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우영우(박은빈 역) 변호사는 서울대학교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변호사 시험도 최고 득점을 올린 수재다. 하지만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어 취직을 못 하고 있었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아버지의 친구가 대표로 있는 법무법인 한바다에 낙하산으로 입사했고, 좌충우돌 초임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정명석(강기영 역) 변호사는 15년 차 베테랑 변호사로, 법무법인 한바다의 팀장이다. 그런 그의 팀에 우영우가 배치를 받자 “어떻게 이런 애를 가르치냐”면서 따지게 되나, 대표가 강력히 우영우를 지지하자 사건을 맡겨 보고 그 결과에 따라 판단하겠다고 제안한다.
우영우의 첫 사건은 살인미수 사건이다. 수십년 간 남편의 폭언과 의처증에 시달리던 아내에게 치매 초기의 남편이 “몸 파는 년”이라며 폭언을 하고, 아내는 격분을 못 이겨 다리미로 머리를 내리쳤다. 검사는 이를 살인미수로 기소했다.
정명석 변호사는 말한다. 검사는 할머니의 상황을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집행유예를 줄 생각으로 기소한 것 같다고. 하지만 우영우는 이렇게 말한다.
이 사건은 재미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고래 퀴즈 같아요. 몸무게가 22톤인 암컷 향고래가 500kg에 달하는 대왕오징어를 먹고 6시간 뒤 1.3톤짜리 알을 낳았다면, 이 암컷 향고래의 몸무게는 얼마일까요? (…)
정답은 ‘고래는 알을 낳을 수 없다’는 겁니다. 고래는 포유류니 새끼를 낳죠. 무게에만 초점을 맞추면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핵심을 봐야 돼요. 이 사건은 형사 사건이니 사람들은 보통 형법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민법을 봐야 해요.
검찰의 생각대로 살인미수죄가 인정되고, 정상참작으로 집행유예 판결을 받는다면 모두가 좋은 결말을 맞을 것 같다. 하지만 정작 민법상 중요한 ‘상속권’을 잃게 된다. 그러면 남편의 연금과 월세를 받는 남편 건물을 상속받을 수 없으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핵심을 짚어낸 것이다.
베테랑 변호사인 정명석도 발견 못한 핵심 쟁점을 어떻게 초짜 변호사 우영우가 발견했을까? 정명석이 무능하고, 우영우가 더 훌륭한 변호사인 것일까? 정말로?
CRT(Cognitive Reflection Test)
자, 잠깐 다른 문제를 내보겠다. 한번 맞춰보시라.
여기 야구 방망이와 공이 있다. 이 둘은 합쳐서 1달러 10센트다. 방망이는 공보다 1달러 비싸다. 이때 공의 가격은?
무척 간단한 문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실험을 진행한 예일대학교 마케팅 교수 셰인 프레드릭은 아이비리그 대학생 절반 이상이 정답을 맞추지 못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Cognitive reflection and decision making. 2005)
만약 ’10센트’라고 대답했다면, 당신은 이 문제가 너무 쉽다면서 편하게 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오답이다. 반면 즉각 답을 내놓지 않고 한 번 더 생각했다면, 정답이 5센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CRT(Cognitive Reflection Test) 라고 한다.
이 테스트는 쉽고 단순하게 접근하면 오답이 되고, 한 번 더 꼼꼼히 생각하면 정답을 맞출 수 있는 문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정답률을 높일 수 있을까?
놀랍게도 문제가 보기 쉽게 작성된 경우와, 인쇄를 흐릿하게 작성한 경우의 정답률이 달랐다. 인식하게 쉽게 크고, 명확하게 작성된 인쇄물로 진행한 학생들에 비해 흐릿하고, 글자체도 어렵게 작성된 인쇄물로 테스트를 진행한 학생들의 정답률이 훨씬 더 높았다.
