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뜬금없겠지만 신생아 얘기부터 시작하겠다. 아내가 첫째를 임신하고 한창 육아 관련 서적을 탐독하던 시절이다. 하루는 아내가 책을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나에게 질문했다.
“오빠, 신생아들은 똥을 싸면 부모가 치워주잖아. 그런데 신생아는 부모가 치우는 것을 빤히 보고 느끼면서도 자기가 치웠다고 생각한다네? 왜 그렇지?”
애기 똥 치우는 입장에서는 참 배신감 느낄 얘기다. 책에는 신생아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나오지 않았다. 자!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한 번 생각해보시라. 왜 그럴까? 아내에게 질문을 받고 신생아의 입장에서 세상이 어떻게 보일지를 생생하게 떠올리며, 동시에 똥 치워주는 상황을 찬찬히 따져봤다. 순식간에 깨달음이 오며 이유를 알아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신생아의 관점
예를 들어 신생아가 처음 태어나서 사람을 보고 있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물론 여기서 얘기하는 신생아는 눈이 트인 신생아를 말하는 것이다. 과연 신생아가 사람을 보고 ‘사람’이라고 해석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특정한 색깔의 조합을 보면 ‘사람’이라고 의미부여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당신이 TV 노이즈 화면을 보면 아무런 의미를 찾아낼 수 없듯이, 신생아는 자기 앞에 있는 특정한 색깔의 조합을 ‘사람’이라고 번역할 수 없다. 처음 보니까! 신생아에게는 TV 노이즈 화면과 당신의 모습이 ‘의미’상으로는 똑같다. 무의미!
신생아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당신 앞에 탁자가 하나 있다고 해보자. 손을 뻗어 그 탁자를 만져보자. 당신의 손으로 느끼고 있는 촉감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당연히 당신이 눈으로 보고 있는 탁자에서 나온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이 손으로 느끼는 촉감과 눈으로 보고 있는 탁자의 이미지는 도저히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일체로 느껴진다.
그런데 사실 촉감과 시각은 별개의 감각이다. 우리 모두가 눈이 없는 상태로 태어났다고 해보자. 우리가 손으로 느끼는 촉감이 시각과 연결될 수 있는가? 당연히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둘을 하나인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두뇌다. 뇌에서 별개의 감각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신생아는 손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속싸개로 감싼다. 손을 풀어놓으면 자기 얼굴을 긁어 상처를 내기 때문이다. 성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를 못 할 것이다. 자기 손 인줄 빤히 보면서도 왜 긁는지 말이다. 앞서 얘기했다. 신생아는 모든 것을 처음 보는 것이라고.
신생아는 밖에 움직이는 손가락 다섯 개가 달린 긴 물체가 자기의 팔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팔 근육으로 보내는 전기신호가 그 손가락 다섯 개 달린 긴 물체를 통제할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얼굴을 긁으면서도 통제를 할 수 없다. 그러던 신생아가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면 하루 종일 주먹을 쥐고 자기 눈앞에 가져다가 움직이면서 재밌게 논다. 그제야 눈에 보이는 주먹이 자신의 근육에 전기신호를 보내 통제할 수 있는 신체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제 신생아가 왜 똥을 자기가 치웠다고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준비가 됐다. 자, 신생아가 똥 쌌다. 찝찝해서 본능적으로 울었다. 당연히 부모가 신생아에게 다가간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 아이는 ‘부모’, ‘사람’이라는 개념조차 없다. 단지 자신이 울면 정체는 모르겠으나 눈앞에 특정한 색깔의 조합이 나타나는 것이다.
부모는 당연히 아이의 기저귀를 갈기 위해 바쁘게 손을 움직이며 물티슈로 정성스레 엉덩이를 닦는다. 신생아는 부모의 손놀림을 눈으로 보고 있겠으나, 앞서 얘기한대로 그 손의 움직임과 자기 엉덩이에 느껴지는 촉감을 하나로 통합해서 느끼지 못한다. 별개의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 ‘손’인줄도 모를 터이니.
