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퇴사한 회사에 있을 때 유독 기억에 남는 의전이 있다. 의전의 끝판왕 총무실과 협업하는 프로젝트의 킥오프 미팅을 준비하던 날이었다. 그때 총무실 과장님은 프로젝트 막내였던 나에게 전화를 걸어 6명의 현업 팀장님들을 대상으로 칼국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나는 전화를 끊고 동공의 초점을 잃었다.
칼국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나…? 칼국수처럼 호불호 없는 음식이 어디 있어…? 팀장님들이 칼국수 싫어하는지는 어떻게 확인해…?
팀장님들한테 메신저로 ‘안녕하십니까 ○○팀 ○○○ 사원입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내일 예정된 킥오프 미팅 후 중식 관련하여 칼국수가 혹시 입맛에 맞지 않으실지 확인코자 연락드렸습니다.’ 이렇게라도 보내야 했던 걸까? 나는 지금도 그날을 칼국수의 날로 회상한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해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회사 예절을 배우는 것이다. 업무에 필요한 비즈니스 매너보다는, 윗사람들에게 실수하지 않기 위한 매너,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보여야 할 의전 사항이 우선이다. 술자리에서 직급에 따라 앉아 고개를 돌리는 법, 전화 응대 시 나의 상사와 발신자의 직급 차이에 따라 호칭을 달리하는 법 등….
무엇보다 신입사원에게는 ‘상석’만큼 헷갈리는 게 없다. 문에서 먼 안쪽 자리일수록, 문이 잘 보일수록, 풍경을 정면으로 볼 수 있을수록, 등받이가 있을수록… 상황과 장소에 따라 상석의 위치는 매번 달라진다. 신입사원이 미팅을 준비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언제나 좌석의 서열을 매기는 것이다.
퇴사한 지금도 절대 까먹지 않는 의전 규정이 하나 있다. 엘리베이터 의전인데, 탈 때는 아랫사람이 먼저 타서 엘리베이터를 조작하고, 내릴 때는 임원이나 상사가 먼저 내릴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걸 쉽게 외우는 방법이 있다.
엘리베이터를 아주 위험한 곳으로 생각해. 그러니까 네가 먼저 들어가서, 나중에 나와야 한다는 거지.
이런 의전은 사람 사이에 필요한 예의라고는 하지만 그 예의의 수혜가 일방적인 경우가 많았다. 행사를 준비할 때도 콘텐츠의 내용이나 임직원과의 커뮤니케이션보단 내빈으로 모실 임원 중심으로 행사가 기획되었다. 거추장스러운 의전 업무 때문에 정작 업무의 본질에 신경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아랫사람 입장에서는 그저 각 상황에 맞는 매뉴얼을 암기하고 수행해야 했다. 그것이 그곳 문화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상급자에게 마땅한 “예의”를 보이고, 그들의 시간을 1초도 낭비하지 않게 준비하고, 심기를 거슬리게 하지 않는 것.
회사의 조직문화를 좌지우지하는 의전이란 과연 무엇인가
의전의 사전적 정의는 “행사를 치르는 일정한 법식”이다. 하지만 김원영 변호사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밝힌 의전의 정의가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책에 따르면 의전은 “상급자의 품격, 권위, 상징을 위해 복무하는 노력”이며, “지위가 높은 사람이 그에 어울리는 여유롭고 품격 있는 움직임과 확고한 권위를 드러내고, 자기를 과시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무대 설계”다.
가장 편한 의자, 기다릴 필요 없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절차, 당황할 리 없도록 사전에 불안정한 요소를 철저히 제거하는 답사…. VIP는 스스로 별다른 통제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허둥지둥 댈 일이 없고, 위급한 일이 발생해도 그를 모시는 사람들이 알아서 해결한다.
-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이때 무대의 주인공은 의전의 혜택을 받는 상급자 1인이다. 그의 완벽하고 품격 있는 수행을 위해 아랫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대를 설계하는데 동원된다. 이 일인자의 위치는 직급과 직책에 따라 갈대처럼 달라진다. 팀장이 일인자였다가도, 이사가 오면, 전무가 오면, CEO가 오면 무대의 주인공은 바뀐다. 이 무대의 최하단에는 당연히 신입 사원이 있다. “위험한 곳에 더 오래 머물러야 하는” 회사 카스트의 최하단.
