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시대에 ‘꿈을 좇는 일’을 나쁘게 말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꿈을 좇는 일은 현실과 이상의 격차가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 격차는 사실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모두 ‘이상’을 좇아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해소될 수 없는 현실과 이상의 격차가 항상 존재한다는 걸 의미하게 된다.
여기에서 아주 흥미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정신분석학에서 볼 때, 이 현실과 이상을 좁히려는 시도는 인간에게 ‘무한동력’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가령, 어릴 적 아버지를 무의식적으로 롤모델로 삼은 아이가 있다고 했을 때, 이 아이는 죽을 때까지 자기 안의 아버지를 무한하게 좇을 수 있다. 아버지라는 이미지에 도달하고자 끝없이 공부하고, 일하고, 노력하면서 한 평생을 갈아 바칠 수 있다. 그 동력은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무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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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졸데 카림의 『나르시시즘의 고통』에는 자본주의가 이런 개인 내면의 ‘무한 동력’에 기생하고 있다는 취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를 들어 SNS도 그렇다. SNS에 우리는 삶을 적당히 화려하게 편집하여 올리는데, 사실 그 삶의 이미지는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다.
SNS 속의 나는 필터나 구도를 통해 나 자신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어진 얼굴로만 장식되어 있다. 옷가지나 먹다 마신 물컵이 널부러진 집안이 아니라, 잠깐만 유지되는 완벽하게 정돈된 이미지만이 전시된다. 우리는 우리가 전시한 그 이미지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를 ‘무한’하게 전시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바로 그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서 ‘무한동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끝없이 내가 최고로 잘 나온 사진, 내가 최고로 행복한 순간, 내가 최고로 돈을 많이 쓴 시간에 대해서 올린다. 그 이유는 그것이 내가 현실을 지우고 뛰어들고 싶은 유토피아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미지를 잠시 만들어낼 수는 있을지언정, 그 이미지 속에서 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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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흥미롭게도, 이런 개인의 내면적인 문제가 한 사회 전체의 동력이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내 안에 있는 부자가 되는 이미지, 내 인생의 경영자이자 주인이 되는 이미지, 세상의 인기와 명예를 얻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그 이미지와 지금 현실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인생의 모든 에너지를 투여한다.
자본주의란 그런 개개인들의 투쟁이 만들어낸 부산물처럼 존재하고 지탱된다. 그 과정에서 당신을 ‘이상’에 도달하게 해주겠다고 하는 수많은 상품과 브랜드, 강의 등이 만들어진다.
3.
여기서 하나 생각해 볼만한 점은, 인간이 이 ‘무한동력’을 생산해 내는 현실과 이상의 격차라는 구조를 없앨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능한 건 어떤 방식으로 그 격차를 해소하는 달리기를 이어갈까 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평생 달려야 하는데, 무엇을 좇아 어떻게 달릴지만을 조정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누군가에게 그 이상은 붓다나 예수다. 누군가에게는 에르메스나 포르쉐다. 누군가에게는 노벨문학상 작가나 자연 속 도서관 주인이고, 근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이게는 강남 대단지 아파트 주민 같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상을 포기하는 건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이상을 다루는 방식이고, 이상과 공생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가능할지는 몰라도, 할 수 있다면 이상에 영혼을 팔지 않는 선에서 내 삶에 이로운 이상과의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도 있다고 믿는다.
이상은 우리를 목숨 바치는 열광적인 상태로 만든다. 나의 이상이 ‘도박의 신이 강림한 존재’ 같은 게 되면 삶은 파멸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상이 이웃들과 더불어 살며, 강박적으로 삶에 쫓겨 다니지 않으면서, 하루하루를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삶의 장면’이 된다면, 구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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