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변의 한류 팬 3인 3색
1. 테니스 메이트 N상,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콘텐츠 중심 소비자’
40대 초중반의 N상은 테니스라는 취미 생활을 통해서 알게 된 지인이다. 순수하게 운동이라는 취미생활을 통해 만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끝에는 ‘한류 드라마’가 있었다. 본인이 한류 드라마를 많이 보는데, 회사에서도 한국 남자들이 너무 멋있다고 여직원들이랑 이야기하고 있으면,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남편이 옆에서 화를 낸다고 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한국 남자들이 자상하게 나오지! 실제로는 가정 폭력도 많고 현실은 달라!
그러면서 정말 그렇냐고, 아니라고 말해달라고 하셨다… (엇) 남편을 소개해주자, “박서준과 같은 박상이네요”라고도(박서준은 넥스트 욘사마가 되려나?) 참고로 그 이후로 우리 남편 한드 남주 코스프레가 시작되었다. 왜 그랬어요, N상…
N상은 한국 콘텐츠를 많이 보지만 그 관심이 한국 음식, 여행, 화장품 등으로 확장되지는 않고 있다. 단순히 콘텐츠의 작품성과 배우들의 수려한 외모(!)에 빠져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보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점점 일본 드라마는 시시해서 안 보게 된다고 했다.
2. 남편의 일본어 선생님 N선생님: 드라마를 중심으로 시작된 관심이 음식, 화장품 등의 소비로까지 확대된 ‘콘텐츠 + 라이프스타일 소비자’
올해 60세 정년을 맞은 N선생님은 ‘일본인들이 무얼 하나 좋아하면 이렇게까지 끝장을 보는구나’를 알려준, 시니어 오타쿠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선생님 댁에 초대받아 남편과 함께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런데 선생님의 남편분은 고대 그리스 역사에 대해 운을 떼시더니 남편을 붙잡고 몇 시간 동안 놓아주지 않으셨고, N선생님은 나를 붙잡고 한국 드라마 이야기에 열을 올리셨다. <사랑의 불시착>을 왜 안 보냐고, 거기에 나오는 치킨이 뭐냐고, 일본에서도 먹을 수 있냐고, 국에서 이거 파는 곳이 어디냐고. (선생님, bbq는 한국 어디에 떨어져도 다 먹을 수 있어요…)
그러고선 족집게 강사라도 만났다는 듯이 날 컴퓨터 앞에 앉게 하고서 넷플릭스를 켜서 재미있는 한국 드라마를 집어 달라고 하셨다. 로맨스 코미디를 좋아하니까 무서운 거 말고 연애물로만 부탁한다며. 한국 드라마를 잘 모르는 나지만, 오며 가며 흘려들은 정보로 <도깨비>, <커피프린스>, <피노키오>, <동백꽃 필 무렵> 등 몇 편을 추천해 드렸다. (이틀 후에 도깨비를 다 봤다고, 공유 앓이를 하고 있다고 연락이 왔다)
매운 음식은 잘 먹지 못하지만 그래도 한국 음식이니까 신라면을 먹어보려 노력하고, 틈만 나면 한국으로 여행 가서 명동의 롯데호텔에 묵으시면서 맛집 탐방과 화장품 쇼핑을 하신다. 예전에 한국에서 사 온 화장품을 꺼내 보여주시기도 하셨다. 나만큼이나 코로나 때문에 한국을 못 가서 슬퍼하고 계신 듯하다.
2020년은 얌전히 집에 있다 보니 지나가 버렸네요. 계속 넷플릭스를 봤답니다. 한국 드라마라면 뭐든지 저에게 물어봐 주세요. 여러분 모두 올 한 해 멋진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언어교환 파트너 H상: 음악, 드라마, 음식은 물론 한국어를 배우고 딸은 한국 남자랑 결혼시키겠다는 ‘유형 정의 불가 소비자’
일본에 와서 일본어-한국어 언어 교환 파트너로 만난 H상은 내가 아는 한류 팬 중에서 최고봉에 있다. 신오쿠보에 있는 학원을 다니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계셨고, 아이돌 음악도 바짝 꿰고 계신다. 처음 만났을 때 비투비의 육성재를 가장 좋아한다 하셨다. 어머님, 그게 누구인가요.
