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좋은 불평등』을 읽다
다 읽는 데 세 시간도 안 걸렸다. 저자와 내 생각의 ‘싱크로율’이 거의 90%에 육박했기 때문이었다. 페이스북을 통한 간접적인 교류는 물론, 매년 한두 번씩 전화 통화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한 의견 교환을 했기 때문에 일종의 ‘컨센서스’가 형성된 느낌이다.
서평이라기보다는 그 ‘컨센서스’ 중 몇몇 부분을 정리하고, 약간 석연찮은 부분, 논리가 100% 깨끗하지 못한 듯한 부분도 찾아보았다.
1.
한국의 불평등이 확대되기 시작한 시점을 1997년 외환위기라고 본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게 일단 충격이었다. 내가 찾아본 많은 자료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1992~94년을 소득분배 악화가 시작된 시기로 제시하고 있는데 말이다.
소득 불평등 확대를 비롯하여 제조업 고용 감소, 섬유 등 경공업의 급속한 축소, 해외투자 확대 등 90년대 초부터(즉 외환위기 전부터) 시작된 여러 가지 변화들, 그리고 그 변화들의 근본 원인이 중국 경제의 발전이라는 사실을 여러 ‘진보 경제학자/운동가’들은 과연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고의로 무시했던 것일까?
책 뒷표지에 있는 서평, ‘우리 사회 불평등의 원인이 수출 대기업의 후한 성과급 때문이며 우리가 보살펴야 할 계층은 저임금 근로자들이 아니라 고령층 노인들이라는 결론이 놀랍다’를 보면서 나는 다시 놀랐다. 이 ‘놀라운 결론’이 팩트라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여론이 ‘상위 10%’ 내지 ‘소득 10분위’를 중심으로 형성된다는 또 하나의 팩트를 상기시킨다.
‘수출 대기업의 후한 성과급’은 당연한 현상이 아니라 경제 성장을 수반하는 좋은 불평등이며(따라서 의식적으로 계속 지켜나가야 하며), 노인 빈곤이야말로 우리가 해결해야 할 나쁜 불평등이라는 것이 왜 놀라우냐는 말이다.
2.
우리나라의 ‘중진국 함정’ 탈출은 바로 그 ‘좋은 불평등’이 현실화된 것이며, 이는 중국의 고성장에 한국이 ‘올라탔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주장이다. 결국 성장과 불평등 심화가 서로 인과 관계가 있다기보다는 (성장이 불평등을 낳는다거나, 불평등이 성장을 저해한다거나 하는) 중국의 고도성장이라는 ‘제3의 요인’ 때문에 고성장과 불평등 심화라는 결과가 동시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 의문이 생긴다. 중국은 그럼 어떻게 ‘중진국 함정’을 탈출해야 하는가? 작년부터 중국 경제의 저성장이 이어지면서 중국도 결국 ‘중진국 함정’을 호되게 겪고 있다는 주장이 점점 많이 보이고 있다. 문제는, 이미 대국인 중국에게 ‘올라탈 나라’는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세계화의 후퇴로 수출의 성장 기여도는 줄어들 것으로 보이는데 말이다.
70-80년대 세계화의 정체기에 고도성장을 이뤄낸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경제 실적이 새삼 놀라워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박정희 집권 후기 중화학 공업 육성의 결과이며, ‘유신 체제’에 대한 긍정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유신 시대 임금 인상의 억제를 ‘권위주의적 연대임금제’로 해석한 신선한 시각은 저자 고유의 것으로 보인다. (‘한국적 민주주의’만 있는 줄 알았더니 무려 ‘한국적 렌-마이드너 모델’도 있었다는!) 80년대까지 세계화의 정체기 (세계 GDP 대비 상품무역 비중의 정체)가 이어지는 그래프를 보면 또 새삼 80년대 말의 ‘3저 호황’이 ‘거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전두환의 치적이라. 물론 80년대 초반 김재익 수석을 필두로 한 안정화 정책도 있겠지만, 어찌 보면 80년 외환위기를 미국과 일본의 도움으로 수습한 것이 더 클 수도 있다. (아무리 냉전 상태였다고 해도 일본에서까지 도움을 받는 게 과연 그렇게 쉬운 일이었을까.)
3.
한국의 빈곤은 워킹 푸어가 아니라 노인 문제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모든 ‘진보’ 세력들이 밑줄을 그으면서 복습 또 복습해야 하는 명제이다. 미국 좌파들이 개발한 그놈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론에서는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을 통한) ‘노동 빈곤층’의 해소가 불평등 문제 해결의 첩경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상황은 180도 다르다는 얘기다.
취업자 중 빈곤층은 8.1%, 취업자가 있는 가구 중 빈곤 가구는 8.5%. 이게 무슨 워킹 푸어인가? 빈곤층, 빈곤 가구는 결국 노인으로 구성된 1-2인 가구가 대부분이며, 이 노인 빈곤 문제의 해결이야말로 대한민국 불평등 문제 해결의 핵심 과제이다. 노인 빈곤 해결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정치인이 바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는 게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노인 빈곤 문제는 물론 ‘추세적으로 개선’되고는 있지만 아직 완벽하게 해결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청년 정치’ 담론이 모든 정치권을 압도하고 있는 것만 같다. 역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게 우리 정치의 진리였나?
4.
이 책에서 가장 논리가 약한 부분이 바로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과 불평등에 끼친 영향을 보여주는 곳 아닐까 싶다.
중국의 신창타이 정책으로 2015년부터 소득 불평등이 완화되었다는데,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으로 2018년 소득 불평등이 갑자기 악화되었다…
물론 전자는 가계소득이고 후자는 가구소득이며, 이 둘 사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기는 한다. 하지만, 책의 큰 흐름을 볼 때 최저임금 얘기가 좀 튀는 것도 사실이었다. 최저임금 인상과 고용 증가세 둔화가 동시에 일어난 것은 맞지만, 이 둘 사이에 정말 인과관계가 있는지, 아니면 중국-성장-불평등의 관계처럼 뭔가 ‘제3의 요인’이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한 것도 같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나라는 어떻게 해야 할까? ‘좋은 평등’ 즉 고성장과 소득분배 개선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목표이겠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좋은 불평등’이라도 지속해 나가면서 불평등 문제 해소는 일단 노인 빈곤층에 대한 지원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 차선책이라고 저자는 보는 듯하다. 그리고, 문제는 중국 경제의 최근 변화로 볼 때 이 ‘좋은 불평등’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은 성장 전략이다. ‘진보’가 싫어하는. 저자의 논의는 ‘진보’가 반사적으로 거부하는 대학 등록금 인상과 영어 교육 확대에까지 미친다. 물론 성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멀티 제국의 시대’와 ‘블록화된 재세계화’를 오히려 한국에 유리하게 활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난 10년간 중국이 ‘기술 사다리’를 올라오면서 우리나라 디스플레이, 핸드폰, 가전제품의 세계 시장 점유율이 크게 하락하였다는데, 앞으로 이 점유율을 반전시킬 가능성은 혹시 없는 것일까. 물론 반도체의 우위를 지키고 더 확대한다는 가정 아래서.
중국의 고도성장 덕분에 한국이 중진국 함정에서 벗어났듯이, 중국의 ‘위축’ 내지 ‘중진국 함정에서의 정체’ 덕분에 한국이 ‘코끼리 곡선’의 그 푹 꺼진 부분에 빠지지 않고 ‘좋은 불평등’을 다시 맞이하게 될 수는 없을까.
원문: 오석태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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