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일하는 방식을 바꾸다
코로나19 전염이 확산되기 시작한 올해 3월부터 재택근무가 이어지고 있다. 12월 현재 제3파를 거치며 1일 확진자 수가 연일 새로운 기록을 갈아치우며, 나의 재택근무도 9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일자리를 잃어 순식간에 실업자가 된 사람들, 손님 발길이 뚝 끊겨 문을 닫거나 도산 위기에 처한 자영업자 소식 등 경제적인 쇼크부터 좋아하는 가수의 글로벌 콘서트 투어가 취소되어 방구석에서 온라인으로 언택트 콘서트를 감상할 수밖에 없는 개인적인 슬픔 등 코로나가 깊숙하게 우리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엇보다 나에게는 주 5일 출퇴근하던 삶에서 재택하는 삶으로 변한 것이 가장 큰 변화다(월급 삭감 없이, 잘릴 걱정 없이 계속 일하게 해주는 회사에 충성충성!) 며칠 전 있었던 회사 전체 행사는 사장님을 포함한 전 직원이 zoom으로 접속해 진행되었다. 온라인으로 전체 행사를 진행하는 건 처음이라, 인사부에서 고생을 한 듯했다.
회사에 주 5일 출근하지 않아도 업무는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다. 사실 너무나 위화감이 없어서, 그동안 무엇을 위해 매일 왕복 2시간이 넘는 통근 지하철을 견디었던가 의아할 정도이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도 없고, 해야 하는 일만 깔끔하게 할 수 있으니 내가 일을 이토록 좋아했던가 착각할 만큼 업무 시간이 즐겁다. 옆자리 동료와 잡담할 수 있는 짬짬이 시간이 그리워질 때도 있지만, 채팅으로 잡담(이라쓰고 소통이라 읽는다) 욕구도 해소할 수 있었다.
사실 회사 내부에서 코로나19 이전부터 텔레워크 도입에 대한 목소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윗선에서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보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느닷없이 등장한 바이러스가 이 시기상조라고 여겨지던 제도들을 일제히 시도할 수 있도록 나름 공헌(?)을 했다.
도장 찍으러 출근하는 소프트뱅크 회장님
하지만 일본 사회 전체를 보면 어떨까. 일본은 무지하게 변화가 없는 나라라고 많이들 얘기한다. 과거에 해왔던 방식을 고수하는 성향이 강하고, 변화에 따르는 실패의 위험을 누구도 감수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저것 논의를 다 거치고서도 결국 제자리인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디지털 강국 한국에 살다가 일본에 건너와 크고 작은 불편을 겪으며 몸소 깨달았다.
한국에서는 옛것(retro)을 현대적(new)으로 재해석한 뉴트로(newtro) 감성이 요 몇 년간 인기를 얻고 있지만, 일본에 오면 있는 그대로의 레트로를 경험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디지털 기술의 도입이 놀라울 만큼 뒤처져 있다. 코로나 사태로 4~5월 긴급사태 선언 당시, 많은 회사원들이 도장을 찍으러 회사에 나가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일본 국내 언론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조명되었다. 코로나 감염자 현황 역시 전산화되어 있지 않고, 팩스로 한장 한장 전달하기 때문에 실시간 통계 데이터 확보가 어렵다는 점 역시 까발려졌다.
아래 손정의 회장의 인터뷰를 보자. 사장님도 집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지 물어보는 질문에 인감도장을 찍으러 가끔씩 회사에 나간다고 대답하는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 한국의 미래는 정보통신기술에 있다고, 빌 게이츠와 동석한 자리에서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인터넷 통신망! 을 외쳤던, 바로 그분이 맞다. 소프트뱅크 내부 문서는 온라인으로 결재할 수 있지만, 정부 기관이나 다른 기업에서 여전히 실제 직인을 요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ㅠㅠ
도장 연맹 회장 = IT 담당 장관
일본은 도장 문화가 왜 아직까지 건재한 걸까? 전자서명이나 사인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도 왜 빨간색 인주가 묻은 도장으로 처리해야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정부의 코로나 확진자 현황이나 동선 파악부터 시작해서 기업의 재택근무까지 많은 것이 수작업으로, 매뉴얼하게 처리되는 일본에 코로나는 디지털화라는 큰 과제를 던졌다.
일본의 경제주간지 다이아몬드 지에서는 일본의 도장 문화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일본인들이 사실상 디지털화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일본의 99.7%가 중소기업인 상황에서 페이퍼리스니 텔레워크니 IT 인프라를 도입해서 업무 효율을 높일 수 있는 건 0.3%에 해당하는 대기업만의 경우라는 것.
2020년 3월 재택근무 실시 현황을 조사한 결과, 종업원 300인 이상의 기업 중 57.1%, 50인 이상 300인 이하의 기업 중 28.2%, 50인 이하 기업 중 14.4%가 재택근무를 실시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역시 규모가 큰 기업일수록 재택근무 도입 비율이 높다. 중소기업에서는 바로 옆자리에 있는 사장님한테 도장으로 결재를 받을 수 있는데, 굳이 비용을 들여서 IT 인프라에 투자를 하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려는 노력을 할 유인이 적다는 것.