넷플릭스에 올라오는 한국 드라마는 웬만해서는 다 보고, 중학생, 고등학생인 두 따님들 역시 방탄, 트와이스를 좋아해서 한국 여행을 종종 함께 다녀오신다. 순대부터 삼계탕, 간장게장 등등 먹고 싶은 건 너무 많은데 당일치기 여행이라 몇 끼 못 먹어서 속상하다며 맛집 정보를 저장하실때의 그 안타까운 표정이란…
큰 따님은 춤을 좋아해서 방학을 이용해 서울의 댄스스쿨에 단기 유학도 갔다 오셨다고 한다. “나는 못 했지만 우리 딸은 꼭 한국 남자랑 결혼했으면 좋겠어요”라고 종종 얘기하시는데 그 꿈은 이루어질 것인가!
한 번은 한국 드라마의 어떤 점이 그렇게 재밌는 건지 여쭈어본 적이 있다. 잠시 생각하시더니 “신장이 달라요(身長の高さが違いますね”라고 하셨다. “일본 드라마에 나오는 남주는 키가 별로 안 큰데 한국 드라마는 딱 봐도 남자 주인공이 키가 엄청 크잖아요. 그게 너무 설레요” (나루호도…)
일본을 뜨겁게 달군 <사랑의 불시착>
2020년은 신기한 해였다. 한 해 전만 해도 한일관계가 험악할 대로 험악해져서 NO재팬 운동과 함께 지인들의 일본 방문 계획이 연이어 취소되었고, 일본 서점가에도 한국의 이영훈 교수가 주저자로 쓴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이 베스트셀러 코너에 버젓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틈타 평소에 숨겨오던 일본 우월주의를 드러내는 누군가 때문에 상처 받는 한국인도 주변에 있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2020년 일본은 너나 할 것 없이 한류 드라마에 홀딱 빠져버린 것 같다. 새로운 한류 드라마 붐이 일어난 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넷플릭스에 올라오는 한국 드라마의 인기는 연일 화제가 되었다. 그 중심에는 <사랑의 불시착>이 있었다. 2020년 2월에 넷플릭스에서 화려하게 데뷔한 후 이 글을 쓰고 있는 2021년 1월에도 종합 콘텐츠 top 10 에서 1위 자리를 사수하고 있는 드라마다.
그뿐이 아니다. “오늘 일본의 TOP10 콘텐츠(総合TOP10)”에 포함된 날짜를 기준으로 2020년 가장 화제가 된 드라마 순위를 보면 10개 중 5개가 한국 드라마다.
- 「愛の不時着」 사랑의 불시착
- 「梨泰院クラス」 이태원 클라쓰
- 「テラスハウス: Tokyo 2019-2020」 테라스하우스: 도쿄 2019-2020
- 「ハイキュー!!」 하이큐
- 「炎炎ノ消防隊」 불꽃 소방대
- 「サイコ だけど大丈夫」 사이코지만 괜찮아
- 「ARASHI’s Diary -Voyage-」 아라시 다이어리 – 보야지
- 「青春の記録」 청춘 기록
- 「キム秘書はいったい、なぜ?」 김비서가 왜 이럴까
- 「痛いのは嫌なので防御力に極振りしたいと思います。」 아픈 건 싫으니까 방어력에 올인하려고 합니다
주변에서 하도 이야기를 많이 해서 뒤늦게 <사랑의 불시착>을 봤다. 남한의 재벌녀가 패러글라이딩을 하다 돌풍에 휘말려 북한땅에 불시착하고 그곳의 엘리트 군인과 사랑에 빠진다는 당혹스러운 설정을 우선 받아들이고 보니, 의외로 매우 재미있는 것 아닌가! N센세께 드디어 우리도 <사랑의 불시착>을 봤다고, 재미있었다고 연락을 드리니 ‘거봐라 내가 뭐랬니 다 사람들이 빠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며, 드디어 우리가 한배를 탔다는 듯이 크게 기뻐하셨다.
