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 편에는 직원이 손님 계산을 하던 도중에도 퇴근 시간이 되면 중단하고 가버리는 장면이 있다. 아무리 그래도 몇 분이나 차이 난다고 자기 월급 주는 가게 사정은 나 몰라라 하는 게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했었다. 얼마 전에는 유럽에서 버스회사가 대체인력을 구해주지 않자, 근무 시간을 다 채운 버스 기사가 손님을 태운 차를 중간에 내버려 두고 집에 가 버린 적이 있었다. 이것도 직업의식과 최소한의 책임감도 없는 사례로 보인다.
그런데, 안 되는 것들을 억지로 되게 하는 것이 지금 한국의 모습을 만들어온 것이 아닌가. 세워지지 말았어야 하는 백화점, 출항하지 말았어야 하는 배, 12시간 연속으로 운전하면 안 되었던 버스 기사, 사람이 모자라면 하지 말아야 했던 선로보수.
억지로 간신히 당장 문제만 안 생기게 덮어 놓으면, 안된다더니 결국 해냈으니 그 인력과 비용으로 충분하지 않으냐는 판단으로 돌아온다. 100을 지원받은 프로젝트를 50만 쓰고 해내면 다음에 150을 지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40으로 해보라고 한다. 24시간 돌아가는 병원에 의사가 한 명인 경우도 있다. 그런데 병원이 돌아간다. 의사 한 명이 한 달 동안 퇴근을 안 하는 30일 당직을 서기 때문이다. 동시에 두 명의 응급환자가 생기면 둘 중 하나는 죽는 거다.
원칙적으로 최소 두 명 이상이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확인해야 하는 보수공사를 한 명이 시간에 쫓겨 허덕이면서 억지로 하다가 기차에 치여 죽으면 불쌍한 노동자가 되고, 기차로 치어 죽이면 직업을 빼앗아야 하는 죽일 놈이 되는 것이다. 또한, 평소에도 인력이 부족하니 불시에 일이 생겨도 대체인력도 없어서 아파도 결근을 못 한다거나, 결근해도 공장은 돌릴 수밖에 없어 바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시스템의 문제는 일선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 치환되고 가장 문제가 된 개인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감춰진다. 사실 모든 사고가 그렇듯이, 그 순간만은 어떻게 모면할 수 있었다는 후회는 늘 가능하다. 아무리 혼자였어도 기차가 오지 않는지 계속 확인했어야 했다든지, 버스 운전을 할 대체 인력이 없었더라도 껌을 씹었다면 졸지는 않았을 것이라든지.
Safety margin 0의 사회. 한 번만 실수하면 대형참사가 되는 사회. 한 번만 실패해도 재기할 수 없는 사회. 한쪽에선 매일 야근을 하는데 한쪽에선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곳. 청춘 동안 야근하다 잘린 부장이 퇴직금으로 차린 음식점엔 야근하느라 바쁜 후배 직장인들이 가지 않는다.
이런 곳에서 여유의 산물인 출산과 창업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결과다. 대체휴일 하루, 아니 일주일이 없어서 애를 못 낳는 게 아니라, 평일 저녁 1시간이 없어서 애를 못 낳는 거다. 어차피 애를 못 낳으니 역설적으로 혼자 살기엔 돈이 남고 대체휴일 일주일을 만들어주면 해외로 가버리는 거다. 오후 4시에 집에 가라는 어린이집이 문제가 아니라, 밤 10시가 되어도 집에 못 돌아오는 부모의 사정인 것이다.
예전엔 외벌이가 기본이고 맞벌이는 좀 더 풍족하게 살기 위한 옵션이자 욕심이었다면, 요즘엔 맞벌이가 최소 기본이고 외벌이는 딱 혼자 숨만 쉬고 살 (고양이 정도의 사치는 허용되는 듯) 정도의 최저 생계비 기준에 맞춰진다. 어차피 사람들이 맞벌이를 다 하니까 기업에서도 임금을 올릴 만한 사회적 압력을 받지 않는다.
예전엔 외벌이로 풀칠하던 걸 맞벌이로 풀칠하니 보다 노오오력을 하는 것 말고는 비슷해 보이지만, 자식이라는 미래를 포기했다는 점이 다르다. 개인의 지극히 현명한 선택이 합쳐진 총합이, 국가적으론 멸종의 선택을 한 셈이다.
원문 : John Lee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