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포도의 즙을 발효시켜 만든 서양 술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시작하며
이번 뉴스레터는 와인의 역사입니다. 소주, 막걸리, 청주, 맥주, 위스키에 이은 6번째 술의 역사인데요. 이렇게 늦게 한 이유는 가장 잘 모르는 술이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평소 잘 알지 못했던 것을 조사하게 되면 자신감이 떨어지는데요, 아마 이번 내용도 와인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본다면 부족할 겁니다. 그래도 재미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와인의 역사를 조사하면서 느낀 점은 와인의 역사는 위기 극복의 역사라는 점이었습니다.
- 나무 배럴 안에서 와인이 상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탄생한 ‘포트와인’
- 기포가 생겨 병이 깨지자 유리병을 연구하고 당과 기압과의 관계를 연구하여 발전한 ‘샴페인’
- 진딧물로 인한 역병을 해결하거나, 아예 피하기 위해 발전한 ‘와인 관리법’과 신세계의 와인들
와인의 역사는 확실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위스키, 맥주, 와인을 전부 본다면 영국과의 접점이 가장 다양한 것 같더라고요. 조만간 술의 역사와 영국의 역사를 엮어 볼 생각입니다. (이렇게 또 언제 지킬지 모르는 약속이 늘어나네요)
1. 와인의 탄생지는 이란?!
와인의 시작은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석기시대 유물에서 와인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주장되기는 하지만, 보관한 포도가 의도치 않게 발효되어 와인이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죠.
포도를 인위적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오래된 유물은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에서 발굴된 유물입니다. 발견된 6개의 단지는 기원전 5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안에는 포도즙뿐만 아니라 송진 찌꺼기가 남아 있었는데요. 이 송진은 와인의 방부제로 쓰였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후 와인은 고대 문명 4대장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를 거쳐 널리 퍼지게 됩니다. 특히 로마에서는 와인이 특권 계층만을 위한 음료에서 모두가 마시는 음료가 되었습니다. 다만 지금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알코올 도수가 현재의 와인보다 낮았고, 물과 각종 향신료를 첨가해 마셨습니다.
2. 와인을 오크 배럴에 보관하는 이유
로마 시대 이후 와인은 기독교의 상징이 되어 기독교와 함께 퍼져나갔습니다. 사실 그리스, 로마에서도 와인은 신의 피를 마시는 것으로 여겨졌는데요, 이러한 모티브가 이어진 것이죠. 이처럼 종교적 이유로 중세 교회와 수도원은 항상 와인을 양조했습니다.
또한 와인은 대중적으로도 물처럼 많이 소비되었습니다. 11~14세기 유럽이 유난히도 기후가 온화하고 좋았던 덕분이기도 했죠.
와인이 대중화되고 많이 소비되자, 고급스러운 도자기에서 점차 저렴하고 만들기 쉬운 나무통에 보관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무통은 가볍고 운송하기 더 편리하기까지 했거든요. 사실 나무통에 와인을 보관하면 쉽게 산화되기 때문에 오래 보관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나무통이 널리 쓰였던 데에는 와인 소비량이 상당했던 영향이 큽니다. 주로 지역에서 소비되기도 했죠.
3. 백년전쟁이 만들어 낸 포트와인
시간이 흘러 대항해시대가 열렸습니다. 긴 항해 중 나무통에 담긴 와인은 상하기 일쑤였습니다. 특히 무역을 활발히 하던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이 문제는 큰 골칫거리였죠. 그러자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와인을 증류한 브랜디를 만들어내 이 문제를 해결해 냅니다. 이때 만들어진 증류주 기법이 퍼져 럼주, 위스키, 진 등의 다양한 증류주가 등장하게 되죠. 특히 쉽게 구할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한 진은 17세기 영국의 국민 술이 되었죠.
그렇다고 와인이 다른 술들에게 완전히 주도권을 내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와인에 브랜디를 섞어 알코올 도수를 높인 주정 강화 와인이 등장했거든요. 대표적으로 포르투갈의 포트, 마데이라섬의 마데이라, 스페인의 셰리가 있죠.