넷플릭스에 공개된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까지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니 대단한 일이다. 볼 사람들은 이제 다 보지 않았나 싶었는데, 아직도 인기를 유지하는 게 대단했다. 그 이유는 <사랑의 불시착> 관련 기사를 좀 더 찾아보니 알 수 있었다. 신규 시청자뿐만 아니라 반복 시청자들의 숫자도 어마어마하더라.
어떤 기사는 드라마에 대해 토론하는 ‘줌 팬미팅’ 사례를 소개했다. 팬미팅에 참여한 사람 중에는 7~8번을 반복 시청한 사람도 있었다. 가장 좋았던 장면을 얘기하면서 현빈이 촛불을 맨손으로 눌러 끄는 장면이 너무 터프하고 설렜다고도. 찐팬들은 역시 깊이가 다르구나.
4차 한류 붐의 시작?
제1차 한류 붐
1차 한류 붐은 2003-2004년 일본 지상파를 통해 방영된 <겨울연가>가 포문을 열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장년층 주부 등 40대 이상의 여성팬을 중심으로 드라마가 히트를 치면서 한국 관광객도 크게 늘어났다. 당시 드라마 시청률이 20% 이상을 기록했다고.
하지만 드라마 종영 후에는 ‘욘사마’ 하나로만 한류 붐을 이끌어나가기는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겨울연가>와 비슷한 장르를 복사 붙여넣기 한 듯한 드라마들이 쏟아지면서, 다양성의 한계로 인해 고정 팬층을 확보하지 못하고 1차 한류 붐은 조용히 수그러들었다고 한다.
제2차 한류 붐
2차 한류 붐은 2010년부터 2014년 정도로, 소녀시대, 카라, 동방신기 같은 k-pop 아이돌 그룹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차 한류 붐의 타겟이 중장년 여성층이었던 반면, 2차 한류 붐의 팬층은 보다 어린 K-pop 팬층이었다. 이 당시의 한류 인기도 엄청났다고 하는데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 독도 방문과 일왕 사죄 발언으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 한다. 따로 가이드라인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여론이 악화되자 지상파에서는 한국 드라마 방영을 일제히 중단했고 K-pop 아이돌 역시 활동을 이어나가기 어려웠다.
제3차 한류 붐
이후 유튜브, SNS를 타고 2017년 즈음부터 제3차 한류 붐이 시작된다. 주인공은 바로 방탄소년단, 트와이스를 중심으로 한 K-Pop 아이돌 그룹. 특히 1020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큰 팬덤이 형성되면서, 매스미디어가 아닌 유튜브라는 동영상 플랫폼을 중심으로 한류 콘텐츠가 확산된 것이 이전 한류 붐과의 뚜렷한 차이점이다. 신오쿠보의 코리아타운에 한국 음식, 한국 화장품, 한국 패션 등을 경험할 수 있는 가게들이 늘어서면서 도쿄의 새로운 명소로 꼽히기 시작했다. 신오쿠보에서 치즈 핫도그, 치즈 닭갈비 등 한국 음식을 먹는 인증사진들이 sns에 가득 올라왔다. (치즈핫도그가 유명한 한국음식이더라구요…?)
제3차 한류 붐이 이전 한류 붐과 구별되는 큰 특징은, 팬층 연령대가 어린 만큼 자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 음악, 라이프스타일을 정치 관계와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는 점이다. 과거의 한류 붐이 양국 정치 관계로 부침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달리 2019년 한일관계가 다시 악화되었을 때에도 신오쿠보의 한인타운은 여전히 북적였다. 일본 미디어에서도 이전 한류 붐과 다른 제3차 한류 붐의 모습에 주목했다.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좋아서 한류 팬이 된 게 아니라 멋있는 아티스트를 좋아하다 보니 우연히 한국인인 건데, 정치 문제와 내가 좋아하는 건 분리해서 생각하고 싶다는 것이 당시 한류 팬들의 목소리였다. 덕분에 일본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한국 기업 입장에서도 정치 요인으로 인한 리스크가 줄어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로가 너무 감정적으로 접근해서 복잡해졌어요. 저도 정치적인 면에서는 한국의 주장이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것과 문화는 별개죠. 정치적 대립 때문에 민간교류를 중단하는 건 너무 어리석고 정치에 너무 끌려가는 것 같아요.
