인 대중문화 현상의 성격을 닮아가게 되며, 책이라는 미디어에만 한정되지도 않게 된다. 대중들은 스토리텔링을 요구하기 시작하고, 음식은 단순히 먹고 배를 채우는 것 이상의 대중문화적 기호로 자리 잡는데, 이것이 오늘날 일본, 한국을 가리지 않는 음식 콘텐츠 열풍의 기저에 있는 역사적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0년대 말~199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소비사회에 접어들어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팽창했다면, 이를 1960년대 중반~1970년대 초에 이미 달성한 일본은 대중문화로서의 음식/요리를 먼저 발견했고, 장르화 역시 먼저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요리 자체에 대한 정보 위에, 그에 적합한 스토리를 입히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 최초의 요리만화는 <요리사 아지헤이>로 알려져 있는데, 이 작품은 1973년에 나왔다.
흥행한 몇몇 작품들은 수많은 아류를 낳고 이와 함께 장르 관습은 확립되어 갔다. 힐링계 음식영화는 이후 산업화, 도시화가 더욱 진전됨에 따라 심화된 현대인들의 심리적 허기나 관계에 대한 욕구가 음식 콘텐츠와 결합하며 탄생한 장르로 볼 수 있다. 요컨대, 현재 두터운 일본의 음식 콘텐츠의 저변은 20년가량 앞선 대중문화사와 관련된 면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향후 음식 콘텐츠 소비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의 음식 영화 및 드라마, 먹방, 쿡방, 스타셰프 붐은 팽창의 시작에 가까울 것이다. 환경과 자원이 다르므로 ‘장르화’는 일본과는 다른 방식으로 될 것이다. 현재는 그 형태가 뚜렷이 그려지진 않지만, 이 추세대로라면 조만간 한국적인 음식만화/영화/에세이/소설 장르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있다.
추천 일본 음식 콘텐츠: 음식 에세이집 3권
끝으로, 나와 같은 물음을 가지고 긴 글을 읽어준 독자들을 위해 내가 특별히 흥미롭게 본 일본의 음식영화를 소개하려 했는데 이미 좋은 기사가 나와 있었다. 음식만화는 덕력 가득한 나무위키 요리만화 항목에 워낙 잘 정리돼 있다.
그래서 음식 에세이를 소개하려 한다. 한국에서는 5년 정도를 전후로 황교익, 박찬일 등 맛에 조예가 깊은 칼럼니스트가 나와 글을 쓰고 음식 에세이가 하나의 장르로 분류되어 가고 있지만, 일본은 진작에 그랬다. 일본 에세이들의 특성상 이 음식 에세이들도 그다지 진지하거나 무겁지 않다.
후쿠다 가즈야, 『나 홀로 미식 수업』
이 책의 제목은 매우 적절하다. 필자인 후쿠다 가즈야는 우선 홀로 당당하게 식사할 수 있을 때 ‘미식’이 시작된다고 전제하며, 정말 수업하듯 미식에 필요한 것들의 자신만의 확고한 관점에서 알려준다. 얼핏 시니컬하게 들리기도 하고 꼬장꼬장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확신 있는 어조가 주는 매력이 있다.
일본에서는 2009년에 출간되어 꽤 화제를 모았고, 22회 고단샤(일본의 유명 출판사) 에세이상을 받았다. 후쿠다 가즈야는 게이오대학 환경정보학부 교수이지만 사실 그는 전공보다 문필가로 더 이름났다. 일본에서는 영향력 있는 문예평론가이다.
무라카미 류,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면 에세이집은 아니고 짧은 소설들이 묶여 있는 소설집이지만, 무라카미 류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에세이집처럼 읽힐 만한 책이다. 소설들의 주인공은 대체로 영상/광고/방송 업계에서 일을 하고 있는 중년의 남자인데, 류의 이력과 유사하다. 이 남자가 우연한 계기로 음식 및 여성들과 얽히게 되는 이야기를 담백한 어조로 풀어놓고 있어 에세이처럼 후루룩 읽기 쉽다. 유럽의 고급 레스토랑에서나 맛볼 수 있는 진귀한 음식들이 마구 등장해 읽은 일이 다소 고통스러울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나는 열심히 구글 검색하며 읽었다…
요네하라 마리, 『미식견문록』
러시아어 통역사인 저자가 공식 석상에서 저지른 실수에 대한 에피소드로 시작해서 난데없이 알-달걀-병아리-육식-인생에 대한 이야기로 뻗쳐가는 스타일이 몹시나 매력적이다.
주제만 늘어놓고 보면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을 솜씨 좋게 꿰어 나가는데 무슨 얘길 하려는 건지 반신반의하며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종착역에 도착해있다. 잔잔하고 찡하고 유머러스한 에세이들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