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을 어떻게 쓰죠? 분량이 너무 많은데…
누군가 책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박에 이리 대답한다.
“원고지 1,000장이다.”
책 작업할 때마다 출판사는 대체로 원고지 1,000매 분량의 원고를 요구한다. 그 정도면 편집했을 때 300쪽 정도의 단행본이 나온다. 물론 필요에 따라서는 500쪽, 심지어 1,000쪽이 넘어가는 책도 있지만 서점에서 이런저런 책을 들춰 확인해보면 단행본 상당수가 300쪽 내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솔직히 왜 원고지 1,000장이 됐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오랜 기간 동안 출판시장에서 관행적으로 굳어진 듯하다.
원고지 1,000장? 만만치 않다. 자신의 인생에서 책을 한 권 쓰고 싶다는 꿈을 가진 사람도 막상 ‘원고지 1,000장’이라는 구체적인 수치를 접하면 사기가 꺾인다. 요즘에는 원고지라는 단위보다는 A4 용지가 더 이해하기 쉬우니 환산해보자. 보통 A4 용지 1장에 원고지 8장 분량이 들어가니 원고지 1,000장은 A4 용지로 치자면 125장 내외가 된다. A4 용지로도 최소한 100장 넘게 써야 책이 되는 것이다.
일단 쪼개고 나눠서 정리하라
헤아려보니 지금껏 15권의 책을 썼다. 물론 혼자 쓴 책도 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쓴 책도 있지만, 2006년에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라는 첫 책을 낸 것을 감안하면 무척 다작이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은 한 달 만에 쓰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내가 글 쓰는 것을 무척 좋아하고 예전부터 숭덩숭덩 썼을 것이라 지레짐작한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얘기하지만 나는 ‘글치’ 공학도였다. 내 학부와 대학원 전공이 전자공학 쪽 아닌가? 대학 때 교양수업 보고서 쓸 때면 A4 용지 1장 채우는 것도 버거운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책을 써제낄 때는 ‘뭔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유리 씨와 함께 쓴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이라는 책이 있다. 2008년 5월에 원고를 쓰기 시작해 3개월 만에 다 쓴 책이다. 우리는 이 주제로 책을 쓰기로 결정하고 나서 목차부터 짜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책을 쓰겠다며 다짜고짜 머리말부터 적어나가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초짜 인증하는 것이다. 원고지 1,000장이라는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설계도가 필요한데, 그것이 목차다.
우리는 목차를 짜기 위한 조사에 들어갔다. 이유리 씨는 그 엘레강스한 외모(안 보이는가? 믿으시라. 내 아내다)에서도 알 수 있듯 미술에 조예가 깊기에 주로 미술 분야에서 세상을 바꿨다고 할 만한 뒷얘기가 담긴 예술 작품 목록을 20개 뽑아오기로 했다.
사람들이 내 외모를 보고 전혀 예상을 못 하는데, 나는 음악에 꽤 조예가 깊다. 그래서 미술은 이유리 씨가 맡고 나는 음악과 그 외의 분야에서 세상을 바꿨다고 할 만한 에피소드가 담긴 작품 목록을 역시 20개 골라 오기로 했다. 조사를 마치고 다 모아보니 총 40개의 작품목록이 생겼다.
우리는 40개 중에 26개를 고르는 선별작업에 들어갔다. 글의 호흡 때문이다. 예컨대 A4 용지 100장 분량의 책을 쓰는데, 다뤄야 할 예술작품 목록이 100개다. 그러면 A4 용지 1장에 작품 하나를 다뤄야 하는 셈인데, 너무 짧아서 내용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겠나? 그렇다고 예술작품 목록을 5개로 하면 하나당 A4 용지 20장씩 써야 하니 글이 너무 늘어진다.
우리는 25개 정도를 다루는 것이 적당하다고 봤다. A4 용지 100장을 25개로 나누면 하나당 A4 용지 4장이다. 그 정도 호흡이면 대중서로서 너무 장황하지 않고, 그렇다고 허전하지도 않게 우리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25는 2로 나뉘지 않는다. 둘 중 누군가가 하나를 더 써야 한다는 것인데, 성격상 나나 이유리 씨에게 그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각각 13개씩 26개로 정하게 됐다.
느닷없이 A4 용지 100장을 쓴다면 숨이 막히겠지만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A4 용지 4장짜리 글을 쓰는 것은 노력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도서관에서 해당 예술작품을 만든 작가에 관한 책을 조사하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한다. 확보한 자료를 숙지해서 나의 목소리를 담아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어느덧 근사한 한 편의 글이 된다.
이렇게 A4 용지 4장짜리 글을 목차에 따라 26개 쓰면 그것이 바로 ‘책’이 되는 것이다.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은 그런 과정을 거쳐 한 권의 책이 됐다.
목차가 중요하다
이렇듯 목차는 책의 설계도다. 무조건적이라고 한다면 좀 과도하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책을 쓰기 전에 목차부터 짜는 것이 좋다. 목차를 제대로 짜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글을 쓰다 보면 책의 균형이 깨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특히 용두사미가 되는 경우가 흔하다. 누구나 책을 처음 쓰기 시작할 때는 의욕이 넘치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것을 최대한 쏟아붓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글이 좀 장황해진다.
그런 이유로 보통 머리말과 서두만 보면 인류 지성사의 역작 하나가 탄생하고 있다. 하지만 쓰면 쓸수록 의욕이 떨어지고 생각한 수준만큼 글이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에 실망만 늘어가다가 결국 글이 꼬리를 내리게 된다. 그래도 끝까지 쓰면 그나마 다행이지, 대다수는 중간에 포기하고 만다.