대학교 전공 시험과 학점을 돌이켜 보면
나는 학부 시절에 법학을 전공했다. 그런데 전공 시험을 볼 때마다 징크스가 있었다. 암기할 분량이 무척 많았기 때문에, 모든 범위를 다 공부할 수는 없었다. 나와 친구들은 과거 시험에 자주 나왔고, 교수님이 평소 중요하다고 강조한 주제를 중심으로 예상 문제를 뽑아 달달 외웠다.
문제는 시험시간 시작과 동시에 칠판에 공개된다. 예상했던 문제가 나오면 시험장은 축제 분위기가 된다. 환호성이 터지고, 다들 흥분한 마음으로 달달 외웠던 것을 빠르게 답안지에 받아 적는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나오면 시험장은 급속히 냉각된다. 탄식이 흐르고, 분위기가 무거워지며, 다들 천천히 답안지를 메워 간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준비했던 문제의 경우 짜릿한 기분으로 빠르게 작성했다. 의외의 문제가 나오면 시험 내내 한숨을 쉬었다. 법전을 뒤적이며 유사한 조항을 찾아보고, 기억을 어떻게든 짜 맞추며 답안을 작성했다. 종료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겨우 답안을 완성해서 제출했다.
놀라운 것은 성적이었다. 기분 좋고 짜릿하게 작성한 답안의 경우 보통 B+ 정도의 성적을 받았다. 그런데 낑낑거리면서 겨우 작성한 답안은 A+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예상 문제가 나온 경우에는 너무 자신 있게 외웠던 답을 적은 나머지 문제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숨겨진 쟁점이나 이슈를 빼먹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달달 암기한 내용을 적다 보니 책에 있는 내용을 불필요하게 많이 적었고, 상대적으로 내 생각에 대해서는 적게 적어 답안 불균형이 컸다.
반면 예상치 못한 문제가 나왔을 때에는 문제를 수차례 읽었다. 단어 하나하나를 쪼개서 법조문과 연결했고, 파편적인 지식일지언정 가급적 모든 부문에 대해서 언급했다. 암기한 게 없다 보니 주로 내 생각을 중심적으로 적었는데, 교수님께서는 이에 높은 점수를 주셨던 것이다.
시스템1과 시스템2가 이상적으로 어우러져야 한다
인간이 의사를 결정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 시스템 1: 쾌활하게, 직관적으로, 빠르고, 창의적으로 접근하여 결정하는 방식
- 시스템 2: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느리게, 분석적으로 접근하여 결정하는 방식
이 두 가지 방식은 상황에 맞게 작동되어야 한다. 경험 많은 사람이 자기 분야에서 빠르게 뭔가를 결정할 때에는 직관적 사고인 시스템 1이 가동된다. 반면 복잡하고, 정보가 많고, 논리적으로 비교해서 결정해야 할 경우 논리적 사고인 시스템 2가 작동되어야 한다.
CRT나, 나의 법과대학 시절 전공과목 시험은 모두 시스템 2가 작동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쉽고 빠르게 접근할 만한 상황이 만들어지면(명확한 CRT 인쇄물이나 예상했던 전공 시험 문제가 나오는 등) 시스템1이 작동되어 오답이 되고 좋지 않은 학점을 받았던 것이다.
우영우가 정명석 변호사보다 실력이 뛰어나서 숨겨진 쟁점을 찾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명석 변호사는 너무 뻔하고 쉬운 사건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시스템1이 작동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꼼꼼히 접근해야 알 수 있었던 숨겨진 쟁점을 놓치게 된 것이다.
반면 우영우는 처음 접하는 사건이다 보니 꼼꼼히 여러 번 공소장을 읽었고, 자폐 스펙트럼 장애로 인해 업무를 느리게 진행하다 보니 시스템2가 자연스럽게 작동된 것이다. 그래서 숨겨진 쟁점을 찾았고, 좋은 변호 전략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정명석 변호사가 빨리 이를 받아들여 둘이 화합하게 된 것은, 팀을 위해서 너무 좋은 선택이었다. 시스템1과 시스템2는 어느 하나가 더 중요한 게 아니다. 필요한 상황에서는 둘 다 각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 보완하며 좋은 팀워크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원문: 장철우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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