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정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결정하면서 ‘좌편향’이라고 주장한 고등학교 검정 한국사 교과서 7가지 중 하나다. 굳이 금성출판사 발간 교과서를 고른 것은 현재 역사교과서 논란의 시초가 된 것이 바로 2003년 금성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등학교 현장에서의 채택률은 2014년 현재 7.5%로 8가지 한국사 교과서 중 네번째이다. 이번 교과서 논란에서는 특히 ‘주체사상탑’이 나온 교과서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머리말
먼저 머리말을 살펴 본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물론 철저한 학문적 검증을 거쳐야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역사가의 주관이 개입되는 ‘주관적 의미의 역사’임을 강조하고 있다. ‘객관적이고 올바른 역사를 학생들이 배워야 한다’는 정부의 주장과 모순되는 얘기다. 역사 교육의 궁극적 목적이 과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현재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를 기반으로 불확실한 미래에 대처하는 역사적 사고력을 기르는 것이라고도 되어 있다.
검정 역사 교과서에 대한 비난은 근현대사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광복 이후를 다룬 맨 마지막 6단원부터 훑어 올라간다.
6단원: 광복 이후
동서냉전
미국과 소련 사이의 동서 냉전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으로 보고 있다. 당시 서방 세계에서 주로 썼던 표현인 ‘자유민주주의’ 대신 소련에서 썼던 ‘자본주의’를 사용해서 좌편향인가? 보수 우파 쪽에서도 자유민주주의와 함께 자본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피케티를 ‘반자본주의’라고 비난하지 않는가!) 무엇보다, 냉전이 끝났다는 지금도 중국이 자유민주주의를 도입하지 않고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를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보면 동서 냉전은 자유민주주의보다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로 보는 것이 좋다는 결론이 나온다.
해방 이후의 좌우 대립
8.15 광복 이후 시급한 과제가 자주독립 국가 건설, 식민지 유산(친일) 척결, 토지 개혁 등 사회적 요구 해결이었다고 서술한다. 역시 이것이 좌편향이라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보수 세력은 ‘대한민국에서는 그 과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주장할 것 아니냐’라고 주장하겠지만.
미국은 군정 하에 조선 총독부 행정체제를 활용하는 현상 유지 정책, 반면 소련은 행정권을 인민 위원회로 넘긴 간접 통치 방식을 채택했다는 서술은 자칫 소련군이 미군보다 나은 정책을 실시했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 다만, 오히려 소련의 인민위원회를 통한 간접 통치가 남북 분단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소련이 신탁 통치, 미국이 한국의 즉각 독립을 요구했다는 동아일보의 오보가 한국인들의 신탁에 대한 반발을 가져왔다는 대목이 나온다. 일부 사람들이 우익의 격렬한 반탁 운동을 야기하여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결과를 낳은 ‘세상을 바꾼 오보’라고 평가하기도 하는 보도이다. (즉 반탁 운동이 없었다면 한반도가 신탁 통치 아래서 통일 국가 건설의 기반을 마련할 수도 있었을 거라는 이야기)
하지만 교과서는 그렇게 멀리 나가지는 않고 그냥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신탁 통치를 식민 지배의 연장으로 간주하였다’, ‘(우익이 전개한) 반탁 운동은 즉시 독립을 갈망하던 한국인들에게 큰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담담하게 서술한다. 1920년대 임시정부 초기에 이승만이 대통령에서 탄핵을 당한 이유가 위임통치 청원이었음을 감안하면 틀린 얘기는 아니다. 교과서는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의 결정적 계기가 된 1946년 6월 이승만의 정읍 발언에 앞서 그 해 2월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먼저 수립되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결론적으로, 해방 직후의 좌우 대립 국면에 있어서 교과서는 좌우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잡힌 시각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다음은 김구와 김규식 등 일부 우익 세력의 분단 방지를 위한 마지막 노력이었던 1948년 4월의 남북 협상(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이다. 남북한이 이미 독자 정부 수립을 위한 작업을 상당히 진행한 상태였기 때문에 실질적 성과를 얻기 어려웠다는 한계를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제주도 4.3 사건에 있어서 교과서는 ‘미 군정청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 단체의 강압적 대응’과 ‘이승만 정부의 군인, 경찰, 우익 단체들을 동원한 대규모 진압 작전’을 말하며, 2000년 4.3 사건 특별법 제정과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제주도민에 대한 사과 역시 언급하고 있다. 우익과 군경의 피해를 언급하지 않았으니 좌편향인가? 내 생각에는 무고하게 희생당한 제주도민의 입장에서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 ‘한반도 내의 유일한 합법정부’
제헌 헌법에 있어서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음이 명시되었다’는 표현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 제헌 헌법 전문에는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 되어 있을 뿐이며, 1987년 헌법 개정 때에 비로소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을 명시적으로 언급했기 때문이다.
