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 1995
‘여행은 어떻게 두 사람을 맺어주는가’에 관해 지극히 낭만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그려낸 최고의 영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녀가 어떻게 어색함을 극복하고 서로의 마음에 가닿는지 보여준다. 비엔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에서, 주인공은 오직 둘뿐이며 앵글도 두 사람이 걸으며 하는 대화만 계속해서 비춘다. 정신없이 수다를 떨다가도, 고요히 거리를 바라보고, 가만히 음악을 드는 순간들이 현실을 농밀하게 담아냈다.
영화는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으로 이어지며 ‘여행, 사랑, 삶’에 관한 서사를 완성한다. 그러나 각각의 개별 작품들은 그 자체만으로 완벽하고, 무엇을 먼저 보든 각기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비포 선셋〉을 제일 먼저 보는 것을 추천하기도 한다. 암시로 가득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가, 〈비포 선라이즈〉를 봤을 때의 충격이란 잊을 수 없다. 단연코 여행과 사랑을 다룬 최고의 영화로 손꼽을 만하다.
정신 나간 이야기인 건 알지만, 말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너랑 계속 이야기하고 싶어. 너에 대해 잘 모르지만, 우리는 뭔가 통하는 것 같아. 함께 내려서 걸어 다니자. 너랑 함께면 더 즐거울 것 같아. 만약 내가 사이코인 게 판명나면, 너는 그저 다음 기차를 타면 돼.
2. 와일드 Wild, 2014
여행, 그중에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지평선을 향해 걷는 일이 어떻게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지 ‘체험’하게 하는 영화. 어머니의 사망 이후, 남편과 이혼하고, 스스로를 파탄으로 이끌었던 한 여성이 태평양 종주길을 횡단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길을 걸으며, 혹독한 과거의 기억들은 끊임없이 소환된다. 그러나 그녀는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점점 기억들이 증발하며 멀어지고, 그녀는 그 모든 걸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여행이 주는 특별한 힘에 관해 느끼게 만드는 영화다.
이제는 더 이상 텅 빈 손을 휘저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고 저 수면 아래를 헤엄치는 물고기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른 모든 사람의 인생처럼 나의 삶도 신비로우면서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고귀한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내 곁에 있는 바로 그것.
3. 인투 더 와일드 Into the Wild, 2007
진정한 삶을 향한 청춘의 투쟁은 어떻게 여행으로 실현되는가에 관한 이야기. 혈혈단신으로 알래스카로 떠난 크리스의 여정은 그 자체로 이미 감동적이다. 길에서 독거노인, 히피, 여행하는 커플 등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그는 이미 ‘진실한 삶’의 감각을 가지게 된다. 이윽고 아무도 없는 알래스카의 한 숲에 이르러, 그는 누구도 쉽게 도전할 수 없는 야생의 삶을 시작한다.
소비사회와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으로, 톨스토이와 소로우를 벗 삼아 새롭고 진실한 삶에 도전하는 일 자체에 숭고함이 있다. ‘우리의 삶이 다를 수도 있을까?’라는 질문에 하나의 대답을 제시해준다. 그것이 성공으로 끝나든, 실패로 끝나든 ‘다른 삶’에 귀중한 영감을 제공해주는 영화다.
2년 동안 그는 지구를 걷는다. 전화도, 돈도, 애완동물도, 담배도 없다. 완전한 자유. 극단주의자. 거리가 집인 심미적 여행자. 애틀랜타에서 벗어났다. 너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서부가 최고’이기 때문이다. 2년간의 방랑 후에 드디어 가장 위대한 모험이 다가온다. 내면의 잘못된 존재를 죽이고 영혼의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한 최고의 전쟁이다. 열흘 밤낮을 화물열차를 타고 히치하이크를 해서 그는 드디어 위대한 흰색의 북쪽 땅, 캐나다에 이른다. 그는 더 이상 문명에 오염된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며, 황야로 들어가기 위해 그 땅을 홀로 걷는다.
4. 온 더 로드 On The Road, 2012
이미 고전이 된 잭 케루악의 소설 『길 위에서』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 청춘을 가장 극단적으로 불태우는 방법에 관한 모든 것이 나와 있다. 섹스, 마약, 그리고 여행이 영화 내내 끊이지 않고 펼쳐진다. 좋게 말하면 청춘, 나쁘게 말하면 퇴폐이지만, 이 영화를 ‘퇴폐’보다는 ‘청춘’에 가깝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들이 부나 명예, 권력을 추구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지평선을 향해 여행하며 삶의 ‘불태움’을 추구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두 주인공, 샐과 딘의 대비도 흥미롭다. 잭 케루악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 샐, 그리고 그와 함께했던 친구 딘. 샐은 청춘의 경험을 치열한 글쓰기를 통해 회수해내지만, 딘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화려한 청춘과 그 씁쓸한 뒷맛을 이보다 더 강렬하게 보여주는 영화는 없다.