- 포트와인
15세기까지 보르도는 잉글랜드의 영토였습니다. 영국인들은 그 지방에서 많은 양의 와인을 수입해 왔죠. 그런데 백년전쟁에서 패하게 되면서 보르도를 프랑스에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이제 보르도 와인을 들여오기 위해서는 높은 관세를 물어야만 했죠.
그래서 잉글랜드는 새로운 와인 산지를 개척했습니다. 포르투갈이었죠. 다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은 프랑스에 비해 먼 데 위치해 있어 운송 기간이 길어졌고, 이 과정에서 많은 와인이 상하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알코올 도수가 높은 브랜디를 첨가하여 보관 기간을 늘리게 되었습니다. 이게 포트와인의 시초가 되었죠.
이 시기 포르투갈과 영국은 메수엔 조약을 맺어 관세를 대폭 낮추었습니다. 덕분에 저렴하게 들어온 포트와인이 유행하게 되었죠. 하지만 18세기 중반부터 과잉 생산되면서 질이 낮아졌고, 점차 위상을 잃게 되었습니다.
마데이라 주정 강화 와인은 포르투갈의 마데이라섬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이 섬은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와 북미로 진출하는 교두보 역할을 했는데요. 장기간 항해를 앞둔 선원들이 섬에 있던 와인에 사탕수수로 만든 증류주를 섞기 시작하면서 시작됩니다. 18세기부터는 브랜디를 넣기 시작해 오늘날과 같은 마데이라 주정 강화 와인이 완성되죠.
마데이라 와인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적극 수입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과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만든 토머스 제퍼슨도 즐겨 마셨다고 하죠.
4. 원치 않았던 샴페인
와인의 질 향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와인을 담는 병이었습니다. 17세기에는 석탄 연료를 이용해 견고한 유리를 만드는 방식이 발명됩니다. 점차 유리 기술이 발전하면서 일정한 모양과 용량으로 병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죠.
또 1844년에는 아돌프 자크송(Adolphe Jacquesson)이 뮈즐레(Muselet)라는 샴페인 병의 코르크 위에 씌워진 와이어를 고안합니다. 이렇게 병이 발전하면서 탄생한 와인이 있으니, 바로 샴페인입니다.
샴페인은 프랑스 샹파뉴 지역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생산한 스파클링 와인을 말합니다. 샹파뉴 지역은 와인을 생산하기에는 기온이 낮아 겨울이 되면 발효가 멈추고 봄이 되면 발효가 다시 일어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탄산이 생겨났죠.
하지만 당시 와인 속의 탄산은 그저 없애야 하는 불순물이었습니다. 탄산이 섞이면 보관하기 어려워졌거든요. 얇은 유리병은 깨지기 일쑤였고, 나무통은 마개가 날아가 버리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오늘날 샴페인으로 유명한 돔 페리뇽은 17세기 중반의 돔 페리뇽(Dom Pérignon) 수도사의 이름에서 온 것입니다. 돔 페리뇽은 샹파뉴 지역의 포도 농사 방법을 혁신적으로 발전시키는 한편, 여러 품종과 포도밭의 포도를 섞어 와인을 만드는 블렌딩 기법이나 맑은 포도즙을 쉽게 내는 압착기 등 신기술을 도입했죠. 하지만 정작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고자 한 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탄산을 최대한 제어하고자 했죠.
샴페인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 것은 17세기 말 루이 14세 사후 섭정했던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에 의해서입니다. 샴페인을 좋아했던 필리프 2세 덕분에 프랑스에서 인기를 끌었죠. 공급량이 많지 않은데 인기가 높아지면서 가격도 아주 비싸졌죠.
5. 샤토의 탄생
병이 발달하고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와인을 오래 저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와인을 숙성할 경우 더 깊고 독특한 풍미를 맛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좋은 와인을 사서 보관하는 와인 애호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어떤 지역, 어떤 생산자가 만든 것인지 등등을 따지는 구분법이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등장한 것이 바로 보르도의 와이너리(양조장) 개념인 샤토이죠.