신생아의 생각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똥 싸서 본능적으로 운다. 내가 울면 눈앞에 특정한 색깔의 조합이 나타난다. 그러고 나서 색깔의 조합이 움직이더니 엉덩이에서 촉감이 느껴진다. 잠시 후 엉덩이에서 똥이 말끔하게 없어진다. 누가 이것을 했는가? 자기가 한 것이다. 내가 울면 특정 색깔 패턴이 나타나고 시간차를 두고 엉덩이에 촉감이 느껴지면서 똥이 없어지는 것이다. 게임에서 마법사가 특정 주문을 외우니 마법이 발동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이렇듯 신생아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조차 없는 상태다. 그저 모니터 화면을 보듯 세상을 본다. 모든 사람이 네 살 이전 어릴 적 기억이 없다. 당연하다. 의미 부여를 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기억이 있겠나. 기억할 수 있는 형태의 언어조차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일 테고.
이러던 신생아가 외부세계와 수많은 경험과 소통을 하게 되면서 어느덧 ‘자아’가 형성이 된다. 대상세계와 자기 자신을 분리해서 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라나면서 아이는 어느덧 ‘사회화’가 된다. 우리가 소위 ‘의자’라고 부르는 특정한 모양의 물체를 보면 자연스럽게 앉는 행위를 하고, ‘연필’이라고 부르는 물체를 보면 자연스럽게 손에 쥐고 낙서를 한다. 이 모든 것이 후천적으로 경험을 통해 획득하는 것이다. 어느덧 아이는 자라서 학교를 다니며 ‘교육’을 받고 길들여진다.
교육은 관점을 세뇌시킨다
교육을 받고 길들여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내가 강연 때 자주 드는 예로 설명하겠다.
우리는 학교에서 세계사 시간에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고 배운다. 지리상의 발견인데 이거 생각할수록 골 때린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라틴아메리카 대륙에는 8천만 명의 선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이 이룩한 마야, 아즈텍, 잉카 문명은 지금 봐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할 정도로 찬란했다.
그런데 그들이 콜롬버스에 의해 발견됐다고? 라틴아메리카 선주민은 사람도 아닌가? 만약 콜롬버스가 15세기 말에 카리브해로 가지 않고 조선으로 왔으면 우리가 ‘발견’되는 건가? 이것은 발견이 아니라 그저 두 문명의 만남일 뿐이다.
그렇게 스페인이 라틴아메리카에 들어가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8천만 명에 육박하던 선주민이 2백만 명 정도만 남고 싹 몰살당했다. 누가 죽였는가? 스페인 사람들이 죽였다. 태워죽이고 찢어죽이고 노예로 부리다 죽이고 병균 퍼트려 죽이고, 정말 사람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이 과연 지리상의 발견인가, 스페인 제국주의의 침략인가? 우리는 세계사 시간에 이 사건을 도대체 누구의 ‘관점’에서 보고 있는가. 우리는 ‘교육’을 통해 이 사건을 스페인 제국주의의 관점에서 보도록 길들여진 것이다. 그렇다. 교육을 통해 길들여진다는 것은, 사물이나 사건 및 현상을 한쪽 관점에서만 보도록 세뇌되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스페인 제국주의 침략을 ‘지리상의 발견’으로 부르며 콜롬버스를 위인으로 알고 있지 않나. 이런 세뇌가 또 어디에 있는가?
개성의 시작은 관점의 변화에 있다
서두가 너무 장황했나?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 그렇다면 ‘개성’이란 무엇인가? 그저 남과 다른 것 정도를 개성이라고 짐작하는 경우가 많다. 카우치 사건 기억하는가? TV 가요프로그램 생방송 중에 출연자가 바지를 내려 성기를 노출했던 그 사건 말이다.
참 남과 다르다. 달라도 엄청나게 다르다. 그렇다고 우리는 이들을 개성 있다고 하지 않는다. 그저 미친놈이라고 부를 뿐이다. 진정한 개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관점의 전환’에서 나온다. 스페인의 관점에서는 콜롬버스가 지리상의 발견을 한 위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 선주민의 관점에서 동일한 사건을 보면 그것은 제국주의 침략일 뿐이다. 바로 이런 ‘관점의 전환’을 얘기하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독서의 중요성에 대한 글을 써오라고 한다면, 잘 쓰고 못 쓰는 편차는 있겠으나 대부분 이런 글을 써올 것이다. ‘책은 지식을 준다. 사람은 지식을 얻으면 똑똑해지고 성공할 수 있다. 대부분의 위인들은 독서광이었다. 우리도 성공하려면 책을 읽자.’