이유가 뭘까? 간단하다. 목차가 없기 때문이다. 설계도가 없으니 골격이 부실해 금세 무너지는 것이다. A4 용지 100장의 책을 쓰는데 목차를 짜보니 챕터1부터 챕터10까지 총 10개가 나왔다고 하자. 그러면 챕터1을 어느 정도 분량으로 쓰면 좋을까? A4 용지 10장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이렇게 전체 그림을 확실하게 가져가면 챕터1에서 A4 용지 20장 넘게 쓰다가 힘 빠져서 고꾸라지는 일이 없어진다.
저작의 시작, A4 용지 4장을 쓰는 비법
이 정도 알려드려도 책 쓰는 것 버거워들 하신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앞서 말한 대로라면, 예컨대 책 주제 잘 잡고 목차 25개 짜서 하나에 A4 용지 4-5장씩 쓰면 책 되는 것 아닌가. 그다지 어렵지 않아 보이는데 말이다.
사실은 많은 사람이 A4 용지 4장 정도 쓰는 것도 힘들어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나는 한 번 더 서비스를 하겠다. A4 용지 4장 쓰는 비법 대공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하여 논하라’라는 과제가 나왔다. 이 주제로 A4 용지 4장 써서 제출해야 한다. 컴퓨터 자판 앞에 앉아서 한숨만 쉬다가, 결국 어디서 베낄 글 없나 으슥하게 검색질 하고 있는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이런 장면은 그만! 지금부터 나만 따라오시라.
첫째, 글의 재료를 늘어놓아라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하여 논하라’라는 과제를 받았다면, 생각을 하라. 이 주제로 내가 뭘 쓸 수 있는지를. ‘아!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장르가 도대체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먼저 시작했는지 궁금한걸’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면 바로 쓰려고 하지 마라. 단지 밑에다가 이렇게 적어 놓는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어디서 제일 처음 시작했는가?
써놨으면 잊어라. 곧바로 다른 것 뭐 쓸 것 없나 생각해라. ‘아! 내가 Mnet에서 했던 보이스코리아를 엄청 재밌게 봤는데, 개인적인 느낌을 써볼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면 역시 바로 쓰지 마라. 아까 적어 놓은 것 밑에 이렇게 적어 놓는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어디서 제일 처음 시작했는가?
- Mnet 보이스코리아 봤던 개인적 감상
이런 식으로 주제와 관련해 당신이 쓸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재료를 늘어놓으시라. 맛있는 카레라이스를 만들려면 당연히 당근, 양파, 카레 가루, 고기, 쌀 등의 재료가 있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요리는 재료 구해놓고 하면서 왜 글은 항상 재료도 없이 쓰려는가?
둘째, 글을 꼭 도입부부터 써야 한다는 강박을 버려라
재료를 늘어놨다면 이제 본격적인 요리(글쓰기)를 해야 할 텐데, 막상 쓰려면 글이 나오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도입부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글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쓴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보니 도입부가 떠오르지 않으면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한다.
되레 묻고 싶다. 왜 글을 꼭 도입부부터 써야 하는가? 예컨대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최초로 시도했던 TV 프로그램에 대한 얘기가 도입부와 상관없이 글의 어딘가에 꼭 들어갈 것 같다면, 미리 이 부분을 먼저 써 놓고 뒤에 빼놓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식으로 몇 가지 소재에 대해서 글을 미리 써 놓으면, 점점 글의 분량이 늘어나게 된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생각이 정리되기 때문에 논리전개를 어떤 방식으로 가져가야 할지 더욱 명확해진다. 그에 따라 써놓은 글들을 마치 블록 쌓듯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고 연결부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입부가 도출된다. 카레라이스를 하는데 꼭 당근 먼저 깎을 필요가 있는가? 양파부터 썰어놓을 수도 있지 않나. 그런데 왜 글은 꼭 도입부부터 쓰려고만 하는가?
물론 가끔 신내림을 받는 경우도 있다. 예기치 않게 글이 도입부부터 술술 풀리는 경우다. 그런데 이런 경우 십중팔구 겪게 되는 상황이 있다. 마무리가 좋지 않다. 분명 신내림대로 쭉쭉 써 내려갔는데, 막상 결론이라는 목적지에 와보니 내가 생각했던 그곳이 아니다. 그렇다고 고치기도 쉽지 않다.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막막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의 잔 소우만 박사 팀은 사람들을 사막에 떨어뜨려 놓고 길을 찾아보라고 시켰다고 한다. 실험 참가자들은 해나 달이 보일 때는 똑바로 걸었지만 해나 달이 구름 뒤로 숨으면 바로 방향감각을 잃었다. 참가자들은 사막에서 원을 그리며 걷고 있었지만 스스로는 “똑바로 걷고 있다”고 착각했다.
한 걸음 한 걸음에서 각도가 1도만 틀려도 그것이 한쪽으로 계속 쌓이면 원을 그리며 같은 곳만을 뱅글뱅글 돌게 되는 것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한 문장 한 문장 제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1도씩 방향이 틀어져 있다. 긴 글일수록 문장마다 조금씩만 어긋나도 마지막 결론에서는 배가 산으로 가기에 십상이고 사막에서 원 그리기에 십상이다.
글쓰기는 구조적인 작업이다. A4 용지 100장이 넘는 책을 쓰는 과정도 그렇고, A4 용지 4장짜리 보고서를 쓰는 과정 역시 다르지 않다. 책을 쓸 때는 목차를 먼저 작성하고, A4 용지 4장짜리 글을 쓸 때는 재료부터 먼저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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