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묵 하면 부산어묵 아이가?
지역명과 그 지역의 특산품이 나란히 붙어 쓰이는 경우는 흔하다. 제주 하면 감귤, 이천 하면 쌀, 보성 하면 녹차. 이렇게 일반적으로 지역을 대표하는 특산품은 대부분 가공을 거치지 않은 농산품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감귤은 제주에서만 나지만, 감귤주스는 서울이든 부산이든 대전이든 공장이 있는 곳이면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가공품에 지역명이 붙을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유독 지역명과 떨어지지 않는 가공 특산품이 있다. 바로 ‘부산어묵’이다. 앞서 감귤주스를 예로 들었던 것처럼, 어묵도 공장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만들 수 있다. 실제로 사조대림의 대림어묵 공장은 안산에 있고, CJ의 삼호어묵 공장은 이천에 있으며, 동원F&B의 어묵 공장은 성남에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마트에서 쉽게 발견하는 유통 대기업들의 어묵조차 ‘부산’이라는 지역명이 함께 붙는다.
대기업도 욕심내는 ‘부산어묵’ 브랜드 네임. 그러나 부산어묵의 원조이자 정통을 주장할 수 있는 한 회사는 스스로 부산어묵의 이름을 버렸다. 심지어 부산어묵 중 가장 유명한 어묵을 넘어 프리미엄 어묵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까지 창조했다. 이 회사는 2011년 25억 원 수준의 매출액을 2021년 전자공시기준 매출 787억을 달성하며 10년 만에 약 32배에 가까운 성장을 이뤄냈다.
이쯤 되면 이미 눈치챈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 어묵 업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고 평가받는 ‘삼진어묵’이다.
우리나라 어묵 역사의 한 축, 삼진어묵
삼진어묵의 역사는 우리나라 어묵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1945년 우리나라 최초로 한국인이 만든 어묵공장은 부산 부평시장의 동광식품이다.
뒤이어 1953년 일본에서 어묵 제조 기술을 배워 온 창업주 1대 故 박재덕 대표가 영도 봉래시장에 삼진어묵을 설립했다. 한국전쟁으로 부산에 피난민이 몰리면서 부산어묵은 호황을 맞았고, 이때 각각 동광식품과 삼진식품 출신들이 합작해 영주동시장에 환공어묵을 설립하면서 동광·삼진·환공의 3각 구도가 이뤄졌다.
곧 1960년대에 이르러 어묵 기술자들이 대거 독립하며 부산에 있는 시장이란 시장 근처 일대에는 모두 ‘부산어묵’을 만드는 공장이 들어섰다. 본격적인 부산어묵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부산어묵은 싱싱한 어육(생선살)이 70% 이상 들어갔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만든 어묵과는 다른 특별한 맛을 제공했다. 어묵에 있어 어육 비율은 식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어육 비율이 높으면 오래 끓여도 탱글탱글함이 오래 유지되지만, 밀가루 함량을 높이면 금방 퉁퉁 불어 맛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삼진어묵은 아무리 원재료 가격이 오르더라도 어육 비율을 철저히 유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랜 세월 계속 삼진어묵이 소비자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묻는 질문에 2대 박종수 대표는 “좋은 재료와 높은 어육 함량이라는 두 가지 기본 원칙을 지켜왔기 때문이다”라고 답할 만큼, 삼진어묵은 제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오래된 만큼 낡은 ‘부산어묵’이라는 브랜드와의 결별
좋은 어묵을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오랜 시간이어온 회사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1950년대 어묵이 처음 나왔던 시기와는 달리 경제가 발전하고 사람들의 눈높이가 올라가면서 새롭고 맛있는 먹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어묵은 ‘안 좋은 생선으로 비위생적으로 만든다’는 인식이 퍼졌다. 여러 암울한 상황이 겹친 시점에 2011년 2대 박종수 대표의 건강마저 악화되며 유학을 하던 3대 박용준 대표가 귀국하여 가업을 이어가게 됐다.
회계를 전공한 박용준 대표가 본 삼진어묵은 처참했다. 신축한 공장 탓에 대출은 많았고, 컴퓨터 하나 없이 수기로 주문과 장부를 관리하고 있었다. 관리 수준은 둘째 치더라도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장 매출을 내는 거래처가 필요하다는 점이 제일 절망적이었다.
박용준 대표는 맨땅에 헤딩하듯 영업에 나섰다. 어렵게 거래처를 찾아가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어묵업체’라고 소개하면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내 쓰는 데도 오래됐다.
눈물을 머금고 가격을 낮춰서 거래를 텄지만, 이번에는 경쟁업체가 더 낮은 가격으로 거래처를 빼앗아 갔다. 이렇게 가다가는 제살 깎아먹기만 될 것 같다고 느꼈다. 차별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삼진어묵만의 브랜드를 만들기로 결심했던 순간이다.