다만, 제헌 헌법이 경제 조항에 있어서 중요 산업 국유화 등 조소앙의 ‘삼균주의’적 요소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포함한 것은 불평등 문제가 세계 경제 정책 주요 화두로 등장한 지금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교육부의 검정 지침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며, 교학사 교과서에도 똑 같이 나와 있다. 다만, 대한민국의 합법성을 뒷받침한 유명한 UN 총회 결의문을 ‘이 정부는 선거가 가능했던 한반도 내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승인한다’라고 번역한 것은 오역으로 보인다. 내 해석은 ‘대한민국 정부의 관할 구역은 선거가 가능했던 38도선 이남이지만 대한민국 정부자체는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이다’이니까.
남북한의 친일파 청산
1946년 북한에서 수립된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친일파 처단, 토지 개혁, 중요 산업 국유화 조치 등 각종 개혁 작업을 추진하였다’는 대목은 문제가 될 가능성이 많다. 특히 ‘친일파 처단’은 아무리 찾아 봐도 근거가 잘 나오지 않는다. 북한에서 대한민국의 반민족 행위 처벌법에 상응하는 공적인 친일파 처단 조치를 시행했다는 증거를 나는 찾지 못했다. 오히려, B.R 마이어스는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엣 북한이 친일 협력자들을 열렬히 환영했다고까지 주장한다. ‘개혁’이라는 단어도 좀 더 가치중립적인 단어를 쓰는 것이 좋을 듯하다.
반민법, 반민특위 등 대한민국의 친일파 청산을 위한 노력이 이승만 정부의 비판적인 태도에 의해 미미하게 끝이 났다는 점을 교과서는 명료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승만 정부의 주요 실정임에는 분명하다. 다만, 나치 부역 전력이 50여년만에 밝혀져 87세의 나이에 법정에 선 프랑스의 모리스 파퐁 사례를 든 것은 과도해 보인다. 프랑스의 나치 협조자 처벌과 대한민국의 친일파 청산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에 대해 나는 반대 입장이다.
6.25 전쟁
보수 우파 진영에서 ‘6.25 북침설 지지가 아니냐’고 많이 지적하는 부분이 바로 ‘(6.25 전쟁 이전에도) 38도선 일대에서 남북한 사이에 수백 회에 달하는 크고 작은 교전이 일어났다’는 대목이다. 일단 교과서는 분명 6.25 전쟁이 북한 정권의 용의주도한 준비와 소련, 중국의 협조 아래 벌어진 남침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금성출판사를 비롯 다수의 교과서들이 6.25 이전의 남북 교전을 서술한 것은 기본적으로 6.25 전쟁을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사주를 받은 북한 괴뢰 정권이 일으켰다’는 외인설보다는 ‘좌우로 갈라진 남북한 정부의 근본적인 갈등 때문이었다’는 내인설에 근거하여 해석하려는 노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남북간의 교전 대부분은 북한의 선제 공격으로 일어났지만, 1949년 8월 몽금포 작전 같은 경우는 대한민국 해군의 좌익 승조원이 함정을 몰고 월북한 데 대한 보복이었기 때문에 남쪽의 공격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이 작전은 당시 무초 미 대사의 항의를 받았으며 올해 9월에야 유공자에 대한 무공훈장 서훈이 결정되었다.
전반적으로 6.25 전쟁에 대한 서술이 좀 부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국민 보도 연맹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거창 학살 사건, 신천 사건 등 우익/이승만 정부에 의한 피해는 물론이고 서울대 병원 학살, 서울 북한 점령 하의 인민재판, 대전 형무소 학살 등 좌익/공산군에 의한 피해도 엄청 많다. 교과서는 이런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채 그냥 ‘민간인 희생이 매우 컸다’는 일반적인 표현만 할 뿐이다. 6.25 전쟁을 단순히 북한에 대한 ‘적개심’ 고취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큰 의미를 가진 사건이다. 어쨌든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 체제를 가진 대한민국 국가 형성에 큰 역할을 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4.19부터 6월 항쟁까지
4.19 혁명 후 세워진 제2공화국에 있어서 장면 정부가 박정희보다 먼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5.16 군사 정변 이후 제3공화국에 있어서는 한일 국교 정상화로 받은 대일 청구권 자금이 경제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 누락된 것은 문제였지만, 한국 병합 조약의 무효화에 대한 해석 등 해결 못 한 문제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 것은 바람직했다.