샤토는 보르도의 와인 생산자가 아르노 드 퐁탁(Arnaud III de Pontac)에 의해서 시작됩니다. 당시에는 네고시앙(Negociant)이라 불리는 와인 중개업자는 여러 와이너리에서 사들인 와인을 섞어서 판매했는데요. 퐁탁은 자신의 와이너리에서 생산한 품질 좋은 와인이 싸구려 와인과 섞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죠. 그래서 오브리옹이라는 자신의 와이너리 이름을 걸고 다른 와인과 섞지 않은 자신의 와인을 비싼 값에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퐁탁의 전략이 성공하면서 보르도의 다른 와이너리에서도 샤토의 개념을 적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최고의 와인을 만드는 샤토가 어디인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1855년의 ‘1855 보르도 와인 등급’입니다. 여기서 그 유명한 5대 샤토가 유래했죠.
참고로 5대 샤토는 샤토 오브리옹과 1등급 샤토인 샤토 라피트, 샤토 라투르, 샤토 마고이 그리고 1973년 2등급에서 1등급으로 승격된 샤토 무통 로칠드이죠.
6. 와인의 흑사병, 필록세라
1845년 흰가루병을 일으키는 곰팡이가 유럽의 포도나무에서 발견됩니다. 이 곰팡이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지만, 다행히 금방 살충제를 발견해 진압할 수 있었죠. 진짜 문제는 1863년에 나타났습니다. 필록세라라는 진딧물에 감염된 포도가 등장한 것이었죠.
필록세라는 포도나무 뿌리의 수액을 먹습니다. 이들의 습격을 받은 포도나무는 뿌리에 혹이 생기고 수액이 말라 조직이 비틀어졌습니다. 게다가 필록세라는 한 번에 수백 개의 알을 낳았기 때문에 급격히 개체 수가 늘어났습니다. 마침 프로이센이 유럽 전장을 뒤흔들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격변의 시대였던지라, 필록세라가 원인인 것을 밝혀내는 데에만 5년이 결렸고 치료법이 나오는 데에는 20년이 걸렸죠. 그동안 유럽의 와인 산업은 초토화됩니다.
치료법이 등장한 뒤에도 문제였습니다. 치료법은 필록세라에 면역이 있던 미국의 포도나무 종을 접목시키는 것이었는데요, 당시 미국포도는 유럽에 비해 형편없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국 포도나무를 접목시키는 치료법을 거부하기도 했죠. 뿐만 아니라, 필록세라나 흰가루병을 예방하기 위해 포도밭을 다시 개간하고 새롭게 접목된 개체를 심어야 했으며, 살충제도 구매해야 했습니다.
생산자들은 늘어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와인의 품질을 낮추고 생산량을 늘렸습니다. 이 때문에 저품질 와인이 시장에 난무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와인의 위상이 낮아졌죠. 이 공백은 맥주와 위스키, 럼 등의 스피리츠, 그리고 칵테일 등이 메꿨습니다.
7. 세상이 와인을 억까하던 시절
필록세라로 인해 유럽의 포도 산업이 초토화된 이후에도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금주법과 1, 2차 세계대전, 대공황으로 여러 차례의 위기를 겪게 된 것이죠. 이로 인해 저품질 와인에 브랜디나 위스키 같은 독한 술을 섞는 식으로 만든 저품질 와인이 판을 쳤습니다. 건포도를 이용해 만드는 와인도 생산자들 사이에서 횡행했죠.
이에 와인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가 나서 여러 정책을 시행하게 됩니다. 1907년에는 포도주에 대한 명확한 정의인 ‘포도주란 신선하게 수확된 포도의 즙을 발효해 만든 술이다’를 내렸죠. 그전까지는 포도주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없었거든요. 그 외 여러 차례 정책을 거쳐 1935년 생산된 와인의 출처를 명확히 하는 제도인 AOC를 실시합니다.
8. 파리의 심판
스티븐 스퍼리어(Steven Spurrier)는 1970년대 파리에서 와인 샵을 운영하던 영국인이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최초 사설 와인 아카데미를 열기도 했고, 그의 와인 샵에서는 구매 전 테이스팅도 가능했죠. 그러던 어느 날, 스퍼리어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방문했다가 캘리포니아 와인에 매료되었고, 자연스레 캘리포니아 와인을 수입하고자 했죠.