노을이 붉게 물들 무렵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 순간은 내 평생 단 한 번밖에 없었던, 아주 독특하고도 묘한 순간이었다. 나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여독에 지쳐 뭔가에 홀린 듯한 상태였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싸구려 호텔 방 안에서, 밖에서 들려오는 증기기관의 씩씩거리는 소리, 호텔의 오래된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 위층의 발소리, 그리고 온갖 종류의 슬픈 소리를 들으며 금이 간 높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상하게도 한 십오 초 동안 내가 누군지 정말로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겁이 나진 않았다. 나는 그저 다른 누군가, 어떤 낯선 사람이 되었고, 나의 삶 전체는 뭔가에 홀린 유령의 삶이 되었다.
5.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Lazy hitchhikers’ tour de europe, 2013
주변 어딘가에도 있을 것 같은 한국의 청춘 셋이서 여행을 통해 삶을 바꾸는 이야기. 청춘이 절망하는 대한민국에 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요즘, 단비 같은 성취를 이야기하는 청춘 여행 영화다. 절망에 대처하는 하나의 방법을 알려준다.
‘여행은 청춘을 바꿀 수 있을까?’에 관한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대답이 담겨 있다. 여행은 가짜이고 낭만에 불과할 뿐이어서 그저 도피와 쾌락인 것만도 아니고, 반대로 여행만 다녀오면 어마어마한 변화가 삶에 도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떤 여행, 진정한 여행은 정말로 삶을 바꿀 수도 있다. 이 영화는 그 가능성으로 이르는 하나의 길을 보여준다.
마침내 우리의 긴 여정이 끝이 났다. 이제 우리에겐 돌아갈 학교도 남아 있는 돈도 우리의 프로젝트도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한 번의 도전이 끝났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멈추는 건 아닐 것이다. 우리를 망설이게 했던 건 사소한 것에 불과했고, 무모하고 위태로운 선택들이 오히려 우리를 용기 낼 수 있게 했다. 이제 우리는 길을 헤매거나 멈출 수밖에 없는 날이 오더라도 다시 한 걸음 나아가는 걸 결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6.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Vicky Cristina Barcelona, 2008
바르셀로나로 떠난 각기 다른 성향의 두 여성이 로맨스에 대처하는 방법. 이상한 제목으로 번역되긴 했지만(그래서 제목은 원제를 직역해서 썼지만), 실제로는 ‘여행과 사랑’을 다룬 영화 중에서 손에 꼽을 만큼 재치와 재미, 깊이를 겸비했다. 게다가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유명 배우들로 구성된 라인업이 눈을 즐겁게 하기까지 한다.
인생 최고의 낭만 중 하나가 ‘여행지에서 만난 연인과의 빛나는 로맨스’ 아닐까? 낭만의 현실적 시선을 항상 견지해 온 우디 앨런의 작품답게, 이 영화에서 역시 낭만과 현실이 서로 싸우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행지에서의 낭만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반드시 참고해야 할 영화.
어느덧 수많은 사람이 사랑이나 낭만을 기대하며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시점에서, 오히려 여행지야말로 가장 적절한 소개팅 장소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출퇴근길의 지하철에서라면 그냥 지나쳤을 사람도 외국의 기차에서라면 서로에게 호감과 관심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일상의 식당에서라면 인사조차 하지 않았을 사람에게도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더 이상 ‘여행지에서 만나는 낯선 사랑’이 환상보다는 현실에 가까운 시대에 살게 된 셈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행을 떠나는 수많은 사람의 환상이 서로 엮이면서 현실을 만들어 내고 있다.
- 『당신의 여행에게 묻습니다』
7.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 The Best Exotic Marigold Hotel, 2012
노년의, 혹은 황혼의 여행이란 오직 ‘효도 관광’ 뿐일까? 이 영화는 청춘 못지않은 노년의 여행을 보여준다. 각기 다른 사정과 과거, 상처를 가진 노인들이 여행길에 올라 어떻게 각자의 삶을 완성하는지 혹은 새롭게 시작하는지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가감 없고 현실적이어서 마치 실화가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노년의 여행에 관한 이야기긴 하지만, 패기 넘치는 청춘 역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나이가 어떻든, 이 영화를 가장 참고하기 좋은 나이는 아마도 ‘청춘’이 아닐까 싶다. 노년에 이르러 새롭게 시작하는 삶을 이 영화는 끊임없이 말해주는데, 현실적으로 그런 가능성을 가장 속 깊게 받아들일 시청자는 역시 청춘일 것이다.