10.26 사태, 5.18 민주화 운동, 제5공화국, 6월 민주 항쟁으로 이르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을 꽤 자세히 서술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5페이지 할애). YH 무역 농성, 80년 서울의 봄, 광주 금남로와 전남도청, 5.18 묘지, 6월 항쟁, 87년 노동자 대투쟁, 법정에 선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등 많은 사진들이 실린 것도 인상적이다. 역시 사진은 중요하다. (위 사진들은 교학사 교과서에는 없다.) 무엇보다도, 5.18 민주화 운동과 6월 민주 항쟁이야말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게 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물론 민주화 뿐 아니라 산업화도 강조하였다. 1차에서 4차에 걸친 박정희 시대의 경제 개발 계획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문제점 또한 지적하였다. 90년대 김영삼 정부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을 썼다고 나오는데, 솔직히 나는 너무 포괄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라는 말 자체를 싫어한다. 이 단어를 쓰지 않고서도 당시의 경제 정책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전태일 평전과 농산물 수입 중단을 요구하는 ‘민족 민주 민중 선언’을 보는 것은 국정교과서로 공부한 나에게 분명 새로운 경험이다.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의 파업 사진도 실려 있다.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강조했으니 좌편향 맞다.
하지만 이런 좌편향이라면 나는 대 환영이다. 반면 새마을 운동은 딱 다섯 줄 등장하며, 그것도 공과가 균형있게 서술되어 있다. (‘유신 체제 정당화에 이용된 측면도 있었다.’) 교육에 있어서 ‘국민교육헌장’이 사료로 등장한 것도 마음에 든다. ‘지금은 이래서는 안 된다’는 반면 교사로 삼는다는 의미에서.
북한 관련 대목
다음은 북한, 정부의 검정 교과서 비판에 단골로 주장하는 ‘주체사상탑’을 비롯한 주체사상 서술 부분은 정말 별 것 아니다. 주체사상탑이 너무 깨끗한가? 구글에서 검색하면 밤에 조명까지 켠 멋있는 주체사상탑 사진이 잔뜩 나온다. ‘사람 중심의 세계관이고 인민 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 사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서술 역시 독자의 호기심을 그리 자극하지 않는다. 사실 교과서는 북한의 권력 기구도, 7.1 경제 관리 개선 조치와 나진 선봉, 신의주, 개성 등 여러 경제 특구, 북한의 학제 등은 북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실제적인 정보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핵 개발과 인권 문제는 딱 한 페이지이다.
그리고, 1954년 제네바 회담 이후 7.4 남북 공동 성명, 남북 기본 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 6.15 및 10.4 남북 공동 선언, 햇볕 정책 등 다양한 남북 화해 협력 노력도 5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담고 있다. 중단원 맨 앞에는 큼지막한 개성공단 사진이 등장한다. 물론 북한 사회에 대한 이해 및 남북 협력을 우선 순위로 삼은 교과서 저자의 의도가 잘 드러난다.
여기서 나는, 북한에 대한 내용을 차라리 한국사 말고 다른 사회탐구 교과목에서 더 자세히 다루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해 본다. 밝은 면(북한의 경제 개혁, 남북 교류 협력)과 어두운 면(북한의 여러 도발, 핵과 미사일 개발, 인권 문제)을 골고루 다루기에 한국사 교과서는 너무 좁은 공간이다. 옛날 도덕과 국민윤리 시간에 북한에 대해 훨씬 자세히 배웠던 기억이 난다.
민주화 이후
마지막 중단원, ‘동북아시아의 협력과 미래를 위한 노력’ 맨 앞에는 ‘나눔의 집’과 수요 집회 사진이 등장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나는 작년부터 ‘고노 담화’를 수용하자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데, 교과서에는 아예 ‘고노 담화’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독도, 센가쿠 열도, 쿠릴 열도 등이 등장하며,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중국의 동북 공정 등도 열거되어 있다. ‘일본은 자기들의 식민 지배가 한국을 근대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며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깨알같은 디스’를 하기도 한다. 교과서는 ‘세계 속의 대한민국 위상’을 강조하며 끝을 맺는다.
