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실
오락에 필요한 시설이 되어 있는 방. 또는 오락을 하는 방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1. 갤러그는 메이드인 청계천?!
1978년 미국의 비디오 게임 회사 아타리가 제작한 〈브레이크아웃(일명 벽돌 깨기)〉이 한국에 등장해 인기를 얻었습니다. 1979년에는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도입되며 오락실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죠.
그리고 1982년, 계보를 잇는 슈팅 게임 〈갤러그〉의 등장으로 전자오락실이 대유행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이 게임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1979년 서울 시내에 900여 곳으로 추산되었던 전자오락실이 1982년 3,570여 곳, 1983년에는 6,000여 곳으로 늘어나게 되죠.
〈갤러그〉는 일본 반다이 남코(Bandai Namco)에서 제작한 게임으로, 원제는 〈갤러가(Galaga)〉였습니다. 하지만 청계천에서 해적판을 만들면서 남코사 타이틀이 사라지고 제목도 바뀌었죠.
2. 오리지널보다 좋은 청계천 해적판
청계천의 제조업체들은 해적판을 계속해서 만들어 냈습니다. 1980년대 중반 전자오락 기판 누적 판매는 300만 대에 이르렀죠. 이는 해적판을 복사해 동남아 등지로 수출했기 때문에 가능한 수치였습니다.
사실 업체 입장에서는 해적판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배경이 있긴 했습니다. 한국에 수입된 오락기 대부분이 일본 회사의 기판이었는데, 당시 일본 문화에 대한 법적 족쇄 때문에 일본 제품은 수입이 불가능했어요.
따라서 청계천의 업체들은 일본에서 새로운 게임기가 나오면 5일 안에 초정밀 필름을 입수하여, 칩보드를 풀고 금성 반도체로 재구성해 해적판을 만들었어요. 카피하는 과정에서 보드는 커지고, 실제 중고 자동차 핸들을 개조해 레이싱 게임의 조이스틱으로 사용하는 등 그야말로 마개조였지만, 오리지널 게임기의 성능을 거의 그대로 구현하는 것은 물론 오히려 정품보다 고장이 잘 나지 않는 기판(!)을 만들어 내기도 했죠.
3. 게임의 역사는 곧 게임 탄압의 역사
전자오락이 인기를 끌자 여기저기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재밌는 건 최초의 이의 제기가 교육계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2차 석유 파동의 여파 속에서 전자오락실만이 절전하지 않는다고 여론의 뭇매를 맞은 게 먼저였죠.
또 다른 이의제기는 전자오락실에서 훼손된 동전이 유통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10원짜리 한쪽을 갈아 50원으로 인식시키는 일이 잦았고, 90년까지 동전에 구멍을 뚫어 낚싯줄로 매달아 넣다가 빼는 행위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었죠.
물론 교육계에서도 ‘전자 독버섯’, ‘컴퓨터에 빼앗긴 영혼의 활자’ 등의 비판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이에 국무총리 산하 사회정화위원회가 거리 질서를 명목으로 전자오락실을 단속해 폐쇄했으나 줄기는커녕 늘어나기만 했죠. 이 때문에 전자오락실은 ‘컴퓨터 지능개발실’ 같은 이름으로 운영하기도 했어요.
1970~80년대에는 게임이 정치적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갤러그〉를 두고도 어떤 이는 공산주의적 호전성을 길러 낸다고 말하는 한편, 어떤 이는 빨간 마후라가 되어 적기를 격추하는 기상을 길러 볼 수 있다고 해석하기도 했죠.
1976년 미국에서 개발된 두더지 게임이 1980년대의 한국에서는 〈멸공 두더지 잡기〉라든가 〈땅굴 파는 두더지〉라는 제목을 달고 나와 흥행하기도 했어요.
그중에서도 가장 황당한 사례는 1986년 〈농민반란(いっき, 잇키)〉이라는 게임이 전량 수거된 사건입니다. 일본의 썬소프트라는 회사가 개발한 게임이었죠. 무려 세금 공무원과 농부의 싸움을 다루는 만큼 아시아 경기를 앞두고 정부에 대한 불신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수거되었어요.
국내에서 게임에 관해 강력한 억압 정책을 펼쳤던 정부는 아이러니하게도 수출용 오락기의 생산은 장려했습니다. 심지어 국내에서 아케이드 게임장이 유행하기도 전인 1970년대 중반부터 이미 콘솔 게임기를 수출하고 있었죠.
4. 오락기 양성화 정책이 망했기 때문에 반도체가 발전했다?!
1983년 10대 소녀가 게임기 안에 있는 동전을 훔치려다 감전사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불법적으로 개발된 기판에 안전장치가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죠.
이러한 안전사고가 계속 일어나자 정부는 1983년 게임기 양성화 조치를 취합니다. 게임기 기준을 통일하고 손기정, 심청전, 이순신, 애국가 등을 소재로 한 국산 게임 제작 계획을 세웠죠. 하지만 컴퓨터 전자 제품에 대한 이해 없이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정교한 기준을 만들지 못했고, 오락기 캐비넷에 대한 통일성만 간신히 맞췄습니다. 이 조치의 여파로 국산 게임 제작은 오히려 중단되어 버렸죠.
실패한 것처럼 보였던 정부의 게임기 양성화 정책은 의외의 곳에서 성과를 냅니다. 형식 승인 비용과 세금 납부에 부담을 느낀 일부 업체들이 다른 산업으로 퍼져 나간 것이었어요. 이로써 오락기 기판을 제조하던 PCB(인쇄 회로 기판, Printed Circuit Board) 제작 기술이 산업 현장에 쓰이는 전자 기기 개발 기술로 전환되었습니다.