하지만 당시에만 해도 유럽에서는 신세대 와인을 급이 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들여 올 수 없었죠. 그렇게 해서 스퍼리어는 1976년 파리에 11명의 심사위원을 초대하여 블라인드 테이스팅 대회를 열었습니다. 후보 와인에는 캘리포니아 레드 와인 6종, 프랑스 보르도 레드 와인 4종, 캘리포니아 화이트 와인 6종과 프랑스 보르도 화이트 와인 4종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캘리포니아 와인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본인과 미국인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프랑스인으로 꾸렸죠.
결과는 레드 와인, 화이트 와인 모두 캘리포니아 와인이 1등을 차지했습니다. (참고로 화이트 와인 1등은 1973년산 샤또 몬텔레나, 레드 와인 1등은 1973년산 스택스 립 와인 셀러 S.L.V. 카베르네 소비뇽)
이 예상치 못한 결과는 해외에 대서 특필되었고, 와인 업계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프랑스 와인 업계는 초상집이 되었고, 사람들은 미국을 비롯한 신세계 와인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86년에도 동일한 와인으로 비교 시음회가 열렸습니다. 역시 1위부터 5위까지 모두 미국 와인이 차지했습니다. 30년이 지난 2006년에는 프랑스 측에서 ‘프랑스 와인은 장기 숙성형 와인이므로 오랜 숙성이 지난 와인으로 다시 비교해 보자’며 또다시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습니다. 그런데 또 상위 1~5등을 미국 와인이 차지했다고 하네요.
9. 한국 와인의 역사
포도로 만든 술은 고려시대 때부터 마셨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에 여러 포도가 재배되었거든요. 원나라 황제가 충렬왕에게 포도주를 선물로 보내주었다는 기록도 있고요. 조선 시대에는 조선 중기 문신 김세렴이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남만에서 수입해 온 적포도주를 대마도에서 마셨다는 기록이 있죠.
서양 와인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구한말 때 선교사를 통해서였습니다. 선교사들이 미사를 지내기 위한 포도주를 유럽에서 가져왔거든요. 이윽고 직접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양조하기도 했습니다. 1901년 안성 천주교회 초대 신부였던 프랑스인 안토니오 콩베르(Antonio Combert) 신부가 20여 개의 머스캣 포도 묘목을 성당 앞뜰에 심은 것이 최초라고 알려져 있죠.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주도로 포도주가 양조 되기도 했습니다.
60년대 후반부터는 우리나라에서 직접 와인을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쌀이 부족했기 때문에 박정희 정부는 쌀로 만든 막걸리 대신 과실주를 장려했는데요. 이에 1968년 한국 농어촌 개발 공사와 산토리가 합작한 한국 산토리에서 포도주를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수요가 없어 5년 만에 해태로 매각되죠. 해태는 ‘노블 와인’이란 이름으로 적포도주와 백포도주를 선보였죠. 1977년에는 스파클링 와인인 ‘참 샴펜’을 출시합니다.
뒤이어 OB에서 출시한 ‘마주앙’이 히트하고, 진로에서는 ‘몽블르와인’, 파라다이스에서 ‘올림피아 와인’, 대선주조에서 ‘그랑주아 스파클링 와인’ 등을 생산합니다. 바야흐로 국산 와인의 전성기였죠. 하지만 1987년 와인 수입 자유화가 되면서 한국와인의 전성기는 막을 내립니다.
국내 와인 산업 자체는 IMF 때 침체되었다가, 2004년 한국 칠레 FTA 체결과 2005년 『신의 물방울』의 히트로 가파른 성장세를 보입니다. 그리고 코로나를 기점으로 2020년부터 와인 소비량은 다시 급격히 늘어났죠.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문헌
- 김관용. (2022). 와인 콘서트. 더좋은책
- 마리아 테벤. (2023). 프랑스의 음식문화사. 니케북스
- 이석인. (2022). 포도에서 와인으로. 시대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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