소결
결론적으로, 해방 이후 역사를 다룬 부분에서 꼭 고쳐야 할 부분은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친일파 척결 등 각종 개혁 작업을 추진하였다’라는 대목과 ‘선거가 가능하던 한반도 내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UN 결의문을 오역한 것,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한국 전쟁의 민간인 피해를 더 구체적으로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북한의 그동안의 도발 및 핵개발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썼으면 한다는 조언도 해 본다.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문제가 될 수 있는 나머지 부분, 즉 해방 직후 좌우 대결에 대한 중립적 서술, 한국전쟁 직전의 군사적 충돌 서술, 1979-87년의 민주화 과정에 및 남북 교류에 대한 자세한 서술 등은 적어도 내 관점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5단원: 일제시대
다음은 일제 시대를 다룬 5단원이다.
1910년대, 일제시대 초
1910년대 벌어진 토지조사사업은 전통적 민족주의 사관과 ‘뉴라이트’ 사관 사이에 견해 차를 보이는 대표적인 예이다. 당연히 교과서는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많은 농민들이 땅을 빼앗겼다고 서술한다. 다만 토지 조사 사업의 목적 자체가 한국인의 토지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재정의 안정적 확보’라는 일반적인 것이었음은 인정하는 듯하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교과서는 일본의 각종 경제 정책 시행으로 식민지 조선 경제가 어느 정도 양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일단 인정한다. 다만 대부분의 조선인, 즉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이 나아지지 않았고, 산업 구조의 지역적 불균형 역시 심각했다고 하면서 말이다, ‘일제가 구축한 식민지 조선 경제 체제는 조선 민중을 철저하게 배제한, 일제를 위한 것에 불과하였다’고 마무리짓는다.
나는 이미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밝힌 적이 있다. 일단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이 나아지지 않았고 산업 구조 불균형도 심각하다’는 비판은 1960-70년대 박정희 대통령 때의 근대화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대부분의 근대화 과정에서 농민과 노동자는 상대적으로 혜택을 덜 받게 마련이며, 산업 구조 불균형은 어차피 선도 산업, 선도 지역이 있을 것이므로 당연한 현상이다. 그리고 여러 증거들을 감안할 때 대다수 조선인의 절대적 생활 수준은 식민지 시대에 계속 나아진 것으로 보인다.
산미 증식 계획을 서술한 대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수출이냐 수탈이냐’의 여부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교과서는 ‘쌀이 군산항과 목포항 등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고 서술한다. 하나만 확실히 하자. 1920-30년대 산미 증식 계획에 의해 생산량이 늘어난 한반도의 쌀은 강제로 수탈된 것이 아니라 지주가 자유롭게 반출(수출)한 것이다. 일본의 쌀값이 조선보다 비싸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쌀이 ‘수탈’ 된 것은 1938년 국가 총동원법 제정으로 미곡의 시장 유통을 금지하는 ‘공출제’가 시행된 이후였다. 솔직히 단어 하나하나에 이렇게 신경을 쓰는 것이 너무나 피곤하게 느껴진다.
내가 옛날부터 잘 믿을 수 없었던, ‘일본군 위안부’가 수십만 명에 이른다는 주장을 교과서는 그대로 옮기고 있다. 참고로 6.25 전쟁에서 전사한 대한민국 국군이 15만 명이다. 강제 징용 피해자 문제의 제시는 시의적절하지만, 그 손해 배상을 어렵게 하는 한일 협정의 문제점도 지적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3.1 운동과 임시정부
3.1운동 서술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민족 대표 33인과 최남선이 쓴 독립 선언서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을 특기할 만하다. 33인 중 상당수와 최남선이 이후 친일 행위를 한 사실, 만세 시위에 직접 참가한 조선 민중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관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3.1 운동이 나중에 폭력적인 양상을 보였다는 점도 나와 있다. 노동자와 농민들의 적극적 시위 참여가 이후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확산시키는 토대가 되었다는 서술, 3.1 운동을 거치면서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 운동이 민족 운동의 중요한 사상적 경향으로 등장했다는 서술은 ‘좌편향’이 맞다. 하지만 이러한 측면이 분명히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그 수립 초기에 이동휘 등 사회주의자가 참여하는 ‘통일전선’의 성격을 가졌다는 서술에 불편해 할 사람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통일전선’ 그 자체는 좌편향적인 서술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무엇보다 사회주의 세력이 몇 년 안 되어 임시정부에서 추방되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듯하다. 물산 장려 운동이 일부 사회주의자로부터 자본가들이 이익을 챙기는 이기적 운동이라는 비판을 받았다는 대목도 특기할 만하다.
