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
보리, 밀, 수수 따위의 맥아에 효모를 넣어 발효시킨 후 이를 증류하여 만든 술. 알코올 함유량은 41~61%이며 영국산 스카치위스키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시작하며
최근 몇 년 사이에 위스키의 인기가 부쩍이나 늘어났습니다. 저도 한때 『바텐더』라는 만화책을 보고 위스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남자의 취미〉 유튜브 채널을 통해 본격적으로 입문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의 최애 위스키는 버번위스키, 그중에서도 스모키함과 바닐라 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놉크릭(Knob Creek)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찾아보니 가장 오래된 위스키 브랜드는 1608년에 라이센스를 받은 아일랜드의 부쉬밀즈(Bushmill)라네요? 이제부터 아이리쉬 위스키로 갈아탑니다.
위스키의 역사를 조사하다 보니까 거의 모든 곳에서 스카치위스키, 아이리쉬 위스키, 아메리칸 위스키 등을 나눠서 정리가 되어있더라고요. 종합해서 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서 하나로 묶어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위스키의 본고장은 스코틀랜드?
위스키 하면 가장 유명한 나라는 아마 스코틀랜드일 것입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가 위스키를 처음으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사실 위스키는 아일랜드에서 탄생해서 스코틀랜드로 전해집니다.
흔히 아일랜드 위스키의 시작을 잉글랜드의 헨리 2세가 아일랜드를 병합했던 12세기로 봅니다. 아일랜드와의 전쟁에서 돌아온 잉글랜드 병사들이 아일랜드인이 마시는 술인 아쿠아비테(Aqua vitae)와 우스케바(Uisge Beatha)에 대해서 보고했다는 것이죠.
이 술은 수도승들에 의해 증류 기술이 아일랜드에 들어오면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하지만 위스키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고, 와인을 증류한 브랜디였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1494년 ‘여덟 볼의 몰트로 존 코어 신부가 아쿠아비테를 만들었다’는 왕실 재무부 문서를 시작으로 위스키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스코틀랜드 정부는 위스키 때문에 곡물 소비가 많아져 기근이 들지도 모른다고 걱정해 귀족들만 위스키를 만들 수 있도록 했는데요. 그럼에도 위스키 제조는 널리 퍼졌고, 정부는 1644년 세금을 매기기 시작했습니다.
2. 잉글랜드 왕이 만든 아이리쉬 위스키와 아메리칸 위스키?!
16세기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는 위스키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헨리 8세는 1541년에 아일랜드섬을 평정하고 아일랜드의 왕 칭호를 받았는데요, 지배 방법의 하나로 위스키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위스키 생산 자격증을 판매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심지어는 위스키를 만들 때 쓰는 맥아(싹을 틔운 보리)에도 세금을 매겼습니다.
맥아에 세금을 매기자, 아일랜드 위스키 제조업자들은 싹을 틔우지 않은 보리를 첨가해 위스키를 만들어 위스키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레시피가 오늘날에도 이어져 맥아만 사용하는 스카치위스키와 차별화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1580년에는 아쿠아비테 제조자를 처형하겠다고 발표하기까지 했지만, 세금 부담을 피해 아일랜드 사람들은 마운틴 듀(Mountain Dew)라고 불린 밀주를 만들어 소비했습니다.
사실 헨리 8세는 잉글랜드 종교개혁으로 더 유명합니다. 전말은 이러하죠. 헨리 8세는 캐서린과의 이혼을 교황에게 청원했으나 거절당합니다. 그러자 영국 국교회를 교황으로부터 독립시켜 스스로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고 이혼하죠. 때마침 마르틴 루터가 〈95개 조 반박문〉을 발표하며 유럽 대륙에서 종교개혁의 열풍이 불고 있었고요.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된 헨리 8세는 타 종교를 탄압했습니다. 그중에는 청교도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들이 위스키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아메리칸 위스키가 탄생하게 되죠.