왜 그렇게 똑같은 취지로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서 쓸까? 독서라는 행위를 모두가 똑같은 관점, 그러니까 ‘지식을 준다’라는 관점에서만 보기 때문이다. 독서를 지식이라는 관점에서만 보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얘기가 나올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서 쓴 글을 소개하겠다.
사실 책과 신문 읽기는 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남는 장사’입니다. 저는 살면서 책과 신문 읽기보다 더 많이 남기는 장사를 본 적이 없습니다. 책과 신문을 읽는다고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책이나 신문을 사려면 내가 돈을 내야 하는데 도대체 뭐가 남는 장사냐고요?
가치판단의 기준에 ‘돈’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돈’에만 목숨을 걸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건 바로 ‘시간’, 즉 ‘인생’입니다. ‘돈’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시간’이라는 기준으로 측정해 보면 책과 신문 읽기가 얼마나 남는 장사인지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은 제가 10년을 ‘개고생’해서 쓴 책입니다. 그런데 독자는 그 내용을 하루 이틀 만에 읽어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듭니다. 물론 그것을 충실히 읽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겠지만, 그래도 제 입장에서는 참 약이 오르는 일입니다.
그 책을 구입하려면 15000원을 지불해야 합니다. 돈이라는 기준에서만 보면 호주머니에서 15000원이 빠져나가는 것이므로 손해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15000원을 내고 책을 읽음으로써 제 10년의 노하우를 하루 이틀 만에 쏙 빨아먹는다는 관점에서는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만약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직접 읽고 그 내용을 정리한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겁니다. 물론 저처럼 10년이 걸리지는 않겠지만 말이죠. 그래도 몇 년의 시간이 걸릴 테니 그 시간만큼 나이를 먹고 인생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을 읽는 독자는 ‘돈’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을 엄청나게 절약하는 셈입니다. 15000원에 10년을 벌 수 있다면 이건 보통 남는 장사가 아니지 않나요?
물론 모든 책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류 정신문명의 결정체, 즉 고전으로 불리는 기막힌 책도 있지만 간혹 종이에게 미안해지는 책도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인류의 고전으로 불리는 명작 100권을 읽는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훌륭한 고전에는 그 글을 쓴 천재의 평생의 노하우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의 평균수명을 80세로 보고 고전을 쓴 천재의 인생을 일반인의 세 배 가치로 계산하면, 80 곱하기 3은 240년이 나옵니다.
한 권에 240년의 노력이 들어 있는 고전을 100권 읽을 경우, 여러분의 인생은 240년 곱하기 100은 2만4000년으로 늘어납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수지맞는 장사가 또 있을까요? 저는 아직까지 이보다 더 수지맞는 장사를 본 적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고전에 담긴 천재들의 사상을 직접 체득하려 한다면 평생이 걸려도 불가능한 경우가 많을 겁니다. 하지만 책을 통해 천재들의 사상을 얻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한 대학신문사에 기고한 글인데, 나는 독서를 ‘지식’이 아닌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 그런 관점을 통해 독서는 시간을 벌어준다는 개성적인 주장을 할 수 있게 됐다. 남들이 보지 않는 방향에서 독서라는 행위를 들여다보니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본다. 컵을 위에서 볼 때, 옆에서 볼 때, 밑에서 볼 때가 다르듯. 그렇다. 개성이란 ‘사회화’와 ‘교육’을 통해 사건과 사물 및 현상을 한쪽 방향에서만 보도록 길들여진 상태, 바로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래서 감히 얘기한다. 개성, ‘관점의 전환’은 위대하다!
관점의 변화로 글을 창조하기
이번에는 조금 긴 글 하나를 인용하겠다. 내가 쓴 책 『청춘에게 딴짓을 권한다』에 나오는 내용이다. 내가 쓴 글이지만 참 괜찮은 글이다. ‘직업이란 인생의 1/3을 파는 것이다’라는 제목의 글인데, 좀 길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찬찬히 읽어보시라.