1920-30년대 사회운동
1920-30년대의 대중적 사회 운동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교과서는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 ‘혁명적 농민조합 운동’등의 단어를 쓰고 파업 투쟁, 소작 쟁의의 ‘폭발적 고양’을 논하는 등 보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보기에는 껄끄러울 수 있는 표현을 쓰고 있다. 교과서 저자들이 일제 시대 하에서 ‘혁명=독립’일 수 있다는 것을 핑계로 강하게 서술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제 시대를 사회주의 운동 서술에 대한 일종의 ‘해방구’로 활용했다고나 할까.
여기에 대한 내 생각은 ‘좌편향 맞다, 그래서 뭐?’ 이다. 이렇게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혁명적 운동’으로 자세히 서술한 좌파 교과서도 나오고, 이런 사회주의 운동을 간략하게 서술한 대신 기업 성장 발전 과정을 자세히 분석한 우파 교과서도 나오면 되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의 협동 전선이었던 신간회의 활동 종료에 대해 사회주의 쪽에서 주장한 ‘해소’라는 말을 썼다고 비난하는데, 공식적인 기록상 신간회는 분명 ‘해소’되었다고 되어 있으며, 교과서에서 ‘해소’는 현실적으로 ‘해체’를 의미하게 되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무장 독립운동
무장 독립 운동을 서술한 부분에서는 1921년의 자유시 참변이 문제가 된다. ‘상해파 고려 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 공산당이 대립하여 유혈 사태가 발생하였다’라고만 언급한 부분은 이 사건에서 독립군 부대를 공격한 주체가 소련의 붉은 군대라는 것을 은폐하고 있다는 의심을 불러 일으킨다. 만주와 연해주의 항일 무장 독립 투쟁에 엄청난 타격을 준 사건인 만큼 정확한 사실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독립군의 여러 지도자 중 조선 혁명군 총사령관인 양세봉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 보았다. 찾아보니 독립투사 중 유일하게 남북한 모두의 국립묘지에 안장된 특출한 인물이다. 남북 분단 이전인 1934년 사망했고, 김일성이 어렸을 때 학비를 대 주었던 인연이 있기 때문에 북한에서도 숭상을 받는 모양이다.
김일성, 김구, 이승만
김일성의 대표적 항일 투쟁인 동북항일연군의 보천보 전투도 언급되었다. 그리 큰 전투가 아니었다는 것을 밝히면서도 국내 언론에 크게 보도된 것은 의미가 있다고, 대체로 중립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느낌이다. 보천보 전투가 실제보다 과장되었다는 것이 최근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래도 김일성이라는 인물이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아 아예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김구라는 인물의 비중이 줄어드는 느낌을 받았다. 객관적으로 김구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윤봉길, 이봉창 등이 활약한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침체된 임시정부에 활기를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1930년대 이후 미국에서 외교 독립 운동을 벌인 이승만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쉽게 생각할 사람도 많을 것 같다.
결론적으로
교과서는 분명히 식민지 근대화론을 배격하고 있지만, 1940년대 노동자의 수가 100만 명을 웃돌았다는 대목(당시 조선 인구 약 2,500만 명), 그리고 1930년대 이미 매년 100건 이상 파업이 발생했다는 대목은 당시 식민지 조선의 ‘근대화’가 상당히 진전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잘 살게 되는 것’만이 근대화가 아니다. 농민들이 농토를 떠나 노동자로 전환되고,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 관계가 파업이라는 형태로 빈발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적인 근대화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4단원: 고종 즉위부터 국권 침탈까지
다음은 고종 즉위부터 국권 침탈까지를 다룬 4단원이다. 여기서부터는 특기할 사항만 간단히 짚고 넘어간다.