심지어 도장 문화를 없애자는 얘기는 50년 전부터 나왔다고 한다. (50년 전에도 선구자들이 있었으니…) 아래 기사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도장문화의 비효율성을 지적한 목소리는 1952년에도 있었다. 1962년에는 은행에서 도장 없이 사인만으로 업무를 볼 수 있는 시대를 선언하기도 했다. <도장은 필요 없어요. 은행의 사인 시대>라고 해놓고, 작년에 은행 계좌 만들 때 도장 들고 간 사람 나야 나!
《都の機構改革きのう発足 行政簡素がねらい 課を充実、ハンコ減らす》(1952年11月5日)
《ハンコを乱用しすぎる_経済気象台》(1953年10月23日)
《「ハンコ行政」改善に「能率官」制度設ける_行政管理庁」(1960年9月19日)
《ハンコいりません 銀行に「サイン時代」》(1962年9月16日)
《くたびれる書類の旅 補助金100万もらうのにハンコ509 山梨県の場合》(1968年7月3日)
하지만 이 가설은 중소기업 비중이 99.9%인 한국의 디지털화 수준을 볼 때 설명력이 부족하다. 한국에서도 작은 기업들 안에서는 도장으로 결재를 받고 있을지 몰라도 관공서부터 금융기관까지 간단한 사인만으로도 충분히 본인 확인이 가능하다.
도장 문화를 지키기 원하는 거대한 이익 집단이 정치권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도요게이자이 기사 한 부분을 아래에 옮겨왔다.
종이와 도장 문화는 일본 특유의 문화로서 뿌리내리고 있다. 일본에는 ‘전일본도장협회(全日本印章業協会)’ 라고 하는 막강한 힘을 가진 단체가 있다. 1997년 자민당 행정개혁 추진본부가 각종 서류의 페이퍼리스화를 추진하려고 했을 때 이 단체를 중심으로 맹렬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고, 3만 5천 명이 서명을 하면서 해당 계획을 무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 도요게이자이, <日本のハンコ文化がどうしようもなくダメな訳>
당시에 3만 5천 명이라는 숫자는 정부 정책에 제동을 걸 수 있을 만큼 큰 숫자였나 보다. 이해관계 때문에 관공서를 비롯한 정부 기관에서 도장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는 의심은 현재 일본의 IT 담당 장관이 ‘일본의 인감 제도, 문화를 지키는 의원연맹(도장연맹)’ 회장직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그렇다. IT장관이 도장 문화도 지켜야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2019년 IT 담당 장관으로 임명된 당시 78세 다케모토 중원의원은 6월에 다음과 같은 언급을 남기며 도장 연맹 회장직을 내려놓았다.
나는 디지털화와 도장 문화의 계승 둘 사이에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도장 연맹의 회장직을 맡고 있기 때문에 디지털화에 반대한다고 의심하는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어 도장 연맹 회장직에서 사임한다.
코로나로 쟁점화가 되지 않았다면, 둘 다 계속했을 거라는 건가…
코로나19가 도장문화 바꿀까
변화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고령자 28.4%인 인구 구조, 새로운 기술 변화 도입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정치인이 IT 정책 책임자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정치 환경, 기존 도장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해 보전, 그리고 공개적으로 변화를 요구하기보다는 현재 시스템에 적응하는 쪽을 선택하는 일본인들의 성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본의 도장 문화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유지되어 오던 일본의 이 문화를 외부의 바이러스가 파괴하려고 한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X)이 2020년 일본의 주요한 화두로 부상한 배경에 역시 코로나19가 있었다. 아베 총리가 물러난 자리에 20년 9월 새로 취임한 스가 총리 역시 행정 디지털화를 주도할 ‘디지털청’을 신설하면서 디지털화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우리 회사에서도 재택근무가 장기화되자 도장을 찍어야 하는 란에 전자 날인을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도입했다. 일본의 미즈호은행에서는 앞으로 기업고객의 융자 계약을 전자 계약으로 진행하고, 도장 문화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한다는 방침을 밝혔다는 소식도 들린다.
일본이 변화가 없는 사회라고 하지만, 이렇게 외부의 강력한 충격이 변화의 속도를 확 앞당겼다. 아직까지는 도장이 더 안심이 된다며, 공식적이고 중요한 문서일수록 위조의 위험을 낮추기 위해 도장 결재가 필요하다는 전반적인 인식을 바이러스 녀석이 바꾸고 있다. 사회 내부에서의 변화가 더딜 경우, 이렇게 외부의 충격이 의도치 않았던 변화를 이끄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나저나 6월 당시 도장을 뽕뽕 찍으러 가끔씩 출근해야 한다던 손정의 회장님은 6개월이 지난 지금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원문: 할리할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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