하지만 시작부터 모든 것이 잘되지는 않았다. 디자이너를 고용해 설날 선물세트 속지를 만들어 돌려보기도 하고, 소셜커머스에서 업체 수수료까지 포함해 55%에 달하는 파격적인 할인 프로모션을 해보기도 하고, 4개 전통시장에 오프라인 매장도 열어봤다. 하지만 모두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심지어 오프라인 매장은 판매 부진을 겪고 6개월 만에 모두 철수했다.
표면적으로는 절대 대박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결과였다. 그러나 다양한 시도와 시행착오 속에서 나름의 노하우가 축적되고 있었다. 브랜드 자산도 쌓여가고 있었다.
삼진어묵의 터닝 포인트, 어묵 베이커리
그렇게 2013년, 터닝포인트가 찾아왔다. ‘어묵 베이커리’였다. 어묵업계 최초로 빵집처럼 오픈키친 형태의 조리공간을 만들고, 고객들이 원하는 어묵을 고를 수 있도록 매장을 꾸몄다. 그리고 어묵 크로켓, 단호박 어묵, 연근 어묵, 베이컨말이 어묵 등 수십여 종의 새로운 어묵을 개발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 제품인 어묵 크로켓은 고급 생선살만 사용한 반죽에 치즈, 땡초, 카레, 고구마, 새우, 감자를 넣어 만든다. 특히 식감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어육의 비율을 90%까지 끌어올려 프리미엄 어묵의 맛을 분명히 느낄 수 있게 했다.
박용준 대표는 어묵 베이커리를 통해 비위생적으로 만드는 불량식품이라는 편견을 깨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인식을 가진 이들에게 제조과정을 직접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고객들이 직접 모든 과정을 지켜볼 수 있게 오픈키친 형식의 매장을 구하여, 장인들이 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어묵을 만드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또한 기세를 이어 2014년에는 삼진어묵 체험 역사관을 만들었다. 일반 소비자들이 어묵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다. 그렇게 ‘프리미엄 어묵’이라는 개념을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하게 했다.
프리미엄 어묵이라는 이름의 대명사가 된 삼진어묵은 수많은 곳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는 우리나라 주요 백화점 및 복합쇼핑몰뿐만 아니라 주요 온라인몰에서도 판매되며, 전국 어디서나 삼진어묵을 접할 수 있게 됐다.
이제 부산어묵보다 삼진어묵이 더 유명하다
검색어는 더 의미심장한 결과를 보여준다. 네이버 데이터랩 검색어 트렌드 분석 결과, 2016년 1월부터 2022년 7월까지 부산어묵보다 삼진어묵이 약 2.5배 더 검색된 것으로 나타났다. 검색량을 기준으로 봤을 때, 이제 자타공인 삼진어묵이 부산어묵보다 더 유명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사실 부산어묵에는 삼진어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삼진어묵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초량시장의 영진어묵도 있고, 프리미엄 어묵계의 또 다른 강자 고래사어묵도 존재한다. 하지만 일반 소비자들에게 삼진어묵이 더 유명한 이유는 삼진어묵이 프리미엄 어묵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프리미엄 어묵의 세계가 열리기 전까지, 부산어묵 업계의 주요 매출처는 전통시장이었다. 말하자면 전통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B2B 영업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브랜드 가치보다는 50원이라도 싸게 공급하는 것이, 1mm라도 얇게 생산해서 원가를 절감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가격 위주의 경쟁을 하다 보니 영업을 하면 할수록, 제품을 팔면 팔수록 손해인 경우도 생겼다.
그러나 삼진어묵은 일반 고객들 대상의 B2C 위주로 시장을 재편했다. 판을 바꾼다는 것은 말이 쉽지, 실제로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삼진어묵은 어묵 베이커리라는 참신한 아이템을 통해 이루어냈다.
겉으로 보면 운 좋게도 어묵 베이커리 한 방이 터져 이룩한 성과 같다. 하지만 안을 살펴보면 부단한 노력과 시행착오가 보인다. 세상 그 어떤 일도 하루아침에 운 좋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박용준 대표는 야심찬 선언을 했다. 어묵을 세계로, 우주로 보내겠다는 야망이다. 이를 위해서 삼진어묵은 수많은 숙제를 풀어야 할 것이다. 이 과정은 B2B에서 B2C로 전장을 바꾸던 그때처럼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삼진어묵이 처음의 그 노력을 유지한다면 삼진어묵이 그리는 나름의 성과를 반드시 이루어낼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원문: 경욱의 브런치
참고자료
- [디렉터스 컷] 삼진어묵 (EBS 비즈니스 리뷰)
- 「어묵, 젊은 감각 만나 날다」 (2016.03.15 신동아)
- 「[special feature] ‘삼진어묵’ 박용준 실장」 (2015.09 톱클래스)
- 「박용준 삼진어묵 대표 “몰랐던 소비자 알아가며 어묵 新시장 개척했죠”」 (2019.03.14 한경닷컴)
- 「[부산의 老鋪] ① ‘부산어묵’ 삼진식품·영진식품」 (2011.03.10 부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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