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에서 이어집니다.
세 번째 집, 홀로 살아보는 역삼동 반지하
서울살이 1년 반 만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혼자 살 집을 구하게 됐다. 1년 반 동안 나는 내 작고 귀여운 월급을 착실히도 모았다. 하지만, 내가 이직하는 광고회사 소재지는 강남구 논현동. 이 근처에 혼자 살 원룸 전세를 구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왜 광고회사들은 다 여기 모여있는 거야? 심통이 났지만,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집을 구하는 명확한 조건은 회사까지의 거리와 월세였다. 이전 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으로 비추어 보아 야근은 밥 먹듯이 할 것이고, 나 같은 올빼미는 아침에 일어나는 게 고역이니 무조건 회사 도보 15분 거리 이내의 집을 찾길 원했다. 문제는 내가 내민 월세의 조건이었는데, 웃기게도 난 이 강남구 한복판에서 월세 40만 원대의 집을 원했다. 영등포 푸르지오 아파트 전체를 (타의적으로) 40만 원대에 주고 살았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허무맹랑한 자신감이었다.
그러나, 부동산 차를 타고 회사 근처의 집을 빙글빙글 돌아보니 강남에서 이 조건의 원룸은 옥탑방, 반지하, 아니면 아주아주 시설이 노후화된 집들뿐이었다. 어차피 하루 종일 회사에 있다가 집에서 잠만 잘 텐데 위치가 어딘들 상관없겠다 싶어 그중 가장 방 컨디션이 좋은 반지하 원룸을 골랐다.
이것이 바로 자취 대암흑기의 시작이라는 걸 이때는 몰랐다. 계단을 5칸 정도 내려가는 층수에, 9평의 분리형 원룸, 한 층에 3가구가 사는 좀 큰 빌라였다. 회사까지는 뛰면 10분 컷. 이 정도면 진짜 잘 구한 집이라 생각했다.
1년 계약을 쾅쾅 찍으니 한껏 마음이 들떠왔다. 오늘의 집과 집 꾸미기 앱을 들락날락거리며 남들이 한껏 뽐내놓은 인테리어를 내 원룸에 갖다 놓는 상상을 했다. 내가 진짜 혼자 쓰는 내 집이니 내 맘대로 꾸밀 거야! 한껏 행복 회로를 돌리고 집주인 아저씨께 전화를 걸었다.
아저씨! 저 101호 세입자입니다. 제가 집 내부 인테리어를 좀 하려고 하는데, 페인트칠이랑 시트지 좀 붙여도 되나요? 깔끔하게 바꿔놓을게요!”
“… 월세 처음 살아봐요? 이 집 나갈 때 처음 상태 그대로 원상복구 안 해놓으면 다 비용으로 배상해야 돼. 누가 남의 집에 인테리어를 해요. 허허. 그냥 지내세요.”
“아… 넵….”
남의 집엔 못질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걸 그때 알았다. 인테리어는 좀 포기했지만, 그래도 친구들이 말했던 아주 자유롭고 편안한 생활이 시작됐다.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자유로움은 이런 거구나. 방을 마구 어지르고, 부엌 설거지가 좀 쌓여도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었다. 1층이라 노래도 부르고 집에서 춤도 마구 췄다. 하지만, 혼자 살아서 가장 좋았던 건 방구를 아주 시원하게 빵빵 뀔 수 있다는 것이었다. 와. 이것이 진정한 프리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자유로움이 주는 즐거움의 유통기한은 내게 그리 길지 않았다. 이 원룸에서 생활한 지 한 달이 넘어가는 시점부터 나는 심각하게 몸과 마음이 병들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혼자 살아보는 인간이라 어색해서 그럴 거야, 라고 생각하기에 이 불편감들은 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거의 매일 밤 울면서 가족과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 저녁 약속을 집고, 귀갓길엔 항상 집 주변을 빙빙 돌면서 배회했다.
왜? 그렇게나 혼자 살아보고 싶다던 내가 대체 왜? 뭐가 저렇게나 힘들고 슬펐던 걸까.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혼자 살 때 인간이 힘들 수 있는 4가지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힘든 요소들이 모두 뭉쳐있는 최악의 혼삶을 경험했던 거라는 사실도 함께.
혼자일수록, 더 좋은 공간에 머물러야 해
4가지 요소 중 첫 번째는 단연코 ‘공간’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기생충>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그거 반지하 냄새야. 이사 가야 없어져.
부잣집에 위장 취업을 한 가족 네 명 모두에게서 같은 냄새가 난다는 걸 발견하고는 세제를 바꿔야 하나, 물빨래를 잘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기정이가 한 말이다. 반지하 특유의 꿉꿉한 냄새는 이사를 가야만 없어진다고.
영화를 보면서 내가 저 대사를 절절히 공감할 수 있어서 한편으로는 좋았다가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늘 아파트 아니면 빌라를 살았던 나는 ‘반지하 냄새’가 존재하는 줄 몰랐다. 뭐 다 같은 집 아닌가? 아예 지하실도 아닌데?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절대 아니다. 반지하는 지상의 냄새와 바닥에서 올라오는 지하의 냄새가 반쯤 섞인 오묘하고 쾌쾌한 냄새가 난다. 그 안에 살다 보면 옷, 물건, 심지어 머리카락까지도 그 냄새가 스며든다.