1882년 임오군란이 구식 군인 뿐 아니라 도시 서민까지 합세한 민중 봉기의 양상을 띠었다는 대목이 있었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부터 1898년 만민 공동회로 이어지는 일련의 기간이야말로 구한말 우리의 운명을 좌우한 시간이다. 청일전쟁의 발발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이었다는, 최근에서야 내가 알게 된 사실이 교과서에 분명히 적혀 있다. 하지만, 일본군의 점령 하에서도 제1차 갑오개혁은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으면서 동학 농민군의 요구도 반영하면서 자율적으로 추진되었다는 해석이 참신하게 다가왔다. 이제까지 갑오개혁은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절반의 개혁’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일부 지역에서 동학군의 집강소가 실질적 통치 기능을 했다는 대목도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교과서는 동학 농민 운동이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한 대안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고 선을 긋는다. 아쉬움이 남지만 현실적으로 제한이 있었다는 얘기다. 이노우에 일본 공사가 부임하면서 이루어진 2차 갑오개혁, 그리고 을미사변 이후 실행된 을미개혁은 일본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았다.
아관 파천에서 돌아온 고종이 대한 제국을 세운 것은 당시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 (청이 쇠망하고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대결)이 절묘하게 유지되었기 때문이었다. 독립 협회는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대한 제국과 협조하면서 입헌 군주제를 추진하는 듯 보였으나, 보수 세력이 독립 협회에서 공화제를 시행하려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된다.
결국 1899년 발표된 대한국 국제는 입헌 군주제가 아닌 전제 군주제를 규정하고 있다. 동학 농민 운동이 조금만 더 ‘근대적’인 성격을 가졌다거나, 독립 협회의 입헌 군주제 제안이 받아들여졌으면 우리가 식민지 통치를 받지는 않았을지 모른다고 생각을 해 보지만, 어차피 역사에 가정이란 없는 것. 기본적으로 열강의 틈 사이에서 우리나라가 너무 힘(경제력, 군사력, 지적 능력 등 모든 측면에서)이 약했다는 것이 국권을 빼앗긴 원인일 것이다. 그리고 교과서엔 바로 이 ‘조선의 허약함’이 잘 나와 있지 않다.
대한제국 출범 후 있었던 ‘광무 개혁’에 대해 교과서는 꽤 자세히 다루고 있다. 특히, 농지 파악을 위한 양전 사업의 경우 과연 몇 년 뒤에 있었던 일본의 토지 조사 사업과 구체적으로 무엇이 달랐는지 의문이 생긴다.
3단원: 조선시대
건국 초기 통치 체제에 있어서 재상 중심(의정부 서사제)과 6조 직계제 사이를 몇 번씩 오간 것이 특이하다. 물론 경국대전에는 신하가 왕권을 제어하는 장치가 잘 마련되어 있다.
세종이 세금 제도(토지세인 공법)를 바꾸기 위해 무려 17만명이 넘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한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조선 초기 노비가 전체 인구의 1/3이었다는 대목에 주목한다. 실은 노비가 더 많았다는 얘기도 어디서 본 적이 있다.
붕당이 처음 형성될 때 경상도의 이황 학파가 동인, 경기도의 이이 학파가 서인이었다. ‘노론 음모설’에서 흔히 주장하는 대로 ‘노론=영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붕당 정치, 공론 정치, 예송, 환국 등이 꽤 자세하게 나온 것을 보니 과거에 비해 이러한 ‘당쟁’에 대해 조금은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이 드러나는 듯하다. 반면 영조의 탕평책은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간의 다툼을 일시적으로 억누른 것’으로 격하했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를 보이면서 그가 ‘공작 정치’로 해석할 수도 있는 적극적 탕평책을 추진했다는 대목도 있다.19세기 전반 세도 정치 시대의 세도가들이 사실은 영조, 정조 시대의 명문가들이라는 점을 강조한 부분은 영,정조 시대에 대한 지나친 숭상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조선 후기 들어 모내기 보급 등 농업 기술의 발전을 기반으로 광작이 성행하고 ‘경영형 부농’이 등장했다는 김용섭 교수의 학설은 이 교과서 뿐 아니라 교학사 교과서에도 등장한다. 아마 교육부 검정 지침에 ‘광작’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
한국 경제사에 대한 ‘뉴라이트’의 여러 주장 중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 ‘경영형 부농’을 부정하고 조선 후기까지 소농 중심의 농업 구조가 이어졌다는 주장으로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광작 학설을 ‘마르크스주의 경제사를 한국에 무리하게 적용한 것’으로 비난하기까지 한다.