게다가 1983년 세계적으로 전자 오락기판 칩이 64K ROM으로 추세가 바뀌자 32K ROM을 개발하고 있던 한국전자기술연구소는 관련 기술을 금성, 삼성, 대우, 아남전자, 한국전자, 현대전자 등에 이양했는데요. 이처럼 전자오락 기판을 제작했던 경험이 오늘날 반도체 대량유통구조 발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죠.
게다가 1983년 세계적으로 전자오락 기판 칩이 32K ROM에서 64K ROM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32K ROM을 개발하던 한국전자기술연구소는 관련 기술을 금성, 삼성, 대우, 아남전자, 한국전자, 현대전자 등에 이양했는데, 이처럼 전자오락 기판을 제작했던 경험이 오늘날 반도체 대량유통구조 발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5. 〈철권〉은 무릎, 〈버추어파이터〉는 신의욱
1990년대 오락실의 전성기를 이끈 것은 〈버추어 파이터〉〈더 킹 오브 파이터즈〉〈철권〉 등의 격투 게임입니다. 특히 〈버추어 파이터 2〉의 경우 액션 게임 최초로 프로 팀이 생겨나고 여러 대회를 진행하면서 더욱 큰 인기를 얻었어요. 대표적인 스타플레이어로는 ‘아키라 키즈’ 신의욱이 있었습니다.
당시 중학생에 불과했던 신의욱은 국내 오프라인 대회는 물론 일본에서 열린 세계 대회에서도 압도적인 기량으로 우승했죠. 하지만 일본은 신의욱의 우승 이후 버추어 파이터 세계 대회를 열지 않았고, 대회 영상도 일본 국내전으로 채우는 치졸함을 보여 줍니다. (※ 이에 관련한 자세한 영상은 G식백과에서 볼 수 있습니다)
90년대 초 중반은 격투 게임의 전성기였다면 90년대 중반은 리듬 게임의 시대였습니다. KONAMI에서 출시한 〈비트매니아〉와 〈DDR(댄스댄스레볼루션)〉이 게이머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죠. 지상파 방송에서도 연예인들(스티븐 유 등등)이 나와 DDR 대회를 방영하기도 했어요.
리듬 게임의 대중적인 인기를 계기로, 오락실은 기존의 퇴폐적이고 어두운 이미지를 벗어나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장소라는 긍정적 인식을 얻게 되었죠.
6. 〈바다이야기〉로 초토화되다
하지만 리듬 게임의 인기도 2002년부터 하락하게 됩니다. 수록곡의 난이도가 점점 높아지고 난해해져서 결국 특정 매니아만의 리그가 되었거든요. 게다가 2000년대는 PC방의 선풍적인 인기로 오락실이 크게 줄어듭니다. 2000년 25,341개 지점에서 2002년에는 7,404개 지점으로 줄어들게 되었죠.
수입원이 줄어들던 오락실은 불법 사행성 게임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바다이야기〉입니다. 높은 중독성과 현금 환전이 가능한 바다이야기는 수많은 중독자를 양산하며 경찰의 단속을 받았어요. 게다가 당시 여권 유력 인사 중 한 명이 바다이야기 게임기 제조 회사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전담팀까지 꾸려져 수사를 진행하게 되었죠.
조사 결과 정치권 유력 인사의 개입설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게임 허가 과정에서 영상물 등급 위원회가 도박 기능의 탑재 사실을 경찰에게 은폐한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이를 계기로 영상물 등급 위원회는 게임 심의 자격을 박탈당했어요.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게임물 등급 위원회가 출범했고요.
〈바다이야기〉 사건의 여파로 아케이드 게임 시장 역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아케이드 관련 게임에 대한 법률이 대대적으로 제정되면서 오락실의 발전은 더욱 어려워졌죠.
7. 게임을 부추기는 데에는 경쟁 심리만 한 게 없다
2000년대 중반 〈바다이야기〉 사건과 정부의 규제로 오락실 시장이 무너지자, 게이머의 수요보다 오락실의 공급이 줄어드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그러자 시장의 원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다시 문을 여는 오락실도 생겨났죠.
2008년 발매된 리듬 게임인 〈디제이맥스 테크니카〉와 〈유비트〉 등이 인기를 얻었습니다. MBC GAME 채널을 통해 〈철권〉시리즈도 다시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때부터는 오락실 게임도 카드를 넣고 플레이하면 자신의 플레이가 기록되었는데. 이는 한국인 특유의 경쟁 심리를 건드려 호황을 가져왔다고도 하죠.
8. 네임드 오락실의 폐업
하지만 수요와 공급이 맞물리며 발생한 오락실의 호황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네트워크 기술의 발달로 집에서 게임을 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기 때문이죠.
특히 온라인 게임 플랫폼인 ‘스팀’에서 철권을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격투 게임을 기반으로 성장한 오락실이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게이머가 탄생한 곳이자 해외 유저들의 사랑을 받은 철권의 성지였던 ‘대림 그린 게임 랜드’가 이 여파를 피하지 못하고 2018년 10월 폐업을 하게 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힘들게 버텨 오던 많은 오락실은 폐업 절차를 밟았습니다. 스트리트 파이터의 성지였던 노량진의 ‘정인 게임장’도 2020년 6월 결국 문을 닫게 되었죠.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
- 이상우(2012) 『게임, 게이머, 플레이』 자음과모음
- 임태훈 외 4명(2017) 『한국 테크노컬처 연대기: 배반당한 과학기술 입국의 해부도』 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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