사실 당시 미국에서 인기 있는 술은 위스키가 아닌 럼이었습니다. 럼은 아프리카에서 카리브해로 건너간 노예들이 생산한 당밀로 만든 술이기 때문에 노예무역과 깊은 관련이 있었죠. 19세기가 되면서 미국과 영국은 노예무역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고, 미국의 독립전쟁과 영미전쟁으로 럼 무역도 무너집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럼을 영국 해군과 연관시켜 럼에 대한 혐오감이 생겨났습니다. 여기에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위스키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럼의 자리를 위스키가 대체합니다.
3. 세금을 부과해도, 안 해도 숙성될 운명이었던 위스키
17세기 후반 스코틀랜드는 대기근을 겪으면서 인구의 10% 이상이 죽고 경제적 파탄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오늘날 파나마의 다리엔(Darién)이라는 지방에 스코틀랜드인들을 이주시켜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무역 거점을 건설하겠다는 다리엔 계획을 추진했죠.
하지만 이 계획이 실패하면서 스코틀랜드는 감당할 수 없는 빚이 남았고, 결국 1707년 잉글랜드 왕국과 통합됩니다. 이로써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는 동일한 통치를 받게 되었죠. 그러면서 아일랜드의 밀주를 만들어 내던 높은 주세 역시 모든 곳에 적용되었습니다.
높아진 주세와, 잉글랜드에 세수를 줄 수 없다는 저항 의식까지 겹쳐 스코틀랜드에서도 밀주가 성행하게 됩니다. 이때 밀주를 야밤에 달빛을 받으며 몰래 증류했기 때문에 문샤인(Moon Shine)이라고 불렀죠. 밀주를 숨기기 위해 오크통 숙성법도 발전했습니다.
이후에도 1786년 면허제가 도입되고, 1793년 주세가 3배로 인상되고, 증류기의 크기 제한 등의 조치가 생기면서 밀주는 더더욱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1823년이 되어서야 주세를 크게 내린 소비세법이 시행되면서 합법 증류소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한편 미국에서는 위스키가 미국을 대표하는 술이 되었지만, 전쟁으로 부채가 쌓인 미국 연방정부는 1791년 위스키에 소비세 25%를 물린다는 과세를 시행합니다. 이 과세는 심한 반발을 일으켜 증류업자들은 세금 징수원을 공격했고, 이듬해에는 ‘위스키 반란’을 일으켰죠. 이에 워싱턴 대통령은 1만 3천여 명의 연방군을 이끌고 폭동을 진압합니다.
이때의 교훈으로 이후 미국 연방정부는 위스키 세를 낮은 수준으로 유지했고, 창고에 숙성되고 있는 위스키에도 20년까지는 세금을 매기지 않았죠. 이처럼 오래 보관할 수 있기 때문에 위스키의 품질도 좋아졌습니다.
4. 꼭대기는 내리막의 시작
19세기는 미국 위스키의 호황기였습니다. 중서부 지대에 엄청난 규모의 옥수수 생산 지대 즉 ‘옥수수 벨트’가 생겼는데, 농장들은 옥수수를 운반하다가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위스키를 만들어 팔았습니다. 에반 윌리엄스(Evan Williams), 일라이저 크레이그(Elijah Craig) 같은 유명한 위스키 제조업자들이 이때를 전후해서 등장했죠. 특히 일라이저 크레이그는 버번위스키를 최초로 증류한 사람이라는 설도 있습니다만, 진실은 알 수 없죠.
이 시기에는 미국의 인구가 520만에서 7,620만으로 폭증하던 시기였음에도 엄청난 규모의 버번위스키 생산량으로 인해 1820년대 위스키 한 병의 값은 25센트에 불과했습니다. 차나, 커피, 맥주, 우유보다 저렴한 가격이었죠.