개인적으로 새로 나온다는 국정 역사 교과서 내용 중 가장 궁금한 것이 바로 광작-경영형 부농 학설의 지속 여부이다. 경영형 부농의 부정은 자칫 ‘자학 사관’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상품 작물 재배, 도조법, 수공업 발달, 선대제, 덕대에 의한 민영 광산 등 전반적으로 ‘자본주의 맹아론’의 냄새가 나는 대목들은 최근 대체로 의심을 받고 있다고 들었다. 이를테면 도조법(정액 지대)의 경우 일제시대까지도 ‘5할이 넘는 고율의 소작료’라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아 과연 얼마나 넓은 지역에서 시행되었는지 의문이다. 대외 무역 활동을 보면 아무리 활발했다고 해도 아라비아 상인이 오가던 고려 벽란도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느껴진다.
조선 후기 신분제의 동요, 즉 ‘전 국민 양반 되기 운동’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문제는, 조선 후기 경제 상황과 ‘양반 증가’가 어떤 관계가 있느냐이다. 경제가 빠르게 성장해서 양인과 천민들이 양반 신분을 돈으로 사게 된 것인가, 아니면 경제가 몰락해서 국가 재정과 (경제 활동에 직접 종사하지 않는) 양반들의 재무 사정이 악화되어 양반 신분을 판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나는 자꾸만 후자 같다. 서양의 경우 부를 축적한 시민(부르조아) 계층이 돈으로 귀족 신분을 산 사례가 조선처럼 많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 없다. 중국이나 일본도 그렇다. 왜 조선에서만 이런 사태가 광범위하게 나타났는가? 교과서에는 납속첩, 공명첩, 속량문기 등 돈으로 신분 상승를 이룬 갖가지 문서가 나와 있다.
2단원: 고려시대
맨 처음 내 시선을 끈 것은 고려가 무려 ‘칭제’를 했다는 대목이다. 개창 이래 원 간섭기를 제외한 거의 모든 시기에 국왕 자신을 ‘황제’라고 불렀다는 얘기다. ‘외왕내제’라는 말도 나온다. 물론 당이나 명에 비해 송 왕조가 ‘문약’했다는 특성을 고려해야겠지만, 그래도 황제라니, 무역, 여성 인권 등 여러 측면에서 조선보다 고려 왕조가 더 나았다는 내 그동안의 지식에 이제 ‘칭제’가 더해지는 대목이다. (그런데, 묘청의 난 때 ‘칭제’를 주장했다는 얘기는 또 뭔가?)
‘문벌귀족이 음서로 관직을 다 독점한’ 시대로 여겨지는 고려 시대, 고려사 열전에 기록된 인물 650명 중 출신이 불확실한 인물 270명을 빼고, 순수한 음서 출신 인물이 30명이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과거 합격 동기생들이 ‘동년’이라고 부르면서 서로 뭉쳤다는 것을 보면 음서보다는 과거가 훨씬 중요했던 듯하다.
삼별초의 대몽 항쟁에 대해 ‘(몽골과의 강화에 대한) 무신 정권 기득권층의 반발’로 비판적으로 해석한 대목도 눈에 띈다. 구한말 의병 항쟁이나 독립군 무장 투쟁 중 일부가 혹시 수백년 지난 후 ‘(한국의 식민지화에 대한) 조선 왕조 말기 기득권층의 반발’로 해석될 여지는 없을지 궁금해진다. 한일합병조약 당시 노비들이 거리에서 만세를 불렀다는 얘기도 있으니…
따지고 보면 지배 세력의 역동적인 전환도 고려 시대의 ‘미덕’ 중 하나일 듯하다. 초기 호족 및 문벌 귀족들의 전성기에서, 중기에는 무신 정권 시대가 왔고 (특히 최씨 무신 정권은 이제와서 생각해 보니 일본의 막부를 연상케 한다. 고려 시대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덜 받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무신 정권과 원 간섭기는 역사 연구의 측면에서 보면 거의 암흑기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원 간섭기에는 친원 세력/권문세족이 등장했으며, 공민왕 때부터는 신진 사대부가 나타났다(물론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사이에 그리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지만). 신분 구조 역시 굉장히 개방적이었다고 나온다. 양민이 귀족으로 상승하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적어도 하층민이 양민이 되는 경우는 많았던 것 같다.