직업이란 인생의 1/3을 파는 것이다
“男·女 32.3% ‘면접 위해, 성형 가능하다’”
“외모가 사회경쟁력! 취업 준비생들 성형 증가”
“취업? 그대 눈에 달렸다…‘쌍꺼풀’ 수술하는 남자들”
“면접의 준비, 쁘띠성형부터~ ”이런 헤드라인이 달린 기사들을 발견하고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설마 취업 때문에 성형까지 할까? 그래서 혹시나 해서 포털 검색창에 ‘취업성형’을 검색했더니 스폰서링크가 마구 뜹니다. ‘면접관 선호 성형, 아나운서가 많이 찾는 성형외과, 면접관 호감 얼굴 연출, 취업성형 실시간 상담’ 이런 문구들이 가득하더군요. 얼마나 수요가 많으면 스폰서링크까지 있을까요. 정말 취업이 절대 절명의 지상과제이긴 합니다. 이렇게 얼굴까지 고칠 정도니까요.
그런데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얼굴을 고칠 정도로 취업에 목매달지만 막상 직업을 가진다는 것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거든요.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우선은 부모님에게 신세지는 것을 벗어나서 자신이 직접 돈을 벌고 그 돈을 쓰게 된다는 의미가 있을 겁니다. 돈 벌면 솔직히 기분 좋잖아요? 이제 막 직장에 다니게 된 사람들 대부분은 월급을 타면 뭘 살지 쇼핑리스트를 작성하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첫 월급을 타면 생각보다 적은 액수에 다소 실망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저에게 직업을 가진다는 의미는 이런 것과는 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무엇보다도 매일매일 아침 9시까지 칼같이 출근을 해서 저녁 늦게 퇴근을 하는 생활이 끝없이 반복된다는 것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이건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느낄 수 없어요. 직접 경험해보면 참 당혹스럽습니다.
특히 저의 경우는 전공이 전자공학 계열이다 보니 주로 관련 IT업체들에서 일을 했는데요. 사실 오후 6시 칼퇴근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너무 늦게까지 일하는 분위기가 일상화되어 있다 보니 저녁 9시에 퇴근하면서도 ‘먼저 퇴근하겠습니다’라고 얘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IT분야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칼퇴근을 하지 못하지요. 밤늦게 퇴근하는 경우가 무척 많습니다.
이렇게 늦게 집에 가면 너무 피곤해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잠들어 버리는 경우가 많지요. 사실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는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끼기 힘들기 때문에 눈을 감자마자 아침이 오고 눈이 떠지는 것 같죠. 이렇게 순식간에 아침이 되면 어떻게 해야 하죠? 얼른 씻고 출근해야 합니다. 늦으면 안 되니까요.
이런 생활이 평일 내내 계속 됩니다. 그리고 주말에 잠시 숨을 돌리고 나면 바로 월요일이 돌아오지요. 대학 때는 방학이라도 있지만 직장에서는 방학도 없습니다. 여름에 일주일 정도의 짧은 휴가만이 있을 뿐이지요. 1년 내내 이런 생활이 계속되지요. 1년이 아니라, 그 다음해에도 계속됩니다. 계속…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이런 겁니다. 지금껏 설명한 생활이 그야말로 무한반복되는 것이지요. 참 돈 벌기 쉽지 않지요. 그래도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월급날에는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며 흐뭇한 상상을 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흐뭇한 상상을 하기 전에 꼭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 월급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지불한 것은 무엇인가요?
바로 우리의 시간, 즉 ‘인생’입니다.
우리는 이 중요한 사실을 잊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번 돈은 내 인생을 팔아서만 얻을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약간 숫자 계산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일주일은 7일이니 일주일은 24에 7을 곱하면 일주일은 168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계산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낮잠까지 포함해서 대략 8시간은 수면을 취한다고 하면 일주일에 56시간은 수면을 취하는데 사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 5일 근무에 출퇴근 시간을 각각 한 시간씩 잡고 일주일 동안의 근무시간을 대략 52시간 정도로 잡으면, 일주일 동안 총 출퇴근 시간은 10시간이고 거기에 52시간을 더하면 62시간이 나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서 수면시간 56시간과 업무시간 62시간을 제외하면 여가시간이 50시간이 나오지요.