1인당 위스키 소비량도 엄청났습니다. 1830년 15세 이상 사람의 평균 연간 술 소비량은 36L로, 오늘날의 12배 이상을 마셨죠. 아침저녁으로 위스키를 마시고 월요일에는 숙취로 출근하지 못해도 이해해 줄 정도로 나라 전체가 위스키에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노동자는 생산성이 저하되었으며 각종 보건 문제가 빈발하였고, 심지어는 가정 폭력 사례까지 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금주운동을 벌이는 종교단체와 여성단체들이 등장하고 시작했고, 이는 금주법 제정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19세기에는 아이리쉬 위스키도 전성기였습니다. 더블린에서 생산된 위스키는 연간 1,000만 갤런에 달했죠. 생산량만큼 소비량도 늘자, 미국과 마찬가지로 알코올 중독에 대한 사회적 반발이 일어나 금주운동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아일랜드 인들의 알코올 중독을 멈춘 건 금주법이 아닌 기근이었죠. 1845년부터 1852년까지 이어진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아일랜드 전체인구의 1/4이 줄었고, 위스키 소비는커녕 생산업체들도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5. Whiskey와 Whisky가 둘 다 사용되는 이유
산업혁명으로 인해 증류기술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바로 1813년 장 바티스트 셀리에 블루멘탈(Jean-Baptiste Celier-Blumenthal)이 연속식 증류기를 발명한 것이죠. 이를 1828년에 개량한 로버트 슈타인(Robert Stein)의 연속식 증류기가 스코틀랜드에서 상업적으로 쓰이게 됩니다.
기존에는 단식 증류기로 술을 제조했는데요. 단식 증류기는 발효된 술을 증류기에서 한 번만 증류하는 장치로, 알코올 도수 75% 미만의 술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반면 연속식 증류기는 한 번의 가열로 연속된 증류가 진행되어 95% 이상 고농도의 알코올을 얻을 수 있었죠.
이렇게 만들어진 알코올은 원재료의 향과 맛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맥아를 쓰지 않고 저렴한 곡물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바로 몰트 대신 다른 곡물을 이용한 그레인위스키입니다. 그레인위스키에 몰트 위스키를 섞어 만든 블렌디드 위스키도 등장했죠.
아일랜드 증류소는 연속 증류기로 만든 위스키를 위스키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1890년 ‘알코올과 물로 만든 증류주’도 위스키라는데 합의함으로써 연속 증류기를 사용해도 위스키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게 되었죠.
이에 아일랜드 위스키 제조업자들은 연속 증류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스코틀랜드의 위스키와 구분하기 위해 Whisky에 ‘e’ 자를 더해 Whiskey라고 표기하기 시작합니다.
미국에서도 연속식 증류기로 만든 그레인위스키, 블렌디드 위스키가 등장하면서 단식 증류기 파와 연속식 증류기 파가 나뉘게 됩니다. 정부는 위스키의 정의를 ‘오크통에서 숙성되어 첨가물을 넣지 않은 증류주’로 정했고, 그렇지 않은 위스키를 이미테이션 위스키로 표기하게 했죠.
그러나 위스키 수입업자들이나 연속식 증류기를 이용해 위스키를 생산하던 업자들이 반발해 이미테이션 위스키도 위스키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시 순수한 위스키를 생산하던 업자들이 반발했죠(…)
이 논란은 1909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가 종식시킵니다. 과일과 당밀을 제외한 곡물을 사용한 위스키는 ‘스트레이트 위스키’, 그 외에 가향하거나 다른 증류주를 섞은 위스키는 ‘블렌디드 위스키’라고 정의한 것이죠.
※ 연속식 증류기에 대한 이야기는 「연금술사가 만든 소주?! 소주의 역사」에서도 다룬 적 있습니다.
6. 혼파망이었던 20세기 초
1860년대 포도 뿌리와 잎에 기생하는 해충 필록세라(Phylloxera)가 유럽에 창궐하면서 와인, 코냑, 브랜디 생산이 멈춰버립니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은 위스키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아일랜드는 하필 이때 생산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스카치위스키가 대세가 됩니다. 마침 스코틀랜드는 연속식 증류기를 통해 많은 생산량을 감당할 수 있었고요.
하지만 스카치위스키의 황금기는 오래가지 않아 허무하게 무너집니다. 스카치위스키의 상당 부분을 유통하던 패틴슨(PATTISON) 사가 1901년 파산한 것이었죠. 투자받은 돈으로 사치스러운 소비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투자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회사 가치를 부풀려 공시했지만, 위스키 산업의 약간의 침체로 정체가 드러나 버렸죠.
패틴슨 사는 파산하고, 로버트 패틴슨과 월터 패티슨은 사기와 횡령죄로 수감됩니다. 패티슨 사의 파산으로 많은 업체들도 함께 파산함으로써 스카치위스키의 짧은 황금기는 막을 내립니다.
