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성형외과 의사 지인과 이야기를 했는데, 요즘에는 미모가 뛰어날수록 얼굴에 손을 댄다고 한다. 나는 잘 모르는 영역이라 막연히 세상에는 예쁘거나 잘생긴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알고 보면 상당수가 ‘만들어진’ 미모의 사람들이라는 게 다소 신기하게 느껴진다. 말하자면 우리는 ‘조작 혹은 계량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보이는 것들은 원래 그대로가 아니고, 만들어지거나 조작되거나 계량된 것들이다.
또 요즘 아이 부모들은 아이 키 때문에 난리도 아니다. 내가 어릴 땐 키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살았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아이 키가 잘 안 큰다 싶으면 호르몬 주사 등으로 아이 키를 키우려 한다. 교육 같은 것은 물론이고 외모적으로도 아이들이 손해보고 클까 걱정하며 무엇이든 ‘평균 이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남들보다 못한 존재로 클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나도 스스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싶고, 여러 면에서 성장하고 싶은 의욕도 있다. 내 아이 역시 잘자라서 자기 인생을 잘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싶고, 그를 위해 많이 도와주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인생의 모든 것을 ‘조작’하고 ‘계량’할 때,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이 필요할 듯하다. ‘모든 것’에 있어서 ‘남들’보다 못한 존재로 살지 않기 위해 계량하다 보면 근본적으로 끝이 없다.
남들보다 근육도 많아야 하고, 키도 커야 하고, 얼굴도 잘생겨야 하고, 남부럽지 않은 차도 타야 하고, 가방도 메야 하고, 시계도 차야 하고, 남들이 무시하지 않는 동네의 아파트도 가져야 하고, 브랜드 옷도 입어야 하고, 아이 학벌도 좋아야 한다. 남들을 기준으로 놓고 조작과 계량의 세계에 뛰어들면 자기를 온전하게 사랑할 방법이 없어진다. 대신 남들의 기준에서만 자기가 사랑받을 존재가 되는데, 이 남들이란 존재는 만족을 모른다. 우리에게 충족의 기준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얼굴을 고치기 시작하면 몇억을 들여서도 고칠 것들이 있다고 한다. 눈, 코 입, 볼, 턱, 윤곽선 등 하나씩 하다 보면 아파트 한 채 값은 들일 수 있다고 한다. 명품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끝없이 올라가는 영역이 있다. 아파트로 남들의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서울 강남 안에서도 ‘테북’과 ‘테남’이 나뉜다. 그 안에서도 브랜드가 나뉜다. 이렇게 타인들의 기준을 신경 쓰느라 신경쇠약에 걸릴 수준이 된다.
우월감과 열등감은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느끼는 우월감에 중독되면, 반드시 다른 누군가에게는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 만족의 기준을 남들과의 비교에 둔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기본적으로 성장을 지지하는 사람이고, 정신이나 신체의 자기계발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지 않으면, 성장과 계발도 일종의 개미지옥이 된다. 그 개미지옥은 타인들의 시선이라는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 만족과 행복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아무리 계량되어도 불행하게 살 것이다.
성장의 다른 이름은 때로 결핍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진짜 결핍을 마주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결핍을 무한한 타인들의 기준으로 채울 것이 아니라, 진짜 자신이 되어가는 방식으로 채워야 한다는 점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