진짜 실패는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 것이다. 성공의 척도는 절망을 극복하는 자세에 있다. 항상 그래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이곳에서 시작했다.
늙어서 변화하려는 것에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있는가? 다시 시작하면 실망할까 두려운가? 아침에 일어나서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다. 다른 건 문제 될 게 없다.
아무것도 감내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미래가 다를 것을 기대한다. 오히려 같은 현실의 반복이 두렵다. 그러니 변화에 기뻐해야 한다. 누구의 말처럼 ‘결국 다 괜찮을 테니까.
8. 노킹 온 헤븐스 도어 Knockin’ On Heaven’s Door, 1997
시한부 선고를 받은 두 남자가 바다를 보기 위해 떠나는 여정을 그리는 영화. 그들의 여정은 무모하고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지만, 그들이 열망과 마음만큼은 진짜다. 죽음과 여행을 동시에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이면서, 범죄 영화 특유의 역동성도 느낄 수 있다.
이 영화는 마이클 아리아스에 의해 〈헤븐스 도어〉로 패러디되기도 했는데, 패러디 영화 역시 훌륭하다. 〈헤븐스 도어〉에서는 두 남자 대신 두 남여가 등장하기 때문에, 더 감성적인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어느 쪽이든 다 좋지만, 원작보다 패러디 영화인 〈헤븐스 도어〉를 먼저 본다면 일본 영화 특유의 깊은 감성에 더 몰입할 수 있다.
삶이 절박할 때, 청춘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낄 때, 죽음이 다가왔을 때 인간은 여행을 생각한다. 무한히 펼쳐진 지평선, 빛나는 수평선, 한 번도 닿은 적 없는 낯선 땅, 혹은 서로를 반기는 사람들이 있는 환영의 땅이 손에 잡힐 듯 떠오른다. 삶의 위기 속에서 우리는 지금껏 자신을 지배해 왔던 자기방어의 성벽을 허물어뜨리고 드디어 저 ‘밖’으로 나설 수 있게 된다.
- 『당신의 여행에게 묻습니다』
9. 원 위크 One Week, 2008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단 하루, 일주일, 혹은 한 달이라면,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질문으로 이 영화는 시작한다. 그는 죽음 앞에서야, 자신이 선택한 교사로서의 삶과 거기에 덧붙여질 약혼녀와의 결혼, 그렇게 줄곧 이어질 인생 전반을 부정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제껏 떠나지 못했던 여행을 떠난다.
헐리우드식 낭만적 서사가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서사 속에서 광활한 캐나다의 대자연을 감상할 수 있다. 엄청나게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거나 화려한 서사를 자랑하기보다는, 줄곧 잔잔하고 현실적인 분위기 속에서 영화는 이어진다. 죽음과 여행에 관해 깊이 있게 생각해볼 기회다.
여행은 언제나 다른 삶에 대한 은유다. 죽음 앞에 선 누군가는, 혹은 우리는 미친 듯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이 아닌 다른 삶으로 내달려가고 싶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진실이라면, 기회는 죽음 앞에서가 아니라 지금밖에 없다.
- 『당신의 여행에게 묻습니다』
10. 어웨이 위 고 Away We Go, 2009
버트와 베로나라는 30대 연인이 아이를 갖게 되면서 떠나는 여정. 여정은 콜로라도에서 시작해서 애리조나주의 피닉스와 투싼, 위스콘신주의 매디슨, 그리고 캐나다의 몬트리올과 플로리다주의 마이애미까지 이어진다. 그들은 각 장소에서 각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가족들을 만난다. 그들은 꿈같은 가정을 이루고 사는 사람 곁에 있으면 자신들도 그럴 거라는 기대를 품는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으로 보이는 가족에게조차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문제를 껴안고 삶을 견뎌 나간다.
여행을 통해 그들은 이상적인 곳에 도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 자신에게 머무는 법을 배운다. 여행은 그들을 탈출시켜서 새로운 곳으로 인도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원래 있던 곳에서 삶을 출발하게끔 하는 바탕이 되어 준다. 세상 다른 곳에 여기보다 더 멋진 삶이 있을 거라는 환상으로 떠난 여행은 그들에게 세상 여러 곳의 현실들을 경험하게 하며, 그로 인해 지혜를 얻게 하고, 자신들의 삶을 일궈갈 용기를 준다.
“버트, 우리는 루저일까?”
“아니. 무슨 말이야?”
“우리 벌써 34살인데, 기본적인 것도 모르잖아.”
“어떤 거?”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
“우리는 루저 아니야.”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