20세기는 위스키 업계 전반적으로 혹독한 시기였습니다만, 가장 힘들었던 곳은 아일랜드였습니다. 대기근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제1차 세계대전부터 시작해 아일랜드 내전, 영국 연방의 수입금지 조치, 미국의 금주법, 제2차 세계대전까지 끝없는 악재의 연속이었죠. 결국 19세기 90여곳에 달했던 증류소는 단 3곳만 남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20년 금주법이 시행됩니다. 금주법의 영향은 수도 없이 많지만 위스키와 관련된 것만 살펴보자면, 합법적인 제조 기준이 사라졌기 때문에 불량 위스키가 판을 쳤습니다. 특히 마피아들이 위스키를 제조 및 유통을 했기 때문에 마시는 사람을 생각할 리 없었죠. 공업용 알코올, 메탄올을 섞은 술을 마시고 죽는 경우도 늘어났습니다.
위스키 밀수도 성행했는데요, 특히 접경을 맞대고 있는 캐나다에서 오대호를 통해서 엄청난 양의 술이 밀수되었습니다. 이때 성장한 곳 중에는 캐나디안 클럽(Canadian Club)도 있습니다.
금주법으로 인한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미국 정부는 1933년 12월 5일 금주법을 폐지합니다. 금주법은 끝났지만 켄터키에 있는 증류소 절반은 문을 닫은 뒤였죠. 게다가 미국인들은 밀주 제조업자들이 대량으로 만들어낸 진이나 보드카, 밀수해서 마셨던 스코틀랜드·캐나다의 블렌디드 위스키의 가벼운 풍미에 입맛이 길들여졌기 때문에 옥수수와 호밀로 만든 미국의 위스키가 설 자리는 없어 보였습니다.
7. 위스키의 전성기는 바로 지금!
20세기가 끝나갈 때까지 위스키 시장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1964년 미국 연방 의회에서 버번위스키는 미국의 독특한 상품이라고 공표하면서 버번위스키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죠. 하지만 1980년대에는 전 세계적으로 보드카, 진 등의 증류주와 칵테일이 인기를 끌며 위스키 시장은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990년대에 이르러 경제가 성장하면서, 미국인들은 적게 마시되 더 좋은 술을 찾고자 했습니다. 이로 인해 클래식 칵테일이 부활하고, 과거의 위스키들이 재생산되면서 위스키 시장에도 활기가 찾아오기 시작했죠.
위스키 시장의 전성기는 사실 지금입니다. 아시아 시장에서 수요가 급격히 증가했거든요. 우리나라도 코로나 이후로 인기를 끌어 2019년 대비 올해 위스키 수입액이 3배나 증가했습니다.
8. 산토리의 역사가 곧 일본 위스키의 역사
1854년 미일화친조약으로 일본이 개항하면서 위스키가 일본에 들어옵니다. 이를 맛본 일본인들은 일본에서도 위스키 생산을 시도했죠. 1878년 다키구치 구라키치는 도쿄에 양조소를 열어 위스키를 제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산 위스키는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산 위스키의 품질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위스키 같은 독주를 약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죠.
본격적인 일본 위스키의 시작은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다케츠루 마사타카(竹鶴政孝)에 의해서 시작됩니다. 그는 양조장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오사카 고등공업학교에서 양조학을 공부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학교 선배가 운영하던 양조회사인 세츠주조에 다니다 대표의 권유로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노력 끝에 캠블튼의 헤이즐번(Hazelburn) 증류소 공장장을 역임하죠.
이후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일본에서 스코틀랜드 위스키를 재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돌아왔을 때에는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으로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결국 오사카의 한 중학교에서 영어와 화학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에는 1899년부터 와인을 생산하던 도리이 신지로(鳥井信治郎)가 있었습니다. 그는 위스키를 생산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죠. 그러다 다케츠루를 알게되어 찾아갑니다. 여러 번 교류를 나누는 끝에, 1924년 증류소를 완공하고 위스키 연구소 소장으로 다케츠루를 초빙했죠.