윗사람에 대한 의전이 지극 정성인 사람일수록, 아랫사람들에게 대접받는 것에 집착한다. 그들에게 의전이란 내내 나이와 직위에 걸맞게 훈장이자, 권리이자, 마땅히 누릴 품격이다. 자신의 품격을 남이 나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에서 찾는 이러한 태도는 갑과 을이 명확히 나눠진 위계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제 높이 올라갈수록 더 높은 의전을 요구하는 갑질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의전의 과잉, 친절 과잉의 시대, 이 시대에 진상의 등장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의 품격을 존엄한 내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서 찾는 사람들이다.
일인자를 위한 과잉 의전은 무대를 설계하는 아랫사람뿐 아니라, 그 무대에 동원되는 다수에게 피해를 준다. ‘의전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황교안 전 국무총리는 2015년 서울 구로구에 있는 한 노인종합복지관을 방문했다. 복지관 측은 황 전 총리의 차질 없는 이동을 위해 노인들이 사용하는 엘리베이터를 막고 황 총리를 기다렸고, 노인들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사용해야 했다. 그는 본인의 일정 수행을 위해 서울역 플랫폼 안까지 의전 차량을 타고 들어간 일명 “황교안 에쿠스” 사건으로 질타를 받기도 했다.
밀양에서는 3월 13일 만세운동 기념행사가 과잉 의전으로 논란이 됐다. 야외 행사의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지만 당시 참석한 내빈들의 인사말을 모두 소개하느라 시간이 길어지면서, 교복 위에 한복만 입고 참가했던 중고생들은 추위 속에 몸을 떨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알맹이는 가고 껍데기만 남은 관례적 의전 문화
모든 의전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문제는 의전이 행사의 취지·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합목적적으로 진행되고 있느냐다. 대통령이나 CEO, 권력이 높은 소수의 품격을 높여주기 위해 다수의 존엄성이 피해를 본다면, 과도한 의전 절차로 전체의 시간과 비용이 낭비된다면 과감히 줄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특히 의전은 선례와 관행이 중요하다 보니, 한번 생긴 의전 질서가 사라지기는 쉽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구시대적이고 효과성이 전혀 없는 것도 “예절”이라는 관습 아래 상투적으로 존재한다. 일본의 회사에는 최고 상급자에게 예의를 표하기 위해 허리를 숙이듯 기울여 도장을 찍는 결재 문화가 있다. 의전의 껍데기만 남아버린 사례다.
최근 지자체에서는 과도하거나 불분명한 의전을 타파하기 위해 ‘행사 의전 간소화’를 추진하는 추세다. 은평구는 우산 씌워주기, 차 문 열어주기 등 불필요한 의전 관행을 없애고, 과도한 내빈소개와 축사 의원을 최소화하는 「은평구 행사 실무 편람」을 전 부서에 배부했다. 창원시는 역시 과잉 의전 논란을 계기로 “시민 중심 의전 행사”를 마련했다. 시민 중심이라는 취지에 맞게 기존에 내빈이 차지한 앞자리는 시민에게 돌려주고, 시장과 초청 인사는 객석 가운데 자리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아울러 내빈 소개도 전광판 자막을 활용하거나 부득이할 시 직위, 성명만 소개한다.
불필요한 의전에 따르는 시간 낭비를 최소화하고 행사의 주인공을 시민에게 돌려주겠다는 의미다. 이러한 원칙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의전 간소화의 모범을 보이는 상급자들의 선례가 중요하다. 갑을 문화가 그대로인 상황에서 아랫것이 먼저 의전 축소를 시도하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의전은 소수를 위한 무대 설계가 아닌, 다수를 위한 합리적인 배려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일과 행사의 본질을 생각해야 한다. 프로젝트의 원활한 시작은 그날 점심 팀장급이 무엇을 먹느냐에 결정되지 않는다. 칼국수 호불호를 조사할 시간에 더 중요한 업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품격은 타인의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본인에게서 나온다.
원문: 사과집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