「お互いが感情的になりすぎてこじれてる。私も、政治的な話では韓国の主張がおかしいと思う点があるけれど、それと文化は別のもの。政治的な対立が原因で民間交流を中止するなんて馬鹿らしい話で、政治に振り回されすぎだと思う」
한류 팬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관련 기사 인터뷰 발언 (IT미디어)
제4차 한류 붐
그리고 2020년, 코로나로 전 국민이 집안에만 콕 박혀 지내야 했던 시기에 맞추어 한류 드라마들이 넷플릭스에서 무서운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드라마 붐을 새로운 한류 붐의 시작으로 보고 있는 시각이 자리를 잡고 있는 듯하다(※ 참고: Forbes Japan, 「『愛の不時着』で終わらない? 第4次韓流ブームの立役者」).
이전까지 한류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사람조차 <사랑의 불시착>과 <이태원 클라쓰>를 통해 한국 드라마에 입문했다. 어쩌면 이렇게 드라마가 재미있냐고 난리다. 개성있는 캐릭터와 빠른 전개, 일본 사람들도 관심이 많은 북한이라는 소재까지 활용한 로맨스는 열도를 뜨겁게 달구었다. 심지어 혐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우익 인물 햐쿠타 나오키 역시 <사랑의 불시착>을 너무 재미있게 봐 버렸다고 사과(?) 트윗을 올리기도 했다.
내가 아는 한국 vs 한류 속의 한국
K-pop으로 젊은 팬층을 확보한 후, 작품성이 높은 드라마로 남녀노소 경계 없이 폭넓은 팬층을 확보하면서 일본에서 한류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든다. 현재 일본의 한류를 이해하기 위해 내 입장에서 대입할 수 있는 예시를 찾아보려 해도 딱히 떠오르는 마땅한 예가 없다.
2년 전 일본에 와서 처음 신오쿠보 코리아타운에 갔을 때 이상하게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한입 베어 물면 길게 늘어지는 치즈 핫도그가 한국의 대표 음식인 것처럼 소개되어 있는 것도 이상하고, 한국인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인들도 자리를 잡고 호떡을 팔고 있는 모습도 어색했다. 한국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일본 사람들도 많이 놀러 올 텐데, 나에게도 낯선 풍경을 한국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싶고.
하지만 2020년의 4차 한류 붐을 피부로 경험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원하면 얼마든지 드라마에 등장하는 한국의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식재료도 살 수 있고, K-pop 아이돌이 광고하는 화장품도 살 수 있는 ‘코리아타운’을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의 노력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우는 것이다.
현재의 ‘한류’는 재능 있는 창작자와 연예인, 한국 기업, 현지 교민이 함께 만들어나가고 있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매력도를 보여주는 브랜드 파워이기도 하다. 한국 안에서도 한국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른데,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이 한류 속의 한국보다 더 정확하다고 단정하는 태도도 오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사람들이 특정한 이미지로 한류를 경험하고 있다면, 그런 모습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게 최선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능있는 창작자와 연예인, 한국의 기업들, 현지 교민들이 함께 만들어나가고 있는 ‘한류’라는 건 한국이라는 나라의 매력도를 보여주는 브랜드 파워이기도 하고, 한국 안에서도 한국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각자 다르듯이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이 이곳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한국보다 더 정확하다고 단정하려는 태도도 오만한 것 같고. 일본 사람들이 특정한 이미지로로 한류를 경험하고 있다면 그런 모습을 관찰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
<사랑의 불시착>이 알려준 것
해결하지 못한 과거 역사 문제로 양국의 관계가 여전히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런 와중에 혐오가 아닌 동경의 시선으로 한국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있다는 건 다양한 이유로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물론 한류 팬을 자처하는 일본인들 중에서도 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가들이 풀지 못하는 과거의 숙제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은 주어진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울고 웃을 수 있는 마음에서, 같은 가수를 보면서 소리 질러 응원하는 마음에서 조금씩 자라나고 있는 것 아닐까.
혐한과 한류가 여전히 공존하는 일본에서, 한류를 만들어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과 경외심을 느낀다.
원문: 할리할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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