음… 이렇게 계산하고 보니 수면시간, 업무시간, 여가시간이 각각 대충 1/3 씩 떨어지는군요. 물론 정확하게 계산하면 조금 차이가 나겠지만요. 얼추 그렇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대략적으로 직장을 다니는 사람은 그 기간 동안 자신의 인생 중 1/3 정도를 팔아서 돈을 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직장이 야근에 철야, 그리고 휴일근무를 밥 먹듯이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실은 더 많이 팔 수 밖에 없지만요.
결국 직업을 선택한다는 것은 자기 인생의 1/3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수면시간은 내가 주도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죠.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죽은 듯이 숨만 쉬면서 보내는 시간이죠. 물론 재충전도 하고 꿈도 꾸지만요.
그래서 이 시간을 계산에서 제외한다면, 직업을 선택한다는 것은 사실상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깨어있는 삶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렇게 직업을 선택한다는 것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결정하는 것이니 정말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직업을 선택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을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다른 사람은 벌이는 좀 시원치 않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직업선택에 대한 고민도 사치스러운 경우도 있지요.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급하게 직업을 선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 직업 선택의 기준으로 ‘돈’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것 같습니다. 가끔 신문 기사로 직업 선택의 기준에 대한 설문조사를 해도 돈이 다른 기준들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가 나오더군요. 아마 돈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일 겁니다. 어차피 일이란 건 고달프니까 최대한 돈을 많이 벌어서 인생의 1/3인 여가시간을 돈으로 즐겁게 보내자는 것이죠. 결국 자기 인생의 1/3을 업무시간으로 팔아서 나머지 1/3의 여가시간을 즐기자는 것이죠.
그런데 이 경우 굉장히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보통 돈을 잘 버는 사람일수록 업무시간이 많아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돈 잘 번다는 변호사들을 봐도 새벽까지 일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면 점점 여가시간은 줄어들게 됩니다. 돈을 많이 벌수록 여가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여가를 즐기기 힘들어지죠.
또한 일 자체를 좋아서 한다기보다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경우는 일에 싫증을 느끼고 업무 효율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면 자신의 직업분야에서 다른 사람보다 뒤쳐질 가능성이 높지요.
반면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선택하는 사람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자신의 인생의 1/3을 희생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설사 돈을 조금 벌고 경제적으로 좀 궁핍해지더라도 자신의 직업에서 흥미와 보람을 느끼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일 자체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직업에 종사하는 시간인 인생의 1/3 자체가 스스로에게 즐거움을 주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1/3의 여가시간도 마찬가지고요. 자신의 일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여가시간과 업무시간의 구분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을 겁니다.
이들은 인생의 한 부분(여가시간)을 위해서 다른 한 부분(업무시간)을 희생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생 자체가 즐거움이 되는 것이죠. 물론 돈을 좀 적게 벌수도 있겠고, 다행히 운이 좋은 경우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잘 버는 경우도 있겠지요. 어쨌든 이들은 자신의 직업에서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에 자신의 직업에서 두각을 나타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면 일이 너무 즐겁기 때문이지요. 천재도 즐기는 사람은 못 당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직업 선택의 기준으로 ‘돈’을 중시하는 듯한 분위기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솔직히 부모님들이 자식에게 되기 원하는 직업이 주로 의사, 변호사, 공무원, 대기업 사원 등인데 이 직업들의 특징은 돈을 많이 벌거나 굉장히 안정적으로 돈을 꾸준히 벌 수 있는 직업들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이런 직업을 권유할 때 과연 직업 선택이라는 것이 자식의 인생 1/3을 희생해야 한다는 점을 얼마나 고려하는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돈을 많이 벌고 안정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적성에도 맞지 않고 그다지 흥미도 없는 일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인생의 1/3을 지불하는 것이 과연 좋은 선택인가요? 물론 적성에도 맞고 흥미도 있다면 다행이겠지만요.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자신의 적성에 맞고 재미있는지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그래서 단순히 영어공부하고 스펙 쌓기 위주의 취업준비에 미리부터 목매지 말고 젊음의 시절에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저것 직접 해보고 느껴보지 않으면 어떻게 자신에게 맞는 일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내 인생 1/3을 아무렇게나 팔수는 없지 않나요?