경제 체제에 있어서는 ‘고려 중엽 이후 생산성이 향상되어 자영농이 증가하고 경제력을 쌓아 부자가 되는 농민도 늘어났다’는 대목과 ‘(고려) 중기 이후 귀족들의 농장이 늘어남에 따라 토지를 빼앗기고 소작농이 되거나 아예 노비로 전락하는 농민의 수가 증가하였다’라는 대목이 서로 모순됨을 발견했다. 김용섭 교수의 ‘광작론’이 고려 시대에까지 진출한 것일까. 어쨌든 사방 100m에 이르는 고려시대 저택 유적이 발견된 것을 보면 고려 때의 부자들은 조선 시대보다 훨씬 더 사치스럽게 살았던 듯하다.
고려시대의 여성 지위가 조선시대보다 높았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다. 여성의 재혼이 허용되고, 재산이 남녀 균등하게 상속되며, 결혼 이후에도 자기 재산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주장대로 ‘일처 다부제’가 있었는지는 상당히 논쟁적인 주제 같다.
1단원: 상고사 및 고대사
마지막으로 1단원이다. 논쟁이 가장 심한 상고사 및 고대사 부분을 포함한다.
우선 홍산 문화를 중국의 신석기 문화로 분류한 지도가 많은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것 같다. 이를 단군 조선의 유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우리나라에 많기 때문이다.
고대사 주요 논란 중 하나인 고조선의 위치는 요동에서 평양으로 이동했다는 ‘이동설’을 채택하고 있는 듯하다. 교육부 검정 기준으로 추정한다. 위만 조선을 세운 위만은 중국 진한 교체기의 유이민이라고 본다.
‘한 군현 중 대동강 유역에 설치된 낙랑군은 장기간 존속하면서… ‘ 이 대목도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백제 요서 진출설에 대해서는 중국 남조 측 역사서에만 있고 북조와 우리 역사서(삼국사기 등)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합리적 의심’을 제시하고 있다.
신라의 삼국 통일, 김유신, 화랑 등이 과거에 비해 별로 강조되지 않은 느낌이다. 아무래도 발해를 강조하면서 사실상의 남북국 시대로 역사를 서술하기 때문인 듯하다.
과거 내가 배우던 시절의 교과서보다 발해에 대한 내용이 조금은 더 자세히 나온 것으로 보인다. 정효 공주 묘지명 등 여러 사적도 등장한다.
일본과의 문화 교류에 있어서 최근 호남 지방에서 발견된 일본식의 고분 (전방후원분)이 언급되는 점이 특이하다. 가야 고분에서도 일본 유적이 나왔다고 한다. ‘임나일본부설’ 등에 구애받지 않고 한일간의 문화 교류 흔적을 계속 찾아 연구했으면 한다. 발해 유적에서 십자가를 목에 건 보살이 발견된 것도 특이했다. 경교(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흔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도 아잔타 석굴,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대불, 중국 윈강 및 둔황 석굴과 우리나라 석굴암을 비교한 대목도 흥미로왔다. 우리나라 석굴암이 ‘군계일학’으로 보이기는 하다.
느낀 점: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워졌다
마지막으로, 400페이지가 넘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샅샅이 읽어보며 느낀 점을 정리해 본다.
한국사 교과서가 과거보다 많이 다채로와지고 내용도 충실해졌다. 풍부한 사진은 물론, 특히 사료를 직접 제시한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든다.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교학사 교과서에 비해 분량이 적고 중단원 뒤 확인 학습, 대단원 뒤 단원 마무리 등 자습을 돕는 장치도 많아 대체로 학생들에게 더 우호적인 교과서로 생각되었다.
위에도 정리했지만 정말 ‘좌편향’적인(즉 노동자와 농민을 강조한) 부분은 그것으로서 충분히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우편향’ 교과서도 자유롭게 유통된다는 전제 하에 그리 큰 문제는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북한의 친일파 척결, 자유시 참변 등 몇몇 부분에 있어서 사실과 다른 듯한 부분은 수정을 할 필요가 있다.
이 교과서를 다 읽고 대한민국이 부끄러워졌는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워졌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1979년부터 1987년까지 민주화를 위해서 애쓴 역사,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 역사가 잘 나와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 한국사 교과서가 지난 30년 사이에 이렇게 내용과 형식이 풍부해졌다는 사실 때문에 그렇다. ‘좌편향’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몇 개의 대목이 포함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대한민국이 이제 그런 역사 서술을 포용할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라는 것을 시사한다.
아, 앞으로는 그렇지 않은가?
덧, [여기]는 이 교과서를 구매할 수 있는 금성도서몰 사이트이다.
원문: 오석태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