하루는 회사에 늦을까 봐 뛰어가고 있는데, 내 머리카락이 휘날리면서 내 얼굴을 스쳤다.
아, 이게 무슨 냄새지?
분명 어제저녁 뽀송하게 감아뒀던 머리에서 특유의 꿉꿉한 냄새가 났다. 후각에 민감했던 나는 회사에 앉아 겉옷, 티셔츠에 코를 대고 킁킁 맡아봤다. 모두 같은 냄새가 났다. 그때 깨달았다. 아, 이게 반지하 냄새구나. 세제나 섬유유연제를 아무리 팍팍 쳐대도 부족했다. 말릴 때 공기에 있는 반지하 냄새가 스며들기 때문에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반지하의 또 다른 단점은 바로 빛이 반만 들어온다는 점이다. 나는 사람에게 햇빛이 그렇게 크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줄 몰랐다.
회사 다녀오면 어차피 저녁 아냐?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라. 일찍 퇴근한 날, 반차를 낸 날, 아픈 날, 주말 낮 시간, 집에서 쉬고 싶은 날. 퇴근해도 해가 밝은 날.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주거 공간에서 보낸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빛이 반쯤 들어오게 되면 지금이 몇 시인지 알 수가 없다. 불을 켜놓지 않으면 낮에는 저녁 같고, 저녁에는 밤 같고, 밤에는 더 칠흑 같은 암흑이 된다. 낮 없이 밤이 계속되는 기분이다. 오랜 시간 있다 보면 내 기분과 감정도 점차 암흑으로 떨어지기 쉽다.
게다가 빛이 없으니 빨래가 잘 마르지 않는다. 비가 오는 날에는 수분이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해서 축축한 공기와 한 이불을 덮고 자야 한다. 빨래를 한번 해서 말리려면 제습기는 필수다. 곰팡이와의 싸움에서도 필수적인 무기다. 빛이 잘 안 드는 집에 사신다면, 제습기는 꼭 챙기셔라.
하지만, 내게 있어서 가장 무시무시했던 점은 바로 벌레의 등장이었다. 이름하야 바퀴벌레. 처음 이사를 왔을 때는 반지하치고 벌레도 안 나와서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큰 오산이었다. 그 친구들은 지하에 있는 하수구에 서식하기 때문에 언제든 가까운 구멍을 틈타 올라올 수 있다.
화장실 하수구, 부엌의 환풍구, 창문의 틈 언제 어디서 들어올지 모르는 긴장감 속에 나는 불을 끄기 무서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집주인 아저씨께 몇 번이고 하소연했지만 그때만 약을 쳐주시는 정도에 그쳤다. 잠들기 직전까지 정신이 피폐해지는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오래된 건물이라 화장실 전등도 자주 나갔고 변기도 자주 고장 났다. 철물점에 가거나 인터넷을 뒤져가며 고치려고 노력했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집주인 아저씨께 수리를 요청했다. 그나마 좋은 집주인이었기 때문에 집에 문제가 있을 때 나서서 봐주셨지만, 그렇지 않은 집주인들도 많이 있다. 혼자 사는 건 자유로운 대신 모든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한다. 이때의 경험으로 절절히 느끼게 됐다.
이렇게만 설명하면 정말 <기생충>에 등장하는 반지하에 살았던 것 같지만, 사실 꽤나 좋은 컨디션의 방이었다. 9평에 부엌과 방이 분리되어 있고, 넓고, 외관과 내부도 깔끔했다. 엄마가 와서 보고도 오케이 한 집이었으니까. ‘오늘의집’에 나오는 집을 나름 흉내 내 예쁘게 꾸민, 만족스러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인테리어가 예쁜 것과는 별개로 그 집의 조건에서 오는 결함들이 있다. 그것은 내가 견딜 수 없는 문제들이라는 걸, 살아보지 않고는 알 수 없었다.
혼자 자취하게 되는 주위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좀 더 돈을 주고서라도 좋은 집에 살라고 말해준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거기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라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누군가는 나처럼 잘 알지 못하고 덜컥 계약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꼭 말해주는 편이다.
누군가와 살 때보다 혼자 살 때 공간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은 이유는, 공간과 대화하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이다. 공간은 내 심리상태를 반영하기 때문에, 좋지 않은 공간에서 좋은 마음과 영감을 얻기는 어렵다. 이게 바로 4가지 요소에서 공간을 먼저 소개한 이유다.
그러니, 혼자 사신다면 꼭 좋은 집 구하시라. 마음에 안 드는 공간이면 마음에 들게 바꾸시라. 그래도 선택지가 있다면 반지하는 피하시길. 만약 살 수밖에 없다면, 제습기나 건조기는 어떻게든 장만하시길.
원문: 앤가은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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