그 후,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려 마침내 스코틀랜드 위스키를 완벽하게 재현해 낸 산토리 시로후다 위스키가 발매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위스키는 맛과 향이 너무도 스코틀랜드 위스키와 비슷했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반응을 얻지 못했죠.
실패를 겪으며 도리이 신지로는 일본인 취향의 위스키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케츠로 마사타카에게는 스코틀랜드 위스키를 정확히 재현하는 것이 더 중요했죠.
결국 다케츠로 마사타카는 산토리를 박차고 나가 닛카 위스키를 생산합니다. 닛카 위스키는 1954년 아사히 맥주에 매각하여 아사히 맥주의 계열사가 되죠.
반면 도리이 신지로는 와인을 주력 상품으로 내세워 전국적인 성공을 거둔 뒤, 이를 토대로 위스키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32년 ‘산토리 10년 위스키’, 즉 1937년 12년 산 위스키 거북이 등껍질 모양의 병에 담긴 가쿠빈을 출시했습니다.
9. 메탄올 위스키가 진짜 위스키가 되기까지
① 국내에 들어온 위스키
우리나라에 위스키가 최초로 들어온 시기는 개항하기도 전인 1868년입니다. 흥선대원군의 양부인 남연군의 묘를 훼손한 오페르트(Ernst Jacob Oppert) 가 조선 관원들에게 위스키 한 병을 선물로 주었던 것이죠.
개항 이후에는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한 위스키를 다시 조선으로 들여오는 식으로 위스키가 유통되었습니다. 1909년에는 영국 위스키를 직접 수입하는 ‘한양상회’가 등장하기도 하는데요.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면서 회사의 기록을 찾을 수 없게 됩니다. 이후 수입 위스키는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조선총독부의 통제를 받았죠.
이후 1920년에도 상당량의 위스키가 영국에서 수입되었으며, 경성에서도 위스키를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위스키는 아니었고, 소주에 색과 향만 입힌 유사 위스키였죠. 주정에 녹차를 섞던가, 심지어는 보리차를 위스키라고 속여 팔기도 했죠.
이런 상황에서 1938년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달으면서 국산품 애용 운동 바람이 불었습니다. 유사 위스키 생산은 더욱 늘어납니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에서는 식량 부족 때문에 막걸리 양조를 금지시켰습니다. 그러자 위스키, 브랜디, 고량주와 같은 외국 술의 밀매가 판을 쳤습니다. 이듬해에는 심지어 메틸알코올로 만든 ‘살인 위스키, 브랜디’ 등이 시중에 유통되기도 했죠.
가짜 위스키가 판을 치자, 자신들은 진짜 위스키를 만든다며 저명인사들의 추천을 강조하며 광고하는 곳도 생겨납니다. 바로 해림 고래표 위스키였죠. 물론 이들도 증류 소주 혹은 주정에 사과 껍질을 녹여 위스키 색을 낸 유사 위스키였습니다.
하지만 이익이 잘 나지 않자, 결국 해림 고래표 위스키는 1947년 8월 메틸알코올을 넣은 가짜 위스키를 제조합니다. 이 위스키는 한 달 뒤 서울 종로에 있던 요리옥 태서관에 유통되었습니다. 이를 마신 남자 손님 네 명과 기생 한 명은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맙니다. 이에 해림산업주식회사와 태서관은 폐쇄되고 관계자들은 구속되고, 이를 추천한 진풍진 교수도 구금되었죠.
③ 재무부 장관상까지 받은 유사 위스키
한국전쟁 이후 정부에서는 공식적인 위스키 수입을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미군에 의해 위스키가 시장에 흘러나오기도 했죠. 심지어는 정부가 개최하는 파티에 수입이 금지된 위스키가 버젓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수요에 비해 그 양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일본 위스키가 밀수되기도 하고, 미군들도 한국산 유사 위스키를 마시기도 했죠.
밀수된 일본산 위스키 중 산토리에서 만든 토리스Torys 위스키가 인기였습니다. 이에 유사품도 생겨났는데요, 바로 1955년 등장한 도리스 위스키였죠. 도리스 위스키는 출시 후 인기를 얻고 재무부장관 특상까지 받았습니다. 판매자들은 도리스 위스키를 ‘한국 최초의 양주’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위스키 원액 한 방울도 안 들어간 유사 위스키였지만 말이죠.