이제 여러분은 내가 어떻게 이 글을 쓸 수 있는지 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업을 ‘돈’이라는 관점에서만 볼 때, 나는 직업을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본 것이다. 사실 직업을 돈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이미 답은 나와 있다. 돈 많이 버는 직업이 좋은 직업 아니겠나? 하지만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직업을 바라보면, 돈이라는 관점에서만 봤을 때는 놓치는 것을 보게 된다. 바로 내 인생의 1/3을 파는 것이 직업이라는 중요한 사실 말이다.
얼마나 놀라운 관점의 전환인가? 때로는 관점의 전환 하나 때문에 인생이 달라지기도 한다, 나처럼.
시에도 적용 가능한 관점의 전환
개성이 관점의 전환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은 여러분은, 이제 고은 시인처럼 멋들어진 시도 쓸 수 있다. 어떻게? 차분하게 얘기를 들어보시라.
한쪽 날개가 없어진
파리가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다
오늘 하루도 다 가고 있다
고은 시인의 시집 『순간의 꽃』에 나오는 구절이다. ‘오늘 하루도 다 가고 있다’라는 부분이 참 재치가 넘친다. 고은 시인은 어떻게 이런 시구를 만들 수 있었을까? 비법은 간단하다. 이 시를 쓸 동안 고은 시인은 파리가 된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파리의 ‘관점’에서 상황을 떠올린 것이다. 한쪽 날개가 없어진 파리가 기어가는 모습을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별 느낌이 없을 것이다. 그냥 벌레 하나가 굉장히 짧은 거리를 낑낑대며 기어가는 구나, 정도의 느낌? 그런데 파리가 되면 상황이 급변한다. 날개가 있을 때는 저만치면 순식간에 갈 수 있는데, 한쪽 날개가 없어지니 날갯짓을 해도 같은 자리만 뱅글뱅글 돌고 도무지 목적지까지 갈 수가 없다. 그야말로 ‘오늘 하루도 다 가고’ 있는 것이다.
방금 도끼에 쪼개어진 장작
속살에
싸락눈 뿌린다서로 낯설다
역시 고은 시인의 『순간의 꽃』에 나오는 구절이다. 사실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장작이나 싸락눈이나 둘 다 흔하다. 낯설 것 하나 없다. 그런데 이제부터 우리 한 번 나무속에 있는 세포가 돼 보자.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 9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그 은행나무 안쪽의 나무세포라고 생각하자. 태어나서 이제껏 바깥세상을 본 적이 없다. 주변이 다 나무세포 친구들일뿐. 수백 년을 그리 살아왔는데 누군가의 도끼질에 느닷없이 생애 최초로 바깥구경을 하게 됐다. 때는 마침 겨울이고 싸락눈과 처음으로 조우했는데, 얼마나 낯설까? 사실 낯설다는 표현도 부족하다. 천지가 개벽하는 느낌이리. 싸락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인간의 도끼질이 아니고서는 언제 싸락눈이 나무의 속살과 만날 수 있을까. 고은 시인은 시를 쓸 동안 나무세포가 된 것이다.
개성은 ‘관점’에서 나온다. 관점을 전환하면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인간 관점에서는 동물원이라는 곳에 가면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이국(異國)의 동물들을 만날 수 있어서 즐겁겠지만, 동물의 입장으로 관점을 전환하면 어떨까? 그야말로 감옥이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지 않겠나. 개성 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동네가게의 간판이 될 수 있어야 하고, 동물원의 하이에나가 될 수 있어야 하고 지구에 처음 도착한 외계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으로서는 볼 수 없는 것을 써내려갈 수 있다.
간혹 문체에 팍팍 힘을 주는 개성(?)을 발휘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잘만 쓴다면 그런 식으로 개성을 드러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허나 그런 수법은 하수의 영역이다. 고수는 문체의 현란함이 아니라 관점의 전환을 통해 개성을 드러낸다. 어설픈 잔재주가 아닌 사고의 폭과 깊이를 통해. 혓바닥 세포만 자극하는 조미료 같은 글 말고 좋은 콩으로 빚은 오래된 장맛 같은 글을 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조미료를 친 음식은 금방 질리게 마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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