하지만 1960년 부산의 국제신보에 “도리스 위스키는 일본 산토리의 ‘토리스 위스키’ 이름을 따서 만든 것으로 버젓한 불법 상품 도용’이라는 기사가 실렸죠. 도리스 위스키 사장은 상표 위조 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하지만 구속에서 풀려난 직후 ‘도라지 위스키’라 이름을 바꾸고 버젓이 판매를 이어갔죠.
④ 캪틴큐와 나폴레온의 탄생
유사 위스키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진짜 위스키 맛을 모르기 때문에 유행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64년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들이 진짜 위스키를 마셔보면서 상황은 바뀌게 됩니다. 이들에게 유사 위스키를 보내면 나라 망신일 것이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1970년 위스키 원액을 20% 넣은 위스키 그렌알바를 만들어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한국군에게 보냈습니다.
1973년에는 인삼주 같은 국산 술을 수출하기 위해 위스키 원액 수입 허가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도라지 위스키를 비롯한 유사 위스키의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위스키 원액을 20% 미만으로 섞은 재제주 위스키가 대체하게 됩니다. 유명한 재제주 위스키로는 숙취가 없다는 전설의 캪틴큐(왜냐하면 하루를 꼬박 날리고 이틀 후에나 일어나니까!)와 나폴레온 등이 있죠.
제재주 위스키의 위스키 원액 함량 기준은 매년 변경되었습니다. 1977년에는 20% 이상, 1978년에는 30% 이상, 그리고 마침내 1984년 위스키 원액 100%로 만든 술을 위스키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위스키 수입도 1989년 7월부터 부분적으로 허용되다가 1990년 완전 자유화가 되죠.
위스키 기준이 상향되고 수입 자유화가 되자 기업들은 위스키를 해외에서 수입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저렴하다고 판단해 국산 위스키 제조를 포기합니다.
⑤ 진짜 국산 위스키의 시작은 지금부터
- 쓰리소사이어티스
2020년 남양주에 한국 최초의 크래프트 싱글몰트 위스키 증류소, 쓰리소사이어티스가 탄생합니다. 재미교포 출신의 대표, 스코틀랜드에서 온 마스터 디스틸러, 그리고 한국인 직원들. 각기 다른 세 사회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한국 최초의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뭉쳤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었죠.
도정한 대표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최연소 임원을 지낸 뒤 회사를 나와 크래프트 맥주 회사 ‘핸드앤몰트’를 창업한 경력이 있습니다. 마스터 디스틸러인 앤드루 샌드는 18살에 글렌리벳 증류소에서 경력을 시작해 43년째 위스키를 만들어온 장인입니다. 증류소에 있는 증류기도 스코틀랜드에서 제작해 공수해 왔죠.
이들은 2021년 기원을 출시하며 한국 위스키의 시작을 알립니다.
- 김창수 위스키
김창수씨는 위스키에 빠진 나머지, 한국에서도 위스키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에 2014년 스코틀랜드를 다녀온 사람입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노숙을 하며 100군데가 넘는 증류소를 다녔죠. 이러한 스토리는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 타케츠루 마사타카의 이야기와 비슷해 일본에 관심을 받아 다큐멘터리로 방영되기도 했습니다. 훗날 2020년 김창수는 다케츠루 마사타카의 책을 번역해 『위스키와 나』를 출간하기도 합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위스키 증류소를 만들려고 했지만, 개인이 하기에는 쉽지 않았죠. 투자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직접 돈을 모으고 대출을 받아 김포에 땅을 사서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술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2020년 김창수 위스키 증류소가 문을 엽니다.
이러한 김창수의 이야기는 위스키 애호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고, 2023년 출시한 김창수 위스키는 오픈런 대란을 일으켰습니다.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
- 김성욱(2022) 『위스키 안내서』 성안당
- 케빈 R. 코사르(2016) 『위스키의 지구사』 휴머니스트
- Gavin D Smith(2015) 「THE PATTISON BROTHERS」
- 최프로(2022) 「김창수 위스키를 아시나요?」
- 쓰리소사이어티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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